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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Feb 11. 2022

세 번째 자가격리를 마치고,

세상과의 단절을 세 번째 경험 중이다.

남들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 일을 나는 세 번째 돌입했다.


첫 번째는 2020년 여름,


2010년? 아니 2020년? 와, 10년의 격차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연달아 기억되는 것을 보면 2000년이 된 후의 연도는 아무래도 거기서 거기, 한마디로 세월의 흐름이 단기간처럼 휙 지나가 버린 듯하다. 특히 1900년대 끝자락을 산 세월이 2000년대를 산 세월보다 많아서인지 아직도 2022년이라는 년도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해로부터 2000년까지가 끝이고 그 이후는 제2의 시대가 도래하고 얼마안되 적응이 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2000년이 지나면서 세월의 단위가 달라진건 세대가 달라진 탓일까 시간의 생소함은 세월이 빠른 건지 나의 머릿속 시계가 무디어 가는 건지 통 가늠하기 어렵다.


정확히 2020년 여름이었다. 코로나가 그해 2월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하면서 미국의 코로나 환자가 생각하기도 싫지만 사망한 시신을 수습조차 할 수 없어 바디를 싼 비닐 채 거리에 내동댕이 쳐졌고 냉동차에 시신이 쌓여가도 옮길 장소가 없어서 차 안에 그대로 방치되었는가 하면 미국의 의료 붕괴가 순식간에 붕괴되어 세계에 미국의 민낯이 고스란히 내보이는 최악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난 한국행에 몸을 실었고 미국에서 온 바이러스 덩어리인 원숭이처럼 한국 땅을 밟았다. 케리어를 끄는 바퀴 소리만 들려도 그 집은 주홍글씨가 새겨진 것처럼 미국에서 온 도둑고양이가 되어야만 했다. 몇 번의 코로나 검사를 거치고 거치는 14일 동안 소리소문없이 방 안에 갇혀야 했다. 그때만 해도 강남구청에서 친히 조그마한 화분과 함께 커다란 가방에 격리 동안 잘 지내라며 마스크며 세정제 등 친절한 격리 서비스를 제공했었다.


두 번째는 작년 2021년 여름이었다.


어김없이 14일 동안 격리를 해야 했고 더욱 치열해진 외국인에 대한 격리 조치가 극에 달한 해였다. 그나마 한번 해보았다고 미리부터 마음을 먹어서였는지 첫 번째보다는 조금 나았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하는 이상야릇한 신 환경에서 생활하다 정확히 14일 후면 자유의 몸이 될 것을 아는 상황은 몸과 마음가짐이 확연히 다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격리였다. 핸드폰이 가만히 한 곳에 있어도 외출한 줄 알고 구청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다 보면 이렇게까지 사람을 감시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서 '역시 K 방역이라는 소리를 듣는구나.' 하며 안심하게 되었다.


그랬는데 이번엔 정말 미국에서 코로나에 걸렸다.


걸리리라는 예상은 했었다. 어쩌면 속으로 내심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인 5명 중의 한 명은 오미크론에 걸린다는 통계도 있고 증세가 일반 감기보다 약하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서인지 이왕 걸릴 거면 가장 약한 바이러스에 걸리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얄팍하고도 절묘한 생각을 했더랬다.


내 직업 특성상 작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자칫하면 서로 옮기기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어떠한 규칙이 있으면 남들에게 피해가 가지않게 절재하는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실내에서는 누구나 마스크를 쓰고 사람이 많은 레스토랑엔 가지도 않고 서로에게 규칙을 지키라 무언의 싸인을 주고 받는다. 그래서인지 거의 90% 한국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 별걱정이 없었다.


그랬는데,


어느 날 어떤 처음보는 미국 남자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샾으로 들어왔다. 거의 ‘금남의 집’ 수준의 뷰틱 샾에 웬 남정네가 그것도 미국 성조기가 그려진 작은 천 조각 마스크를 쓴 사내가 들어오니 살짝 당황스러워 순간적으로 거리를 두며 인사를 했다. 그는 다짜고짜 나에게 다가와서 '화재가 났을 때 사용하는 소화기가 어디 있냐?'며 내 혼을 쏙 빼놓았을 그 순간에 난 느꼈다. 코로나에 노출이 될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다음날 아침 목이 살짝 따끔했다. 곧바로 코로나 자가테스트를 했다. 음성이었다. 다행이었지만 목이 따끔한 감기 기운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 의심스러웠다. 다음날 남편이 멀리서 오는 날이라 온 식구가 코로나 검사를 했다. 아뿔싸! 나만 코로나 양성 반응이 나왔다. 가족들과 이미 식사도 했는데 나만 양성이 나왔다는 사실에 조금 당황했다. 어제 만났던 사람들에게 나의 사실을 말하고 자가테스트를 권했다. 다행히 나로 인해 전염된 사람은 없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지하로 들어갔다.


따끔했던 목은 괜찮았지만, 꼭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코가 맹맹했다. 콧물이 나는 것도 아니고 기침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코만 막힌듯한 느낌이었다. 코로나 치료 약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특별한 증상이 없으니 굳이 찾아서 먹을 필요도 없고 그저 타이레놀 두 알씩 하루에 세 번 식사 후에 복용했다. 의사를 만난 것도 아니고 내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사실을 아는 정부 요인이 없으니 한마디로 미국 질병 통계에 숫자가 올라가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도 나 같은 무증상이면서 셀프 격리자를 모두 통계에 넣으면 확진자 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만약 무증상이라면 나는 어떻게 대처할까? 아프지 않으니 그냥 아무 일 없듯이 마스크만 쓰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 같은 무증상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른 건강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각자의 도덕성에 맡길 수밖에 그 누구도 터치할 수 없는 문제다.


막상 코로나 양성 반응이라는 테스트 결과를 받으니 곧바로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남편과 아들은 음성으로 나왔으니 나로 인해서 전염이 되지 않게 하는 게 최우선였다. 마스크를 쓰고 필수품인 세면도구와 컴퓨터만 챙겨 지하로 내려갔다. 그래도 미국 집의 주택은 지하와 1, 2층 구조로 되어 있어서 자가격리를 하기엔 안성맞춤이다.


그날부터 10일 동안 난 아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일단 공부를 해야 하는 고등학생이 아프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나 자신은 무증상이지만 어린아이는 심한 증상으로 아플 수 있으니 절대적으로 완벽한 자가격리가 필요했다. 바이러스가 잔뜩 묻은 좀비가 되었으니 음식을 할 수도 없고 빨래를 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손을 댈 수가 없고 가족들은 그저 나를 바이러스 덩어리로 취급했다. 가져다 주는 밥을 먹고 전화로 근황을 이야기했다. 같은 집이지만 다른 층에 사는 사람처럼 대했다.


앉아서 받아만 먹으려니 처음엔 남편한테 미안했다. 하지만..


점점 질이 좋아지는 음식을 받다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오! 남편도 할 수 있군~~ 가장 힘든날에는 역시 남편밖에 없다는 사실 ㅎㅎ


고등학생이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도시락도 싸 주어야 하는데 혼자 도시락을 싸는 모습을 그것도 아주 멀리서 지켜봐야만 했고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일도 하지 못하니 아들은 영하 날씨에 버스를 타기 위해 더 일찍 일어나 추운 거리를 걸어가야 했다.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엄마의 마음이 너무 아팠다. 코로나로는 무증상이라 별 아픔이 없는데 바이러스가 옮겨질까 봐 아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이 아팠다. 망할 놈의 바이러스 같으니라고!!


자, 밥도 안 하고 집안일도 안 하고 아니, 못하고 일도 못 하는 신세가 된 지 2,3일이 지나자 슬슬 너무도 당연한 공식적인 격리를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식적인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 비행기를 타고 있는 시간, 내 업무 시간 같은 것인데 시간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빼면 누구도 터치할 수 없다는 일종의 면죄부 같은 시간이라 가끔은 좋을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 공식적인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이런 황금기를 언제 다시 맞을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을 탁 뒤집어보니 부정적인 마음에서 한없이 좋은 긍정적인 생각만 떠올랐다. 공부만 했던 학생 시절과 결혼을 하고부턴 가족만을 위한 시간이 50년이 넘었다. 휴가를 간다 해도 가족이 항상 함께였고 주말에 쉰다 해도 기본적인 집안일은 해야 하고 혼자서 한국을 간다 해도 일과 가족의 만남은 지속해야 하고 생각해보니 오롯이 나만의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 나만의 시간을 오롯이 즐겨보자.


이상하게 글은 한 줄도 써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약만 먹고 하는 일이 없다 보니 약간 혼미한 무의식 상태와 자의식 상태가 섞이면서 한곳에 집중을 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무증상이라고 하지만 타이레놀을 시간에 맞춰 먹고 있어서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약간의 공포가 있었다. 나는 폐 질환이 있었던 기저 질환자라 폐에 치명적인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용에 아주 편한 건강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살짝 긴장 상태였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아프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라 생각하고 한 줄의 글로 집중할 수는 없었지만, 나에게는 넷플랙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타이레놀과 인터넷만이 나와 대면중이다


영화도 드라마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상한 사람 중의 한 명인데 깜깜한 어둠에서 소리만이 나를 집중케 하는 공포가 싫었던 탓이다. 지금은 환하고 툭 트인 공간에서 조그만 화면으로 미국 드라마를 정주행하기로 했다. '스위트 메그놀리아'라는 미국 시골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려서 좋았고 '넥스트 인 패션'은 패션으로 승부를 내는 우리나라의 '미스 트롯' 같은 개념의 스토리다. 전 세계 사람들로 구성되었는데 결국 우리나라 '김민주'라는 여자가 승리를 해서 더욱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거의 20편씩 되는 걸 보고 나니 눈도 피로하고 정신은 더욱 혼미해졌다. 역시 과도한 티브이 시청은 몰입도의 한계를 넘어 극심한 피로감을 주었다. 그렇다고 책을 보는 것도 아니었다. 책도 집중이 되지 않았고 티브이를 시청한 후로는 허탈하고 허무한 상태로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우울감에 빠졌다. 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매일 쳇바퀴 도는 생활에 이골이 났다고 골을 내고, 몸이 힘들다 말을 하고, 왜 이렇게 바쁘게 사는지 투덜대고 했던 모든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러면서 거의 일주일이 흘렀다. 일주일 동안 공식적인 격리를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자 마음을 먹었지만 내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컴퓨터로 넷플랙스를 본 게 전부였다. 일주일 후에 코로나 검사를 하니 다행히 음성으로 나오긴 했지만, 가족들과 대놓고 만나지는 못하고 마스크를 끼고 잠깐잠깐 얼굴을 마주치는 정도로 행동했다. 왜냐하면, 음성이 나오더라도 자가테스트라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바이러스가 아직 남아있을 수도 있다.


결국, 여러차례의 검사로 음성이 나오면서 10일 만에 아침에 아이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데려다주게 되었다. 계속적으로 마스크를 낀 채 말이다. 그러면서 샾에 나가 손님과도 인사를 하는데도 나도 손님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두 '무증상인데 어찌 코로나인지 알았느냐?'가 관심사였다. 남편이 다른 주에서 오기 때문에 올 때마다 우리 집은 자가테스트를 해왔던 차라 알게 되었다는 말에 정말 다행이다고 덕담을 주었다.


열흘 만에 세상에 나갔다.


말이 열흘이지 참 힘든 시간이었다. 한국에서 두 번의 격리는 아프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지만 낯선 도시에서 느끼는 수다 삼매경이라는 맛난 양념이 있었기에 힘들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바이러스가 침투한 조금은 혼미한 상태에서 그것도 혼자서만 지하에 갇힌 생활을 하다 보니 불안하고 불편한 좀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아무 일 없이 하루 24시간을 산다는 건 자아 성찰의 도를 넘어 지나치게 우울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자발적인 주체적 삶과 강제성을 띤 제한적인 삶은 하늘과 땅 차이임을 느꼈다.


요즘 한국의 상황은 심각하다고 들었다.


하루에 5만 명 이상 신규 확진자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고 이대로 가다가는 더블링 효과로 17만 명까지 확대될 수도 있다는 암울한 숫자를 내놓았다. 각종 규제가 수시로 변하는 상황이라 격리하는 기간 또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환자가 늘어나는 숫자를 한국 정부가 따라가기 바쁘고 거기에 따른 부정적인 시각도 배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미국의 정부는 그냥 이렇게 하라는 지침만 내놓을 뿐 한국처럼 확진자의 동선을 추적하는 실력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세세하게 국민을 관리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그나마 일사분란하게 행동하는 미국인을 이민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보았다. 그만큼 미국은 한국처럼 정부의 기능이 실생활에 보이지 않았다. 한국의 의료체계는 세계 어느 나라도 따라갈 수 없고 미국이 그러한 한국의 시스템을 부러워만 할 뿐 엄두도 내지 못한다. 처음부터 역학조사나 전수조사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후진국을 면치 못했고 지금도 마스크 규제에 대한 호불호를 다투고 있다.


한국도 이제는 확진자의 격리 기간이 증상과 백신 접종 유무와 상관없이 검체 체취일로부터 7일로 조정되었다. 미국은 5일 격리에 검사 결과에 상관없이 개인적인 판단에 의해 직장 복귀도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이는 일하는 노동자가 없어서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점을 고려한 위험한 조치이긴 하지만 실제로 피부로 느끼는 경제를 보면 정부도 더 이상 손을 들 수밖에 없는 한계에 봉착했다고 봐야 한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코로나 양성 반응이 나온다해도 마스크만 쓰고 일해도 된다는 '위드 코로나'의 중대한 시점이 된 것이다.


3년째 접어든 코로나라는 자연적인 재앙을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도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


감기나 에이즈나 그리고 대머리 치료제를 아직도 개발하지 못한 것처럼 이제는 코로나와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인지한 시점에서 이제는 마스크 쓰기와 백신 접종이 강제가 아닌 꼭 필요한 사람만 실행해야 한다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독감 주사가 강제가 아니듯 말이다.


그래도 이미 코로나에 걸린 한 사람으로서 내 몸에 이미 코로나 항체가 생긴 걸 축하하고 싶다. 일하며 자유롭게 행동하는 즐거움을 이제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다. 우리 모두 건강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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