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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Jan 15. 2021

당신의 '감정 나이'는 어디쯤인가요?

만 나이나 생체 나이 또는 생화학 나이는 들어봤어도 감정 나이란 말은 너무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365일을 보내고 새해가 되면서 사람이나 동물은 한살이라는 숫자로써의 나이를 챙겨 갖는다. 한해를 넘기며 가지게 되는 숫자로써의 나이  신체나이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이기에 나이 듦의 단면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고 가늠할 수 있다.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있고, 나이가 들면 그동안 살아온 삶의 무게가 얼굴로 나온다는 말도 있는데,


오랫동안 내재된 내면의 생각과 삶의 희로애락이 나이가 들면서 겉으로 표현되어 남에게도 보인다는 말로 해석된다. 모두 젊을 때부터  살아야 나이가 들어도 추하지 않고 좋아 보인다는 일종의 경고성 멘트다.


한 해가 시작되면 신체나이는 한 살씩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진다. 그러나 생체나이나 생화학 나이는 나이가 같은 사람들을 그룹별로 나누고 그 그룹 안에서 등수를 매긴다. 즉 같은 성과 같은 나이를 100으로 놓고 그중에서 당신의 생체나이는 몇 살 정도이고 몇 등이라는 정확한 데이터와 함께 넘버의 잣대로 보는 기준이다. 지극히 객관적이고 수치로 판단하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없는 나이 계산법이다. 즉 내 나이는 50인데 신체나이는 나이보다 어리거나 혹은 더 나이 든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 감정 나이는 무엇일까?


이에 반해 감정 나이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워지지 않고 균일하지도 않으며 상대방에 따라 달라지는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이다. 그렇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감정만으로 판단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었을 때의 행동에 따라 이를 받아들이는 행동이 다르므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외적인 잣대로 가늠할 수도 있다.


감정 나이는 나이별로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의 감정 나이는 천차만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 차이가 각 사회나 시대마다 다른 지표로 산출되므로 조금 늦다고 감정이 메말랐다 판단할  없고 감정이 조금 높다고 이성적이지 못하다 판단할  없다. 여기에는 부모님의 교육 유무와 사회적인 환경으로 인해 각기 다른 표준으로 달라질 수 있고 평균적인 사회 진입으로 쉽게 전환될 수도 있는 찬스가 많은 시기라 감정의 나이로 어림을 탓할 수 없다.


오히려 지나친 주입식 교육으로 남이 보기에 어른스러운 행동을 한다 해도 막상 어른이 되어 억눌린 감정을 표출하며 과도하게 정신 이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어릴 때의 감정을 나이로 판단하기 쉽지 않고 어릴때의 감정 변화를 잘 살펴봐야한다.


특히 청소년 때의 감정 나이는 본성이 바탕이  가정이나 집단에서 교육적인 부분에서의 차이가 확연히 다를  있고 감정 기복의 조절장치로 인한 나이의 변화가 여러    있는 시기다. 이때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이겨내는 자신의 노력과 주위 환경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감정선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표출되는 행동이 감정 나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된 감정 나이는 어떨까?


이미 어린 시절의 감정 나이에서 조금씩 차이가 나다가 청소년기에서 확연히 달라진 감정 나이는 어른이 되어서는 돌이킬 수 없는 차이로 하늘과 땅의 높이만큼 멀어진다. 이때 감정 나이는 쉽게 겉으로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 나이 안에 감정을 교묘히 숨겨 겉으로는 알 수 없는 나이가 바로 어른이라는 꼬리표이다. 절대 변하지 않는 고집이나 아집으로 고찰된다. 어디까지가 어른의 기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기에서의 관건은 관계 속에서 불협화음 후에 나타난 행동과 마음을 어떻게 정리되어 표출하느냐에 따라 감정 나이를 따질 수 있다.


자, 여기에서 순간적으로 느낀 감정에 충실해 오롯이 당사자에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출한다면 당사자와 나의 감정 나이는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당사자가 어른이라고 보기 어려운 표현을 했거나 비이성적인 행동을 나에게 했기에 내가 필요 이상 흥분을 했을 것이다. 그럼 일단 당사자는 감정 나이가 아주 낮은 유아기적 나이일 수 있다. 당사자와 같은 레벨로 똑같은 감정을 표출했다면  또한 감정 나이가 같다고 볼  있다.


곧바로 반응하지는 않지만 그룹을 모아 대응을 한다거나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주위의 선동자와 함께 당사자를 약하게 만들어 내가 승리한다면 이는 청소년기적 감정 나이라 볼 수 있다. 혼자서는 힘이 없지만 겁 없는 몇 명이 뭉쳐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막무가내 정신으로 대응한다. 집단으로 따돌림을 하거나 떼로 몰려가 군중심리를 이용해 대응을 한다면 감정 나이가 청소년기에 머물러 있어서 성숙한 단계로 보기 어렵다.


다음은 일단 숨을 고른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래 난 어른이다. 생각이 있는 지성인이고 아이들도 키우는 입장이고 다른 사람들의 이목도 있다. 똑같이 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조용히 복수를 해야겠다. 그래 당사자의 주변에 누가 있지? 누가 날 도와 그이에게 나 대신 복수를 해줄 수 있을까? 누구에게 이 말을 전해야 나를 동조하며 그에게 날을 세워줄까? 직접 나서지 않고 돌려서 당사자의 허를 찌르게 하는 방법을 묘색 하고 있다면 당신은 청소년기를 지나 조금은 뒤를 돌아볼  있는 어른 초기 단계로 볼 수 있다. 감정 나이로는 20살 정도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어른으로 감정 나이가 풍부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너무 화가 나도 일단 잠을 하루 자고 나면 화의 반이 사라지고 또 한밤이 지나면 그 반의 반이 사라진다고 했다. 어떻게 그 화를 표출하고 어떻게 반응하느냐의 차이인데 사람이 하고 싶은 데로만 한다면 이 지구가 활활 불이 타 금세 녹아 없어질 것이다.


내가 100% 정당하다는 가정 아래 잠시 뒤돌아 보면 함께 한 시간이 있기에 당사자에 대한 연민이 생길 것이다. 관계를 시작한 시작점과 끝점을 돌아보고 일단은 관계에 대한 정립이 서로에게 정당 했나를 고찰하고 대응하지 않고 그냥 물이 흐르듯 시간이 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는 방법을 택한다면 당신의 감정 나이는 50살 이상으로 감정 나이가 풍부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자, 그러면 100점짜리 감정으로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없을까?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도 회피의 일종이다. 회피하지 않으면서 당장 일을 그르치지도 않는 방법이 있다. 회피하며 도망치는  아니라  그럴까라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나를 내려놓고 한번  생각하고 관계의 정립이 필요한 시점에 다가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지킬 수 있을 때, 100점짜리 감정 나이를 가지고 있다 하겠다. 그만큼 중립적인 사고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나의 감정 나이는 과연 어디쯤에 와 있는걸까?


이 글을 적으며 내 감정 나이가 객관적으로 어디쯤인지 가늠해 보았다. 며칠 전 마음이 너덜너덜 해진 기분을 느꼈다. 남 앞에서 눈물을 잘 흘리지 않아 나름 감정조절을 잘하고 있다 자부했는데,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나니 분하고 속이 상해 당장 달려가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코로나로 사람을 쉽게 만날 수도 없는 일이라 나 혼자 그분을 삭이려니 적잖이 마음고생이 심했더랬다.


일단 화가 났고 그 화를 당사자에게 직접 표출하지 않았고 이렇게 저렇게 복수를 해 줄까라는 마음은 넘어섰으니 청소년기의 질풍노도의 시간은 지났다. 복수는 아니더라도 일단 숨을 고르고 관망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섣불리 내 마음을 표출하지 않을 것이고 이성적으로 감정을 다스리고 있으니 감정을 마음 뒤로 숨길수 있는 꼬리가 긴 어른의 나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50 넘지 못했다. 마주 보며 대화할 수 없다. 한마디로 화해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마음을 다스리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마음이란 녀석이 나의 생각을 흔들며 상대방이 나쁘다고 부축이고 조금씩 유아기적 감정 나이가 슬며시 머리를 든다. 그러다 어른이고 지성인으로서의 감정 나이로 내면을 바라보면 금세 잠잠해지고..... 그러기를 반복하고 있다.


신체 나이와 감정 나이가 정비례로 발맞추어 간다면 가장 이상적인 나이 듦일 것이다.


신체나이는 한 살 한 살 빠르게 날아가는데 감정 나이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문다면, 오히려 더욱 어린 마음이 된다면, 감정은 그때마다 그대로 표출되고 억울해서 다투고 할퀴고 등 뒤로 돌아서 버리고 이런 악순환으로 점점 고립되어 외톨이가 되어버릴 것이다. 신체 나이가 들면서 감정 나이도 함께     나아가고 있는지 우리 모두  번쯤 뒤돌아 점검해 보아야  시점이다.


특히 코로나 블루로 예전 같은 사회적 교류가 적어지고 잦았던 만남을 미루다 보니 회복시간도 그만큼 더디어 관계 전선에 비상이 걸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심각한 우울감을 호소하고 정신적 대미지로 남녀노소 모두가 블루라인에  갇혀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 다시 아기가 된다는 말도 있는데 어른이 중심을 가지고 어른다운  감정 나이로 행동을 할 때 이 사회가 중심을 가지고 안전하고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백신이 나왔으니 이제 차례대로 백신을 맞고 백신 여권을 지참하고 어디든 떠날 준비를 하자. 우리 모두는 반드시 코로나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것이다. 밝은 마음으로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며 오늘  화를 잠시 내려놓자. 감정 나이가 100이 되는 그 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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