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건반은 하얀손? 검은손?

#12ㅣ아픈 기억

by 멜랜Jina


아빠가 퇴근하시면서 제일 먼저 엄마에게 물어 보시는 말이 있다. ‘지나 피아노 쳤어?’ 그럼 엄마는 피아노 노트를 보이신다. 그 노트에는 나의 피아노 연습시간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저녁에 1시간만 쳤어? 지나야!!!!’ 난 곧바로 집과는 동떨어져 있는 무시무시한 변소에 갇힌다. 아빠가 정한 저녁 연습시간 2시간 중 1시간을 채우지 못한 나머지 1시간을 그곳 변소에서 반성해야만 한다.

그 시절에는 화장실을 변소라고 했다. 변을 보는 장소이니 변소라는 이름이 맞는데 화장을 하는 곳도 아닌 곳을 왜 화장실이라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아픈 추억의 장소인 변소가 화장실이 된 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 변소는 우리의 일본식 기역자 모양의 집과 약 20미터 정도 떨어진 창고와 같이 나란히 붙어있는, 황토와 나무가루를 반죽해 벽에 바른 노란빛 작은 건물이다. 창고에는 전선 줄이며 볼트등 아빠의 전기사업에 쓰이는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고 나란히 붙어있는 변소는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두 칸으로 나란히 나누어져 있었다. 그나마 난 앞쪽 변소를 이용하는 게 안쪽보다 덜 무서웠다.

고약한 암모니아 냄새가 내 어린 몸에 베는듯

지금처럼 집안에 방과 화장실이 같이 공존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시절로 수세식이라면 곧바로 변기에 달려있는 버튼으로 물을 부어내려 냄새도 나지 않게 하수구를 통해 금새 내 눈에서 깔끔히 사라지지만, 그 시절의 푸세식은 사람이 그(?) 많은 것들을 그야말로 퍼내야 하는 일이므로 집안에 화장실이 같이 있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변소에 1시간 갇혀 있다는 건 무서움은 둘째치고 고약한 암모니아 냄새가 내 어린 몸에도 베는듯한 악몽으로 치를 떨었다.


대단한 각오 없이 하루에 세 번, 두 시간씩의 연습시간을 어기기란 쉽지 않은 체벌이었고 그렇게 무서운 벌을 받고 견뎌내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참기 힘든 시간은 일 년에 한 번 엄마의 태극 김밥을 맛볼 수 있는 소풍날 아침이다. 솜씨 좋기로 유명한 엄마는 선생님 도시락을 포함한 10개 분량의 김밥을 새벽부터 준비하시는데 고소하고 짧쪼롬한 냄새는 새벽부터 피아노를 쳐대는 나의 코를 너무도 달콤하게 유혹했다. 아빠의 눈을 잠시 피해 김밥 꼬투리를 맛이라도 볼라치면 어찌 그리 잘 아시는지 ‘지나야 뭐하니 어서 가서 쳐야지!’


피아노는 우리 집에서 가장 대접받는 물건이었다. 까맣고 금테가 둘러쳐진 독일의 쉼멜이라는 브랜드 이름표를 달고 응접실(거실 겸 서재) 벽 중앙에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 그 옆으로는 빽빽히 위인전집들이 책장에 갇혀있고 바닥 중앙에는 베이지색 가죽 소파 세트가 응접실다운 면모를 확실히 보여 주었다.

그런 귀한 피아노를 친다는 건 집안에서 대접받을 수 있다는 관문 같은 무언의 암시로 피아노를 치는 나는 아빠의 무한한 사랑을 한몸에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갖는 셈이었다. 그런 걸 그냥 느낌으로 알았나 보다. 그렇게 혹독한 강요를 받고도 말 한마디 못 했다는 건 공포에 가까운 체벌보다는 그에 못지않은 달콤한 특권을 뿌리치지 못한 수긍이었나보다.

똑같은 걸 반복해서 친다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아빠는 새벽 아침에 흔들어 나를 깨우고 피아노 앞에 앉힌 후 안경을 끼시고 신문을 보셨다. 지겨운 체르니나 하논을 살짝 밀쳐놓고 좋아하는 재즈를 살짝 치기 시작하면 단번에 물으신다. “뭐하니?” 난 그때 선생님이 아빠의 탈을 쓰고 아빠의 모습으로 계시는 착각을 종종 했다. 왜냐하면, 아빠는 악보를 읽지 못하시느데 내가 치는 음악이 클래식인지 재즈인지 어떻게 그리 잘 아실까? 우리 선생님이 아니고서...그 생각 이후엔 피아노 연습곡이 아닌 다른 장르의 곡은 칠 생각도 못했다.



어릴 때는 왜 그리 장래희망을 적는란이 많았는지 매 학년 올라갈 때마다 이름과 장래희망을 선생님이 물으면 난 생각할 필요도 없이 “피아니스트요”했다. 당연한 일이고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당연히 정해진 길이므로 감히 토를 달 엄두도 내지 못했다. 주입식 교육이 그렇게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난 피아노가 정말 싫.었.다. 난 그림 그리는 게 피아노 치는거보다 좋았고 오히려 공부하는 게 더 좋았다. 아빠는 선생님께 찾아가 “우리 지나는 피아노를 치는 아이니 공부하라는 말 하지 마세요” 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셨지만, 정말이지 단 한번도 성적표를 보신적이 없다. 나는 내 친구보다 점수가 밀리면 아빠보다도 먼저 일어나 시험공부를 해서 따라잡아야 직성이 풀리고 미술 대학교에 다니는 언니들의 작품을 몰래 도와주는 기쁨이 피아노 치는 것보다 훨씬 컸다.

아빠 사랑의 특권을 포기해야만 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합격만 하면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와 내가 원하는 기타를 사주시겠다면서 호언장담을 하신 말씀에 힘입어 서울에서 가장 전통 있고 유명한 예고에 시험을 쳤다. 1차 관문인 필기시험에 높은 점수로 통과했고 2차 관문인 지정곡과 항아리 단지에서 뽑는 스케일 시험도 무사통과했는데, 3차 관문인 자유곡에서 그만 낙방을 한 것이다. 첫 음부터 흔들렸다. 선생님의 주관적인 판단을 막기 위해 시험장에 선생님과 피아노 치는 학생 사이에 커튼을 천정에서 밑으로 길게 드리웠는데 하필 빨간색 커튼이었다.

빨간 손을 줄까? 파란 손을 줄까? 변소 귀신이 왜 등장하는지..

핑계 같지만, 빨간 손을 줄까? 파란 손을 줄까? 라는 변소 귀신이 왜 생각 났는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덜덜 떨리는 판에 빨간 귀신 손이 나에게 뻗치고 있으니 테크닉은 당연한 거고 음악성을 보는 중요한 시점에 떨리는 마음만큼이나 빨간 손이 떨리는데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불합격이지.

아빠는 단 한마디만을 하셨다. “떨어졌더라” 내 눈을 외면하시며 말하셨고 그 외면이, 절대적인 존재로부터의 버림받음이, 내 평생의 쓰라린 외로움의 굴레로 남아있음을 그 순간에는 감히 몰랐다. 나도. 단 한마디만을 내뱉으신 아빠도.

그 후로는 내 귀로 들리는 모든 것이 소음이었다. 당대의 비틀즈나 퀸의 락 음악도 이선희나 김건모의 노래도 심지어 영화관에서 들려오는 사운드 트랙마저 싫었다. 보이는 감동 스토리 보다 들리는 소음을 막지 못해 영화 보는 재미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내 차 안에는 씨디 한 장 없이 달려야 하는 무음 자동차였고 덕분에 동시대에 살았던 남편은 같은 시대의 유명한 노래나 영화를 너무 모른다며 세대 차가 난다고 가끔 핀잔을 준다.

만약 나에게 그 어린 시절, 꿈에서 그 거대한 피아노를 번쩍 들어 창문 밖으로 던져버릴 정도로 싫었던 피아노가 아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림과 공부에 재능이 있다는 걸 발견하시고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해주셨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도 이제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되어보니 아빠는 아빠의 못다 하신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시고자 했지만, ‘자식은 부모의 몸을 빌렸을 뿐 하나의 존재라는 인식은 하지 못 하셨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몇십 년이 흐른 몇 해 전에야 난 힘없는 아빠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하셨어요? 저한테...”
“...당연히 될 줄 알았지...”


아빠만 몰랐다. 당연히 떨어질지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지금, 이 순간의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