#38ㅣ베토벤을 만나러 독일의 본에 가서 그녀와 낯선 하룻밤을 보내다
“Where is the Beethoven’s house?”
“I’m sorry, Can you speak again, please?”
“Bae-to-ben house...”
“Ah, Do you mean ‘Batman house?”
“Yes, Yes!!!”
천천히 다시 읽어 보기 바란다. 나는 분명 베토벤의 집이 어디 있냐고 물었는데 그는 베트맨의 집이라고 들었다. 근데 난 맞다고, 맞다고를 연발했다.
그러니까 첫아이를 낳고 세 돌이 되기 전 서른 즈음 내가 꿈꾸던 유럽에 가기로 맘을 먹었다. 남편이 회사 다니는 걸 극도로 싫어해서 회사 다니는 걸 포기하면서 공부를 더 하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세 돌 때쯤 되니 아이가 내 손에서 떨어질 때쯤 또 요동치기 시작했다. 일단 한번 가보는 걸로... 그때 막 배낭여행 붐이 일어났고 독일에 우리 오빠 내외가 법 공부를 하고 있던 때라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처음 도착지를 오빠가 사는 독일로 잡았다. 그때는 인터넷이 나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인터넷 검색이라는 말도 생소할 때라 중고등학교 시절에 제2 외국어로 독일어를 했던 최소한의 지식으로 지리적 위치와 ’ 구텐 타그?‘라는 인사말 하나 가지고 가야 하는 밑천 없는 무식함으로 무장(?)하고, 여행 계획을 세운다기보다는 가서 부딪히며 그냥 되는 데로 다녀야 하는, 그야말로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발 닿는 데로 가게 되는 낭만적인 여행을 꿈꾸어야 할 때였다. 그래도 그곳에서 사는 오빠가 있어 조금은 안심하고 떠났다.
독일 하면 그래도 프랑크푸르트 공항 정도는 낯익은 이름이었다. 거의 20년 전에 내 눈에 비친 공항의 모습은 김포 공항에 비해 꽤나 반짝이는 이국적인 모습이었다. 온통 키 큰 유럽 사람들의 코쟁이들이었고 동양인은 눈을 씻고 봐도 없는 그런 때였으니 나는 동물원의 원숭이 마냥, 그들은 내가 안중에도 없었겠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만 껌벅이는 긴장하고 경직된 까만 머리에 마른 조그만 여자로 보였으리라.
일단 오빠의 작은 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여형제가 많다 보니 오빠와의 관계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먼 타향에서 보니 외국인 틈바구니에서 그것도 독일법으로 유명한 만하임 대학에서 학위를 받으려는 안쓰러움이 묻어났고 넉넉지 않은 유학생 생활이라 번번한 생활 도구 하나 없는 와중에도 막내가 왔다며 처음으로 외식한다며 맛난 피자도 사주고 이것저것 챙겨 주느라 애를 썼다.
줄이 대롱대롱 매달린 전철이 지나가는 저녁거리가, 엽서에서나 볼 수 있는 추운 겨울 눈발이 하얗게 날리고 가로등이 흐릿하게 보이는 빨간 건물들 사이로 줄 달린 전철이 지나가고 그때가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반짝이는 거리거리들이 딱 그림 같은 그야말로 황홀한 모습이었다. 그 풍경에다가 아파트 밑에 있는 빵집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냄새는 유럽의 냄새 그 자체인데 그렇지 않아도 시차로 일찍 눈이 떠져 버린 내 코끝을 강하게 자극했다. 하트 모양의 딱딱한 빵 위에 살살 박힌 소금은 짜면서도 달짝지근한 맛과 어우러져 쫀득하고 바삭한 약간 탄듯한 그 맛이 진정 독일 빵 맛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커다란 빵을 뜯어먹었던 기억이 진한 구수함으로 남는다.
여행의 긴장으로 피곤할 텐데도 유럽에 와 있다는 설렘으로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한 나날을 그 독일 빵과 함께 더욱 즐겁게 보냈다. 물론 그렇게도 나와 함께 해야 하는 아이와, 함께 사는 시부모님과, 치열한 회사생활을 자청하는 남편의 눈들이 없으니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났다. 자 이제 배낭여행을 떠나보자! 맨 처음 여행지로 오빠 집에서 두어 시간 거리에 있는 Bonn(본)으로 정했다. 기차를 타고 가야 하니 오빠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난 베토벤이 태어나고 온갖 교향곡들을 써 내려간 내가 그토록 지겹게 쳐댔던 그 수많은 음악을 만들어낸 그분을 내 눈으로 봐야 했다.
바로 돌아와야 하는 일정이라 간단하게 짐을 싸서 기차를 탔다. 난 이미 유레일 패스를 샀기 때문에 그 기간 내에는 어디를 가든, 몇 번을 타든 똑같은 돈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만 건너가지 않으면 타면 탈수록 돈을 버는 셈이다. '본'이라 해서 난 오스트리아 '빈'으로만 여겼으니 학교 다닐 때 지리 시간에는 뭐 했는지... 독일의 본에서 태어난 베토벤은 이름도 참으로 근사하다. 크게 될 인물은 이름도 달라야 한다며 우리나라도 작명소 같은 곳을 이용하지만 유럽 등 다른 나라도 그런지 역사적으로 이름을 날린 천재적인 인물들은 이름도 멋지다. 쇼팽, 모차르트, 소크라테스, 세바스찬,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등 나도 멋진 이름으로 바꿔볼까?
이름으로 세상에 빛이 되게 한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조해 신생 어를 이 세상에 내놓았고, 나폴레옹은 나라를 구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으로 세계 최고의 미술가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하셨는데, 내 이름은 그저 우리 이모님이 '진아'도 아니고 지나가다가 '지나'가 생각나서 지으셨다는데 동사무소에 가서 이름을 올리려고 보니 '지' 자의 한문은 있어도 '나'자의 '나'는 한문이 없는 관계로 할 수 없이 한글로 올렸다는 무의미하고 뜻도 없는 지나는 어찌하오리까? 언어가 주는 이런 미묘하고도 엄청난 차이가 베토벤이 베트맨이 되기도 하고 진아가 지나가 되어 어릴 때에는 '쥐 나왔다'를 빨리 말하면 '지나왔다'가 되어 거의 모든 아이들이 책상으로 튀어 올라가는 바람에 '쥐녀'라는 어이없는 별명도 가지게 되었는데, 미국에 와서는 개명할 필요도 없는 'Jina'로 불리게 되니 참 재미있는 언어의 농간이다. 이름 때문이었나? 기차에서 보는 아름다운 풍경을 놓쳤다. 이름으로 말이 길어졌다..
드디어 본에 도착! 그러나 서울에서 김 씨를 찾는 것도 아니고 본이라는 도시에서 베토벤 하우스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차도 없고 버스 노선도 모르고 더군다나 독일어도 모르는데 정말 무식의 용감함이 또 한 번 빛을 발한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았다. 새로운 사실을 안건 독일 사람은 영어를 잘 못 한다는 사실이다. 같은 유럽이니 영어는 기본이고 각자 나라의 말을 하리라 단언했다. 하지만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 옆에 같은 동양이라고 같은 말을 쓰나? 풋! 어이없는 나의 어리석은 판단이다.
일단 난 독일어를 영어 보다도 못하니 그나마 그들에게 영어로 말할 수 있느냐를 먼저 물어보고 안다고 하면 베토벤 하우스를 아느냐를 수없이 묻는데, 멀리서 키가 크고 잘생긴 독일 남자가 걸어온다. 그 옆에는 자그마하고 이쁘장한 긴 생머리 동양 여자가 같이 웃으며 오다가 내가 먼저 다가가니 여자가 살짝 뒤로 물러서고 난 여지없이 남자에게 베토벤 하우스를 물었는데 둘이 웃는다. 그러고선 가던 길을 간다. 아... 이제 어떡하지? 한국말이 절로 나왔다. 되돌아가야 하나...
그때 몇 발자국 앞으로 가던 여자가 돌아서며 날 불러 세운다,
“혹시 한국분이세요?”
“네,... 한국분이셨어요?”
“안타까워서 하는 말인데 베토벤 하우스는 찾기 어려울 텐데...”
“그럼 택시라도 타야 하나요?”
“그건 좀...” 하며 말을 흐린다.
전말은 이랬다. 먼저 독일식 발음으로 베토벤은 베토^븐 이라고 해야 알아듣고 영어로는 베~에토븐 이라고 해야 하는데 나는 한국에서 쓰던 발음 그대로 베. 토. 벤이라고 또박또박 말을 하니 이들은 만화에서 나오는 '베트맨' 집을 찾는 걸로 알고 웃었다는 이야기이다. 더군다나 먼 거리에 있다니 어찌 설명을 하란 말인가?
그런 곳에서 동양사람을 그것도 한국 여자를 만났으니 반가워도 너무 반가웠다. 하지만 그 여자는 처음에 한국 사람임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작가로서 소설도 쓸뿐더러 시도 쓰고 신 00의 작사가 이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태여 밝히고 싶지 않았을 텐데 내가 너무도 불쌍해 보였나 보다. 몇 마디만을 주고받았는데 자기 집으로 같이 가자고 제안을 했다. 아! 이게 배낭여행의 묘미로구나.
근처에 살고 있는 집으로 갔다. 미국과 비슷한 타운하우스 같은 개념의 아담한 집이었다. 줄줄이 옆집들이 붙어 있고 몇 개 계단을 올라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너무 희한한 광경을 보았다. 집이 온통 양초와 화초로 가득했다. 온 곳에 화초와 어우러져 울창한 숲 속에서 불놀이하면 딱 맞겠다 싶었다. 그녀의 남지는 한국에서 온 자기 여자의 친구인 양 너무나 신나 하며 차를 만들겠다며, 이야기하라며 자리를 비켜주는 센스까지... 보기 좋은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저녁을 먹고 자기 집에서 자고 일어나면 같이 베토벤 하우스에 가자고 제안했다. 난 싫을 이유는 없었지만 처음 만난 집에서 잠까지 잔다는 게 조금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었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으로 독일 온 낯선 여자를 집에 초대해서 밥 먹이고 잠까지 재워 준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닐 텐데 날 어딜 믿고 그런 제안을 하는 걸까? 더군다나 연인도 있는데... 참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그녀와 나는 그냥 통했던 거 같다. 적어도 서로가 이상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걸
집 근처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와서는 차를 마셨다. 집안 전체에 빙 둘러 쌓인 초들 이 천장에 매달려 있는 불빛에 흔들렸다. 그녀는 일찍 유학생으로 와 학교를 다니며 독일 책을 한국어로 번역도 하고 자기가 쓴 책을 선물로 주었다. 작가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슬픔이 길수록 사랑은 깊다'라는 책은 자신의 일기를 바탕으로 가슴 끓는 절절한 젊음의 사랑과 슬픔에 관한 이야기로 그녀의 책 이야기를 하면서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의 사랑 이야기도..
다음날 그녀의 남자는 내 앞에 아주 기다란 자전거를 내놓았다. 영화에서 보던 쌍둥이 자전거다. 한 줄로 길게 두 개의 자전거가 붙어 있어서 앞사람과 보조를 맞춰 뒷사람은 페달만 밟으면 되는, 하지만 호흡이 맞아야 서로가 쉽게 달릴 수 있다. 하... 이런 행운까지... 냉큼 올라탔다. 멋진 독일 남자가 앞에 타고난 뒤에서 페달만 밟으면 이 도시에서 우울했던 결혼생활에 지쳐버린, 일에서의 탈출을, 훌훌 떨쳐 버릴 수 있는 홀가분함을 일시에 날려버릴 거 같았다. 너무 신이 났나 보다. 펄럭이는 나의 통바지가 바퀴에 끼여 찢어진 줄도 모르고 탔으니 말이다.
난 베토벤의 교향곡 중에서 5번 운명교향곡을 좋아한다. 솔직히 말하면 캬랴안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좋아했다는 게 맞다. 그 당시 카라얀의 얼굴이 너무 멋져 베토벤 5번을 지휘하는 모습이 살아 있는 베토벤 같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그냥 그가 300년 전으로 돌아가 작곡하고 직접 지휘하는 것 같았다. 암튼 베토벤 하우스는 그들과 가지 않았으면 찾지 못할 정도로 싸인이 없었고 기념품도 거의 없어서 난 내가 좋아하는 5번 소나타 한 피스만 손에 쥘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보수가 되어 그래도 번듯한 박물관 정도를 예상했는데 그냥 그대로의 초라한 집, 그런 집에서 태어나 미치광이로 말년을 여기에서 보냈구나 생각하니 베토벤을 이해하며 음악을 대했더라면 좀 더 심도 있는 음악에 대한 이해가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근처에 베토벤 동상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어찌나 무서운 얼굴로 버티고 있는지 그 도시 전체를 집어삼킬 정도의 위압감으로 난 느꼈다.
소소한 얘기들과 아이스크림을 먹다 보니 그녀와 헤어지는 시간이 왔다. 내가 그 집에서 눈여겨본 책이었던걸 어찌 알았는지 자기도 아꼈을 책 모윤숙의 '렌의 애가'와 함께 돈 봉투를 주었다 무슨 돈인지, 어디에 쓰이는지, 얼마인지 묻지도 않고 그냥 그녀가 한국 어딘가에 보내달라는 말만 기억한다. 하룻밤의 신뢰가 돈을 전달해주는 것이라면 구태여 말의 힘을 빌릴 일이 아니다. 그 시대가 구석기시대쯤이라 돈이란 그저 종이에 불과한 때도 아니고, 은행이 없어서 돈이 있어도 어딘가에 보내지 못하는 때도 아니고, 그녀가 말이 안 통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우린 그저 봉투를 주고받았다.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난 오빠에게 부탁해서 바로 해결했고 일은 마무리되었다.
슬픈 3번 2악장 장송 교향곡처럼 눅직한 베토벤의 화난 얼굴 모양새의 본 도시
이름 때문에 놓쳐버린 풍경을 밤 기차에서 보았다. 본의 모습은 독일 최초의 도시답게 오래되고 낡은 베토벤 하우스랑 닮았다. 그나마 베토벤의 도시로 알려졌기 때문에 관광객이 있을 뿐이지 고즈넉 하다못해 슬픈 3번 2악장의 장송 교향곡처럼 눅직한 베토벤의 화난 얼굴 모양새였다. 거기에 슬프다 못해 인생의 모든 고통을 어깨에 짊어지고 그 작은 가슴에 담고 있는 젊은 여인처럼 촛불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살고 있는 그녀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그때가 하필 너무도 추운 겨울이었고 그녀와 젊음의 슬픈 고뇌에 동화되어 내 마음도 무거웠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차갑지만 시원했던 자전거 바람에 통바지의 찢김이 없었다면 슬픈 베르테르의 이야기처럼, 모윤숙의 렌의 이야기처럼 회색빛 그림만 남을 뻔한 여행이었다.
만약 그녀를 못 만났다면 베토벤 하우스는커녕 베트맨 하우스도 못 찾고 그냥 돌아갔을 텐데, 그 길을 그렇게도 헤매고 있던 낯선 길 위에 우연히 그들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인연은 필연을 가장한 우연이라던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던가,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분명 내가 그렇게 지겹게 쳤던 곡을 만든 그 사람의 생애를 보러 그 먼 땅까지 물어물어 갔는데, 지금까지도 독일 하면, 양초를 그토록 좋아한 그녀의 긴 생머리와 독일 남자랑 탔던 자전거만 생각나는 거 보면 베토벤을 보러 가는 우연을 가장한 그녀와의 만남이 필연이 된 인연이었나 보다.
오빠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을 창문 너머로 흘깃 보았던 거 같다. 지금 내 옆을 지키는 컴퓨터 정지 화면의 빨간 불꽃이 번졌다 사라지는 그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