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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Dec 12. 2020

한 끗 차이

아주 오래전에 2%라는 음료수가 나왔다.


밍밍하기도 하고 달근하기도 하고 살짝 찝찔하기도 한 이맛도 저 맛도 아닌 그저 그런 맛, 맛도 맛이지만 콜라처럼 진한 검정색도 아니고 오렌지 주스 같은 강렬한 색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그냥 물색이었다. 그렇다고 우유처럼 고급지게 하얗지도 못한 물인데 돈을 주고 사 먹으라는 음료수였다.


그런 밋밋한 맛이 광고를 타고 마치 2%를 마시면 살이 찌지 않을 거 같은 이미지와 함께 다른 음료수에 비해 오히려 비싸기 때문에 나만이 고급진 음료수를 마시는듯한 심리를 이용한 음료수의 첫시음이 아니었나 싶다. 정우성이라는 기럭지 긴 배우가 여자배우에게 가라며 소리치고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2% 부족할 때... '라는 광고를 했다. 맞다. 살짝 목이 마르다고 생각될 때 굳이 물을 마시지 말고 이런 밍밍하지만 목 넘김이 달근한 과즙을 먹으라는 의미다.  한 끗 생각의 전환이 성공으로 이루어진 대단한 음료수의 출현이었다.



거의 동시에 스타벅스라는 거대한 미국 기업이 들어왔다.


스타벅스의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뉴욕 횡단보도를 바삐 건너는 멋진 뉴요커의 광고를 내세워 마치 스벅의 로고컵을 들고 있으면 나도 뉴요커가 되는 것처럼 착각이 되어 모든 이들의 로망이 되었고 누구나 스벅의 컵을 들고 다니는 게 유행이 되어버렸다.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는 비쌀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인테리어에 투자한 비용과 렌트비 그리고 직원의 인건비까지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푹신한 의자에서 사람들과 마시며 떠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호텔 커피값과 일반 동네 커피값이 다르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테이크아웃은 말이 달라진다. 직원이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카운터에서 서서 계산하고 커피를 받고 그리고 밖으로 나가면 끝이다. 그 자리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즐기지 않았기에 그 비용의 대가를 받지 못한 상태로 거리로 가지고만 나왔고 예쁘고 고급진 컵에 담고 다 먹고 난 뒤의 설거지에 대한 수고로움도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비용을 지불한다는 것은 왠지 억울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멋진 인테리어 비용을 즐기는 값 대신 브랜드의 가치만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것 또한 한 끗 차이의 전략이다. 코로나 19 이후엔 오히려 테이크 아웃이 일상이 되었고 매장에 들어갈 필요도 없이 드라이브 쓰루로 아예 매장에 진입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이젠 인테리어도 필요 없고 브랜드만 키워 주방시설과 널찍한 주차장이 관건인 세상이 되었다. 한 끗이 다른 멋진 브랜드의 파워만 있으면 그뿐이다.


2019 한국에 들어간 지 20주년이 된해

한 끗 차이는 사람과 인간이라는 단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은 한국말이고 '인간'은 한자에서 온 말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다르게 해석한다. 물론 사람이나 인간은 똑같은 말이지만 사람이라고 부를 때와 인간이라고 부르는 차이는 과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사람아' 할 때의 사람은 한 사람으로서 개개인을 존중하며 하나의 개체로서의 의미로 와 닿는다. 하지만 '이 인간아' 할 때는 굳이 인간이 왜 이런 일을, 혹은 왜 이런 말을 동물도 아닌데 쓰냐는 의미로 약간은 비아냥거리는 속어로 쓰일 때 자주 등장한다.


가슴골이 깊게 파지고 허리가 잘록한 빨간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한껏 고혹한 눈빛을 지닌 여인이 있다고 하자.


그 여인이 마지막 정점으로 빨간 힐을 신어야 할까? 아니면 둔탁한 워커를 어글리 매치라는 이름으로 신는 게 맞을까? 물론 요즘엔 특별한 유행이 없고 개성껏 자기를 표현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룰이라는 게 있지 않는가? 빨간 힐에 하나 더 엣지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한 손에 딱 들어가는 까만색 클러치를 쥐고 그 안에서 가느다란 담배를 꺼내 물고 고개를 약간 숙여 가슴골이 보이며 불을... 깍!! 엣지 있고 세련된 모습의 장면이 연출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ㅎㅎ

역시 빨간 드레스엔 검정 클러치가 제격인 듯


북한 방송을 본 적이 있다.

일렬종대로 서서 자로 잰듯한 걸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장병 인형처럼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절도 있고 극히 씩씩해 보이지만 그 뒷면의 아슬아슬하게 힘들어 보이는 게 참으로 슬퍼 보였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단 한 사람이 수백명을 조종하는 인형처럼 움직이려면, 모든 사람의 호흡이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가 수백 명의 심장이 똑같이 뛰며 한 스텝 한 스텝 나가야 할 터인데 그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과 인내가 그 안에 깃들여 있을까? 죽음을 다해 성공시켜야 하는 중대한 임무를 가졌기에 한 명만 삐끗하면 모두가 무너지는 절체절명의 한 끗이다.


북한 열병식 모습

한 끗은 화투판 특히 섰다판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스톱을 생각하면 쉬울 거 같다. 피박의 쓰라린 맛을 아는 사람들은 면피가 되는 그 한 장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 피가 하나 모자라 더블로 점수를 내주느냐, 피하나를 먹어 면피를 하느냐는 바로 쓸모없었던 피 한 장이고 그 한 장이 고스톱의 운명을 바꾼다.


쥐고 있는 패와 깔려있는 패를 동시에 빠르게 읽어 나에게 유리한 패를 선택해서 한 개의 패를 빼는 그 짧은 순간에 모든 걸 계산해내고 절묘한 타이밍에 상대방을 제압하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한다. 그 순간의 한 끗을 위해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의식적인 선택을 반복하며 돌고 돌며 살아간다.


손바닥 뒤집기처럼 단 한 끗의 차이로 싸구려 시장 제품이 되기도 하고 고급진 명품이 되기도 한다. 명품 백의 진품과 가품을 진중하게 가름할 때도 바느질  땀의 차이로 명품과 짝퉁이 구별된다. 그림에서는 붓터치의 미세한 한 끗 차이가 모나리자의 대작이 되기도 하고 진품과 똑같이 베끼는 복사품이 되기도 한다. 운동선수들의 0.1초가 승부수의 최대 간극이 될 수 있는 게 바로 한 끗 차이이고 이 간발의 차이를 내기 위해 수많은 땀과 노력의 결과임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현악기는 건반악기와 달리 줄 하나에 모든음이 내재되어있다. 줄에 음이 따로 쓰여있지 않으니 악보에 쓰인 음을 찾기 위해선 수만 번의 손가락 놀림으로 눌러보며 들어야만 정확한 음을 찾을 수 있다. 한 끗이 아니라 한 끗의 반의 반만 다르게 눌러도 완전히 다른 음이 나오니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야만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나오는 걸까? 줄의  끗이 음악의 대가를 만든다.



이러한 한 끗은 인간의 모든 갈림길을 좌지우지하는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똑같은 상황을 놓고도 일반시민의 의식과 논평을 하는 작가와의 문제의식이 주는 차이는 양면의 손바닥처럼 극과 극의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 또한 한 끗 차이다. 똑같은 소재와 똑같은 상황에서도 완전히 상반된 문제의식으로 바라본 결과는 참혹하도록 서로 양날의 칼을 겨루는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고 한 끗 차이로 세상이 바뀔수도 있다.


사실 한 끗 차이는 순간적인 선택의 능력 차이가 될 수도 있다.


운동이나 음악처럼 열심히 노력하고 꾸준한 자기 관리로 찬란한 한 끗, 빛나는 한 발의 성과를 상으로 받을 수 있는 건 오히려 원인에 대한 결과로 받아들일 수 있어서 쉬울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BTS의 지민이 추는 춤사위의 손끝은 한 끗 차이가, 음악인을 넘어 예술인이 된 좋은 예이다.


BTS의 지민.. 손끝에서 느껴지는 한 끗 차이가 보이는가?

하지만 대단한 노력 없이 A일까? B 일까의 선택에서 오는 행운과 불행의 한 끗도 이 세상엔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노력의 산물도 아니요, 그저 도박처럼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양면의 동전처럼 순간적인 선택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그때는 우리가 흔히들 이렇게 웃으며 이야기한다.'이생은 망했다' 혹은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나 봐요..' 이러한 결과는 순간적인 선택의 능력 차이로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나의 한 끗은 무얼까 생각해 보았다.

사소하게는 내 헤어 스타일에 있다. 보통 여자들처럼 짧은 헤어를 가지고 있지만 나에게는 나만의 한 끗이 있다. 양 귀 옆으로 아주 살짝 바깥으로 삐져나간 머리가 발랄하게 보이고 얼굴형이 갸름하게 보이는 다른 사람과 다른 한 끗이다. 넓게 보면 어릴 때부터 혼자 피아노를 치면서 혼자만의 세계에 있었고, 그림을 그리면서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주 살짝 보통 사람들과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그 한 끗이 나에게도 있다. 누구에게나 한 끗은 있고 언제 어디에서나 한 끗은 연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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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얼 하나...우리 고양이가 화병에 있는 꽃을 뜯어먹다가 그만 화병이 쓰러졌고, 물이 카펫으로 흐르고, 난 소리를 지르고, 바닥을 정신없이 닦아내면서 나를 심히 자책하고 있다. 고양이가 분명 화병을 손으로 건드리고 있었고 아슬아슬하다는 걸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설마 한 나의   생각의 오류가 대형사고를 쳤는데... 한 끗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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