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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Jan 25. 2021

사랑하는 자식 앞에,  사랑받은 내가 있었다

아마 10살쯤 되었을 성싶다.


학교에서부터 그 먼 거리를 혼자 걸어 집에 다 달아 두어 개 층계를 올라가 청색 낡은 대문을 열면 하얀색 강아지가 나를 반긴다. 꼬리를 흔드는 멍멍이를 뒤로 기다랗게 연결된 복도 유리문을 열며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나, 학교 잘 다녀왔니?”

“응, 엄마”     


항상 들려오는 희미하지만 청량한 엄마의 일하다가 만 목소리가 귓가에 잔잔히 들려야 하는데, 어?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엄마?” 대답이 없다.     


단 한 번도 엄마의 소리가 들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눈을 돌리면 항상 그 자리에 계셨던 엄마의 목소리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나 당연히 한 번쯤 아니 여러 번 엄마의 부재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엄마의 부재를 겪어보지 않았기에 엄마가 내가 학교에서 올 시간에 나를 맞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소리를 질러 엄마를 불러 보았다.


정말 엄마가 집에 계시지 않았고 항상 형제자매로 북적이던 그 시간에 마침 아무도 집에 없다는 사실이 어린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강아지를 부여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두려움이 몰려왔고 너무 큰 소리로 울었는지 옆집 사시는 친구 엄마가 달려왔다. 그 시절엔 옆집이 내 집이고 뒷집도 내 집이고 그런 시절이었기에 옆집 아줌마가 마치 제 자식이 슬피 우는 것처럼 달려와 주신 것이다.     


옆집 아줌마 품에 울다 보니 엄마가 오셨나 보다. 그 뒤의 기억은 없다. 엄마를 부여잡고 울었는지 아니면 울다 지쳐 잠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랬던 엄마가 이제는 하늘나라에 가셨다. 잠시 집을 비우기만 했는데도 어린 자식이 그리 슬피 눈물을 흘리며 애타게 찾다 지쳐 쓰러질 정도로 절대적인 존재였는데 이제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고 아무리 소리 내어 불러 보아도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정말이지 미치도록 슬퍼야 마땅한데...     


희한하다. 엄마의 부재가 당연했던가? 오랜 투병 생활로 그리고 나의 타국 생활로 엄마의 존재를 거의 잊다시피 하며 내 생활에 젖어 살아서인지 엄마의 부재가 너무도 당연하고 또 너무도 당연히 쉽게 잊어간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런 자식이 이 세상 또 어디 있을까?     

.......


나의 독립생활이 시작되었다.


한국은 자식이 시집 장가를 가야 독립을 하는 문화다. 그러니까 내 나이 만으로 25살에 시집을 가고 자식을 낳으면서 내 가족을 갖게 되면서 뒷방으로 밀려나버린 나의 엄마. 더 이상 나의 엄마는 나를 지켜주지도 못할 뿐 아니라 엄마는 나를 이 세상에 낳아주셨다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그냥 내 오랜 가족 구성원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 굳이 엄마를 찾을 일도 없고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조차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엄마가 있었나 싶을 만큼 엄마의 자리는 비어 가고 내 자식의 엄마인 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내 아이의 엄마, 내가 생각하는 나의 엄마처럼 내 자식에게도 그런 그런 엄마라는 이름만 남으면 그만인 사람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정작 내 엄마를 멀리하고 내 자식만 생각하는 자식의 엄마로만 말이다.     


드디어 내 자식이 대학생이 되면서 절대 존재인 나, 엄마를 떠나게 되었다. 언제나 고개만 돌리며 그 자리에 있었던 엄마가 이제는 더 이상 옆자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처럼 알았을까? 엄마가 더 이상 엄마가 아닌 그저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생각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에게 엄마의 존재는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내 엄마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그러다 딸의 집을 방문할 일이 생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면서 엄마 품을 떠나게 되는 미국 시스템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딸이나 엄마인 나나 그런 생활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독립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아이가 혼자 생활을 하다 보니 한순간에 훌쩍 커버리는 걸리버가 된 듯 몸도 마음도 키다리가 되어버렸다.     


그 사이의 간극은 역시 어려운 상황이 되면 나오는 게 인지상정이다. ‘혼자서도 잘해요’라고 그냥 그렇게 생각한 탓인지 어련히 잘할까 생각했지만, 막상 멀리 떨어져 혼자 살고 있는 모습이 생각처럼 깔끔하지 않았다. 기숙사에서는 3,4명의 아이들이 같이 공동으로 쓰는 생활이라 깔끔하게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어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지금은 단독으로 쓰는 아파트라 혼자 얼마든지 깨끗하게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 만족스럽지 않았다.  


엄마의 기질이 발동되었다. 그렇지, 엄마라면 딸 집에 왔으니 팔을 걷어붙이고 구석구석 딸아이가 미처 손 닿지 못하는 곳을 깨끗이 치워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나는 구시대 엄마가 아니다. 만약 구시대 즉 나의 엄마 시대라면 ‘이놈의 가시나 왜 이러고 사니, 깨끗이 치우고 살아야지, 이게 뭐니, 어서 치워라! 에구 누가 볼까 무섭다, 에구...’ 이러면서 잡들이를 하며 구시렁거리며 비난하며 딸의 집을 치워주겠지만, ‘나는 신세대 엄마야! 메너 있게 조용히 그리고 깔끔히 정리해줘야지’라는 마음이었다. 물론 처음엔...     


딸은 거실 소파에서 노트북으로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때다 싶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옷장부터 차례로 정리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긴 옷은 옷걸이에 걸고 작은 옷은 잘 접에서 서랍에 넣고 얇은 옷은 종이 박스에 넣어서 흐트러지지 않게 정리하고 속옷끼리 깔끔히 넣고 잡다한 물건은 조그만 상자를 잘라 칸칸이 나누어 다시는 흐트러지지 않게 제자리를 잡아주고 있었다. 어느새 보았는지,

     

“엄마, 하지 마세요. 제가 할게요.”

“아니야, 이것만 치워줄게.”

“엄마, 진짜 하지 마”

“어...”     


단호한 딸의 대답을 뒤로하고 내 의도대로 좀 더 진도를 나가면서 의견이 대립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큰소리가 났고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면서 혼란스러웠다. 우리 시대의 엄마 상은 그저 아이들 뒷바라지로 모든 걸 희생하며 부모의 일보다는 아이들의 일이 우선이고 아이들의 성공이 부모의 성공으로 받아들이고 부모가 하지 못했고 배우지 못한 것을 마치 한풀이하듯 아이들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좌절하면 부모도 같이 좌절되는 꿈 인양 온 집안의 꿈의 몰락으로 생각되었었다.     


하지만 내 세대는 베이비부머 시대는 아니어서 최소한 나의 꿈을 이루지 못해 아이들을 통한 대리만족으로 아이들을 닦달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모세대보다 경제적으로 나아지지 않는 슬픈 세대이다 보니 부모가 자식을 돌봐 주어야 하는 그런 세대다.


그런 이유로 적어도 나는 아이들에게 나의 꿈을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너의 인생을 마음껏 펼치며 살아라’ 말했다. 부모가 절대 아이들의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 앞서 경제적인 도움을 주려 노력했었고 경제뿐 아니라 문화나 사회적인 면에서도 뒤처지지 않으려 노력했었는데,     


이게 웬일이지?


딸의 뉘앙스는 엄마의 도움은 필요 없으니 엄마의 방식을 자신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이 되면서 순간 당황했음을 시인한다. 신세대를 자청하며 아이를 너무 독립적으로 키웠나 싶고 가족의 공동체 의식인 서로 돕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야 하는 공동 구성원이 아닌 혼자의 삶을 원하는 건 아닐까? 하는 양육에 대한 나의 교육관에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물론 딱 한 마디로 그렇게 깊숙이 멀리 가버린 건 분명 아니다. 전초전이 없을 리가 없다. 20시간을 운전해서 겨울에서 여름으로 계절의 흐름을 거스르며 메릴랜드에서 마이애미까지 가는 동안 조금씩 삐그덕 거리는 말들이 조금씩 아슬아슬하게 오고 갔었다. 내 눈에 어린애로 보이지만 다 큰 성인임을 엄마인 나는 인식하지 못하고 타이르듯 하는 말들이 잔소리로 들렸나 보다.     


예전처럼 부모로서의 권위가 없어진 지 오래인 건 사실이다.


미국에서 나름 신세대라 권위적인 부모상을 극도로 싫어하고 부모와 자식 간의 거리는 결국 부모의 대화 단절에서 오는 폐해라 생각했었다. 결국, 친구 같은 부모를 자청했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려 과거 나의 부모에게 받았던 교육을 철저히 외면하며 오히려 부모가 나에게 했던 생활과 교육방식을 뒤집어 생각하기만 하면 지금 세대와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교육했었다.     


특히 권위와 나이를 내세워 자식의 의견을 묵살하는 몰상식한 어른으로 비치는 게 싫어 되도록 메너 있게 아이들 뜻에 따라 미국의 부모들이 영화나 티브이에서 나오는 것처럼 가족 간의 대화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왔건만 이런 부모와 자식 간의 심각한 간극이 있을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자식이 사는 집에 부모가 청소도 해주지 못하는 상황까지 접하다 보니 내가 그동안 시원하게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힘들게 살면서도 자식에 대한 배려와 친절함 그리고 인격체로 지켜왔던 부모로서의 신념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마음을 겪어야 했다.     


그러면서 나의 엄마를 생각하게 되었다.


솔직히 시집을 가고 아이를 길러봐야 부모의 속을 이해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타국으로 부모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더군다나 내가 떠난 후 엄마의 기억상실은 더 이상 나와의 추억을 가질 수 없었고 더 이상의 어른으로서의 대화를 할 수 없었기에 엄마와의 추억도 거기에서 단절된 탓에 더 이상 엄마와 딸이라는 자리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면서 나는 내 엄마에게 느끼는 연민이나 같은 여자로서의 대화를 가져보지 못했다. 더더구나 내가 막내인 까닭에 엄마와 가족 간의 대화에 나의 자리는 부족했었으리라. 그러면 더욱 나의 자식에게 많은 사랑을 퍼부어야 했겠지만 나 또한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 엄마와의 대화 단절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아마도 내 자식에게 느끼게 하지 않았을까?라는 반문을 해 본다.     


맞다.


여느 엄마처럼 정이 가득하고 사랑이 충만해서 사랑과 정성 그리고 희생을 자처하는 많은 엄마의 그런 한없고 끝없는 자식 사랑의 표본이 되지는 않았었다. 그동안 나의 일과 자식 키우는 일 그리고 가정 일을 나름 균형 있게 맞추고 있다 자부했고 지금까지 크게 그에 반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결국 이런 일이 터졌다. 자식을 타인처럼 메너와 예의를 지키며 대했기에 정작 긴밀하게 느끼는 가족 간의 끈끈하고 두터운 밀접함이 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한발 뒤로 물러서 아이들이 직접 부딪히며 나아가게 했던 독립정신이 사랑의 간격으로 오인해 사랑의 거리감이 느껴지진 않았나 반성해 보기도 한다.     


내가 10살 즈음에 느꼈던 엄마의 부재에 하늘이 무너져라 울었던 그 헛헛함을 내 자식도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디쯤에서 느낀 것일까?


이제는 정말 내 마음의 빈집이 되어버린 엄마의 부재가 언젠가는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크기로 느닷없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지금처럼 내 자식에게 받은 상처로 폐를 찌르는 아픔과 함께 내 엄마의 부재로 뼛속 깊숙이 느껴지는 상실감과 교차되는 이 시점에서 나를 보는듯한 똑같은 모습에 대물림되는 아픔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엄마의 영원한 부재를 잊을 만큼 바삐 살다 뒤돌아보니 가슴에 총을 맞은 것처럼 뻥 뚫려버렸음을 인식했다. 나는 이제 나를 낳아주신 엄마의 존재 의미를 상실했고 그에 따른 정신적으로 잊었던 나의 뿌리가 잘려 나갔다. 이제는 내가 뿌리가 되어 나의 자식에게 그 양분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 양분이 충분한 사랑의 양분으로 자식에게 전달되어 그 아이들이 튼튼하고 튼실하게 커 나가게 도와주어야 한다. 내 엄마가 나에게 주었던 사랑의 마음과 그 자리에서 묵묵히 지켜주셨던 나의 마음의 집을 이제는 나의 자식에게 이어 주어야 한다.


그때는 엄마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설거지를 해보지 않았고, 단 한 번도 내 손으로 내 속옷조차 빨지 않았고, 그런 엄마를 정이 없다 수없이 부정하며 살았던 세월도 있었고, 아빠로부터 방어해 주지 않으셨던 엄마의 양육을 수없이 비난했던 내 어린 시절의 방황을 조용한 흐느낌으로 반성해 본다.  자식은 죽어도 부모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죽을 때가 되면 부모의 마음을 안다는데 내가 내 자식을 키우고 이번 같은 일을 겪어보니 정말 자식은 부모의 끝없는 사랑을 알지 못함이 정답일 수밖에 없고 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게 또한 인간이지 싶다.


사랑하는 자식 앞에, 사랑받은 내가 있었다.


부모 이전에 자식이었던 내가 이제는 부모 노릇을 하고 그 자식에게 상처를 받고  상처를 덮으려  부모를 떠올린다. 돌고 도는 인생이고 인생무상이다. 이래도 한 세상이고 저래도 한 세상인 한 판 잘 살다 가는 게 인생이다. 오늘도 난 내 자식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머리 숙여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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