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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Feb 10. 2021

'홧병'이 한국 사람에게만 있다니..  그럼 중얼병은?

     

마음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메너는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행동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표출되므로 나 이외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간혹 머리로 생각한 것들을 마음의 여과 없이 그대로 입으로 방출해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긴 한데 그런 사람은 갓난아이 같은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므로 안하무인 격이라 마음의 메너가 좋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이성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로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래서 흔히들 나이 든 아주머니들의 가슴에 멍 하나씩을 안고 산다고 하고 그것을 홧병이라는 말로 진단하기도 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자기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응어리진 채 살았으면 라는 이름의 병을 얻었을까 싶지만, 분출하지 못한 화를 마음에 삭히고 삭히다 끝내 가슴에 커다란 화 덩어리가 뭉쳐져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석회가 되어 홧병이라는 무서운 병을 얻었을 것이다. 재밌는 건 이런 홧병은 아시안 특히 한국 여자에게만 있는 특이한 병이라고 한다. 시부모님께 당하고 남편에게 소리 내지 못하고 자식한테 마음껏 말 못 하는 우리네 어머니의 상이기도 하다. 그만큼 서양 사람들은 말을 못해서 병이 나는 일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어머니에게 대들지 못하는 젊은 며느리들은 중얼병이라는 심각한 병에 걸리기도 한다. 말은 하고 싶은데 어른이라 특히 무시무시한 시어머니라 대놓고 대답은 하지 못하고 혼잣말로 소리 나지 않게 중얼거리며 (남이 혹시라도 본다면 꼭 미친 사람 같아 보인다)댓꾸질 하는 병을 일컬어 중얼병이라 한다. 간혹 아이들도 엄마에게 대답하지 못하고 중얼거리는 아이도 있다. 말하자면 중얼병은 홧병의 전단계이다 . 재미있고 재치 있는 말로 포장되었지만 제때 제대로 표현을 못해서 얻는 희귀병의 일종이다.


이처럼 말을 못해서 얻는 병들을 보면 마음은 지나가는 생각 속의 일직선상에 있고  일직선상에서 생각이 나고 마음으로 삭히고  생각이 나고 마음으로 삭히고를 반복한다는 말이다. 단 한순간도 생각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마음으로 움직이고 또 지나간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며 마음을 추스를만한 수단을 마련해 주었고 불교에서는 “이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라” 는 말로 지금 이 순간은 순간적인 과거에 지나지 않음을 시사한다.


지금 당장 '생각아 멈춰라!' 하면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다.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물리며 내달린다.


그런 마음의 소리가 더욱 깊어지고 있는 때가 바로 코로나 시대인 지금이다. 벌써 1년이 지난 시점이다. 코로나와 관계없이 왕성하게 그 이전보다 더욱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코로나 블루나 더 심하면 코로나 레드라고 하는 정신적인 피로감과 우울감의 온도를 겪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 세계 인구의 1% 정도의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아마도 코로나 블루는 아니더라도 코로나 엘로우 정도의 정신질환을 경험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평소 같으면 금방 해소될 일이 자유롭지 않은 일상생활로 하루 이틀 늦어지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수입이 줄어들고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뒹굴다 보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불만에 싸인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특히 워킹맘들은 경제활동과 집안일 그리고 양육을 동시에 집에서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얼굴 붉어지는 일들이 생기고 처음엔 조심한다고 했던 것들이 내성이 생기면서 점점 과격해지고 가족 간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폭언들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일단 경제적으로 압박이 오면 일상적인 생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게 보통 사람이다. 오죽하면 잘되는 가게는 아무리 바빠도 싸움이 없고 웃으며 일하고, 안 되는 가게는 한가한데도 힘들다며 서로 싸운다 하지 않는가? 가정도 똑같다. 전에 같으면 웃으며 넘어가는 일이 돈이 벌리지 않고 수입이 절반 이상 내려가면 웃는 얼굴도 화가 난 모습이 되고 이쁜 얼굴도 못나보여 싸움거리가 생기는 게 당연지사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한들 마음껏 다닐 수 없고 모두가 집에만 있다 보니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지고 그저 가짜일지도 모르는 인터넷 세상과의 소통이 전부가 되어버렸다. 잘 지내던 친구와도 점점 대화가 단절이 되어 고립되고 여유롭게 다니던 뷰티샾이나 네일 샾 등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맛있게 먹었던 레스토랑은 사치에 불가해져 버렸으니 이런 마음을 어디에 대고 하소연할 수 있을까?     


그러다, 괜한 트집을 잡으며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배가 배배 꼬여 뒤틀린다. 나랑 비슷했던 친구가 코로나 이전이나 이후와 상관없이 잘 나가면 나는 집안에서만 뒹글고 있는데 왜 저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사는 거지? 내가 문제인가? 아니 모두가 나처럼 집에서 가만히 있는데 저 사람이 이상한 거야? 도대체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버젓이 잘 살고 있는 거지?


SNS에서 저 연예인은 너무 이쁘고 잘 사네? 흥? 왜 똑같은 상황인데 저 집만 더 잘 살게 되는 거야? 화나는데? 아니 이런 어려운 시기에 명품을 척척 산다고? 남편이 아직도 돈을 잘 버나 보네? 왜 내 남편은 찌질이 못 버는데? 에이 나만 힘들 수는 없잖아! 너도 같이 힘들어야지, 그럼 어떻게 해야 저 사람도 힘들까? 가짜 뉴스라도 퍼트려볼까? 사람들이 피폐하니까 가짜 뉴스를 더 흥미로워할 거야......     


나름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헐뜯고 생채기를 내며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아니면 더 낮은 단계로 끌어내리려는 게 인간의 저급 심리고 저급 메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만 아프다면 귀엽게 봐줄 수준이다. 마음의 메너가 좋지 않은 사람은 배가 아프기 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촌이 산 땅에 똥물을 끼얹을 방법을 먼저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행동한 다음에도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처럼 마음의 메너는 성격과 맞물려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겉으로 보는 모습으로는 구별이 쉽지 않다. 나쁜 메너라 하더라도 홧병이나 중얼병처럼 혼자만의 방법으로 삭힐 수도 있고 가짜 뉴스를 퍼트려 상대방을 곤경에 빠트리기도 하고 심지어 끝까지 공격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하는 그야말로 보이지 않은 마음의 나쁜 메너에 온 힘을 다해 공격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1년을 줄어든 생활비로 감옥처럼 웅크리고 지낸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혼자만의 방법으로 마음의 메너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없어지고 함께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 엄마들이 대놓고 말을 못 해 순진하게 홧병이나 중얼병을 얻었다면 지금은 할 말을 마음의 메너로 담아두지 않고도 분출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겼는데 바로 인터넷이다. 한국 사람들은 카톡이나 인스타그램 등으로 퍼다 나르고 미국 사람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로 한 명이 수만 명을 동시 다발로 빠르게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흠집 내기에 맛이 들린 사람들은 모이지 못하는 틈을 타 지하세계에서 암울한 음모를 꾸미듯 SNS상으로 한 사람을 도마 위에 얹어 놓고 난도질한다. 진실이 아닌 거짓 정보도 한마디가 열 마디 되고 눈덩이처럼 부풀려져 점점 커지다 결국엔 터져버린다. 가짜 뉴스에 영원히 사라지는 연예인도 있을 것이고, 불복하는 트럼프 같은 정치인도 있을 것이고, 여기저기 깊게 상처가 패이는 우리 같은 이웃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힘든 시기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돌봐주어야 한다. 행여 상대방에게 단점이 있다 해도 그 단점을 덮어주는 용기가 필요하고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하는 성숙된 메너가 필요하다. 한국 사람만 있다는 홧병이 될 정도로 화를 마음에 담지는 말고, 그때그때 말은 하되 마음의 메너가 다져진 내공이 발달된 사람처럼 한번 더 나를 다스리고 말을 뱉어보자. 그래서 내 이웃에 이런 고립된 사람이 있는지, 행여 있다면 손을 내밀어 손을 잡아주고 일으켜 주어야 한다. 마음의 다정한 메너의 힘으로 한마디만 해보자.


'힘들죠? 우리 함께 이겨내요. 이 또한 지나갈 거니까요...' 

 

하지만, 고등학생인 내 아들은 9시에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이제 겨우 이불을 뒤집어쓴 채 선생님의 말소리만 듣고 있는 듯하다. 나의 중얼병이 시작된다.

'얼른 일어나지... 에구 저러고 수업을 한다니.... 아침이라도 먹고 시작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중얼병으로 이 시기를 잘 견뎌보는 게 현명한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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