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의 집은 나만의 집이 아니라 부모님이 꾸미고 설계된 집에 자식이 얹혀 산다는 게 맞는 말이다. 물론 부모님은 자식을 위한 공간을 위한다고 하셨겠지만 어디까지나 자식의 의견보다는 부모님의 시선에 맞는 아이를 위한 공간 개념을 가지고 꾸미셨다. 아이들 또한 아직 공간에 대한 개념이나 자기 소유에 대한 정확한 선호도의 개념이 부족하다고 보고 절대적인 부모의 의견에 동의하는 수준에서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은 인테리어라 하겠다.
결혼을 하면서 본격적인 자신의 의견이 개입된다.
물론 인테리어를 전공한 사람이거나 직업적으로 관련된 사람을 제외하고 인테리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다. 인테리어도 연륜이 있어야 동선이나 자재에 대한 실용성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터넷 덕으로 공간에 대한 관심만 있다면 세계의 인테리어를 한눈에 볼 수도 있고 지식적으로도 쉽게 전문적인 자료에 접근할 수 있어서 관심의 정도에 따라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만의 공간을 나만의 입맛에 맞게 인테리어를 하기에는 모든 면에서 부족한 나이다.
더구나 결혼을 하면 나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라 동고동락해야 하는 상대방의 취향을 완전 무시할 수는 없다. 함께 사는 사람과의 취향과 성격을 고려한 공동의 인테리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함께 행복하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일단 집이 편안함을 주어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떠나 누구에게나 동의받을 수 있는 말이지 싶다.
아무리 작은 공간이라도 집이라는 곳은 사회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권리이자 최고의 힘이고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다.
그러다 아이가 생기면 이제 부부의 취향은 뒤로 밀려나고 태어난 아이의 눈높이와 생활 패턴에 온통 집중해야 한다. 일단 서재나 드레스룸으로 사용했던 공간이 아이방으로 바뀌고 그 안에 있던 가구에서부터 자잘한 소품들이 안방으로 혹은 거실로 나누어 진열된다. 그 과정에서 처음엔 제 기능을 했던 물건들이 새 방 주인의 물건과 뒤섞이면서 불필요한 것들과 함께 뒷방 창고로 밀려난다.
아이방은 아이의 물건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아이의 침대와 아이의 작은 소파 그리고 자잘한 물건을 수납해야 하는 수납장에서부터 책장.... 아이의 작은 키만큼이나 키 작은 물건들로 하나둘 방안이 채워지면서 더 이상 발 디딜 틈 없는 물건, 물건들로 점점 거실로 주방으로 아이들의 물건들이 퍼져나간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아이들의 물건으로 넘쳐나고 엄마와 아빠의 사생활 공간은 묻히고 묻혀 거실도 안방도 아이들의 키 높이에 따라 아이들 집으로 변한다.
나의 이름이 그냥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남편의 이름도 태어날 때부터 아빠라는 이름이었을 리 없는데, 나는 없어지고 엄마만 남듯 부부가 생활하며 가꾸어온 누구의 집이 아이들의 집이 되어버린다. 그러다 그런 아이들이 커서 시집을 가고 이젠 또 다른 갓난아이의 집이 된다. 이젠 그저 손주들과 자식들이 잠시 편하게 지내다 떠나 버리는 공간이 되고 사람도 집도 나이가 들어 아이들은 냄새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집을 싫어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 늙는 것도 서러운데 매일 보는 가구나 인테리어까지 우중충한 분위기가 꼭 나를 닮아가는 듯 보인다. 갑자기 고가구나 내가 그렇게도 좋아했던 엔틱가구의 중후하고 클래식한 멋이 싫어진다. 대신 요즘 유행하는 화이트나 블랙 거기에 금색으로 살짝 포인트를 주는 모던하고 현대적인 느낌이 젊어 보여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어릴 때 생각했던 어른으로서의 중후한 멋과는 거리가 먼 지금의 내 모습이다.
너무 사치하신다 싶을 만큼 예쁜 옷을 좋아하셨던 엄마의 모습이 꼭 지금의 내 모습이다. 어두운 칼라의 옷을 입으면 얼굴이 칙칙해 보이고 화려하고 밝은 옷은 얼굴이 밝아 보여 자꾸만 손이 가는 이유를 알아버린 나이가 되었다. 서글픈 일이다.
그래서 나의 공간을 찾기로 했다.
내가 어려서 꿈꾸었던 나만의 공간이 무엇이었을까? 나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지적 호기심이 부족했었는지도 모르지만 딱히 나만의 것을 고집하지 않았고 나만의 무언가를 갈망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래도 가만히 나를 돌아본다. 나는 어느 공간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가?
텅 빈 벽과 작은 전등에서 비추는 은은한 불빛이 스탠드 아래를 동그랗게 수놓고 구름처럼 푹신한 소파에 하얀 쿠션이 어서 오라 속삭인다. 너무 하얀색은 나를 들뜨게 만들 수 있으니 패스.. 회색인데 푸른빛이 도는 거의 콘크리트 색을 연상케 하지만 칙칙하지 않고 투박하지 않은 고급지고 밝은 회색을 기본으로 가져간다. 거기에 완전한 화이트와 블랙에 가까운 진한 흑색으로 간간히 라인을 넣고 진한 골드가 아닌 그렇다고 로즈골드도 아닌 딱 18K 골드 색으로 포인트를 주되 그렇다고 넓은 면으로 포인트를 주는 게 아니라 테이블의 다리라던가 스탠드의 바디 정도면 충분하다.
한 가지 꿈꾸던 것이 있었다. 상당히 고급진 호텔에서 퀸사이즈 침대가 나란히 두 개가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잠을 잘 때는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해서 각자의 침대에서 마음껏 포즈를 취하며 잘 수 있는 그런 두 개의 침대가 나란히 있어서 똑같은 스탠드와 똑같은 그림이 걸려있는 인테리어를 해보고 싶었다. 하얀 면 300수의 반듯한 고급 이불보에 베개가 여러 개 놓여있고... 창문에는 바닷가를 연상케 하는 가로로 된 두꺼운 블라인드를 치고 아침 햇살이 그 창살 사이로 조금씩 길게 내려앉으면 충분하리라.
또 한 가지는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무로 된 아주 넓은 책상을 갖고 싶었다. 글쟁이라면 낡은 책이 수북이 쌓이고 연필로 쓱쓱 써야 하는 원고지로 덮여있는 그런 낡은 듯한 책상이 연상되지만, 요즘엔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되는 아주 깔끔한 책상이라 조금 서운하긴 하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조금은 격식이 있는 깔끔하고 고급진 그런 나의 책상이라면 마음껏 나의 머리를 비워낼 나만의 공간이 될듯하다.
텅 빈 사각 공간이 주는 아득한 거리감은 우주의 신비를 가득 담은 물방울의 투명함처럼 나를 설레게 하고, 그 떨림으로 사랑의 감정을 처음 느끼는 소녀처럼 긴 손가락이 춤을 추며 노트북 자판을 두들길 것이다.
지금까지는 나만의 것을 갖는다는 것이 꿈과 같은 일이었다. 늦둥이가 있어서 친구들에 비해 아이를 양육하는 기간이 그만큼 길어져 친구들이 가끔 이야기한다. '넌 아직도 밥을 줘야 하는 아이가 있니?' 라며 놀림반 부러움으로 말한다. 그 막둥이가 크면 나만의 공간으로 나를 힐링하고 나를 찾는 시간을 가져야지 생각했지만 그렇게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옷도 젊고 이쁘고 어울릴 수 있을 때 많이 입으라 말하고, 여행도 몸이 건강할 때 실컷 다니며 즐기라고 하지 않은가? 나를 위한 공간 또한 몇 년 뒤로 미룰 일이 아니다.
공간이라고 해서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만의 방을 찾지 못한다면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곳에 나의 책상 하나 마련할 공간을 비워보자. 생각해보니 나의 엄마는 주방 한 귀퉁이에 재봉틀을 두고 그곳에서 차도 마시고 신문도 보시고 책도 읽으시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는 형제자매가 성장하면서 오빠가 주방의 한 구석에 커다란 병풍을 치고 기거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맞다. 우리의 옛 시절에는 그렇게 저렇게 자기의 영역을 나름의 방식으로 울타리 치며 생활하고 나만의 공간을 마련했었다. 지금이야 내 방 없이 주방 한켠에서 병풍을 치고 잔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말이다.
운동을 하기 전에 운동기구와 운동에 필요한 모든 용품을 미리 구입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림에 필요한 모든 도구를 구입하는 사람도 있고 음식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음식 하는 손이 작아서 뭐든 모자라게 만드는데 누구는 음식 하는 손이 커서 남에게 나눠주고도 남는 사람이 있다. 공간을 만드는 일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의자 하나만으로 차 한잔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생김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작업실이나 스튜디오에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꿈을 마음껏 펼치며 즐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재벌도 거지도 밥 세끼 먹는 건 마찬가지다. 재벌이 아니면 어떤가? 나만의 멋진 공간에서 나를 위한 음식을 만들어 여왕처럼 우아하게 먹으면 거기가 왕궁이고 재벌집이고 여왕이 되는 일 아닌가? 재벌집으로 시집을 가도 내가 싫으면 그만인 것이고 정승도 내가 싫으면 옷만 벗으면 평민이 된다. 그뿐이다. 재벌도 울고 갈 나만의 멋진 공간은 나만이 알고 나만이 느끼는 감정이다.
매일신문을 보며 차를 마시는 곳이 있다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고 아주 작지만 나만이 즐길 수 있는 편안한 공간으로 바꿔보자. 하다못해 옷장 문을 떼내고 옷을 걷어 내고 그 자리에 나의 책상을 만들어 나를 위한 자리로 만들어 보자. 김춘수 시인이 이야기했던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면 꽃이 되듯' 나의 자리에 숨결을 넣어주면 생명이 느껴질 것이다.
PS: 말이 나온 김에 시 한 편 감상하시길...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