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에는 유치원이라는 곳이 없었고 그 누구도 초등학교 이전에 다른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모르는데 부러움이 있을 수 없고 모르는데 미리 알려고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음이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기껏 동네 어귀 뚝방길을 따라 동네 친구나 동네 코흘리개 동생 손을 잡고 이리저리 활개 치며 돌아다닌 기억이 난다.
뚝방 모래길 옆으로 노랗고 붉은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그중에서 하얗고 동그란 토끼풀은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으로 훌륭한 놀잇감이었다. 작은 국화꽃 모양을 한 토끼풀은 먼저 가느다란 줄기를 길게 꺾어야 한다. 하얀 국화꽃 머리 바로 아래 여린 줄기를 엄지손톱으로 조그맣게 금을 그어 반으로 가른 다음 또 다른 토끼풀 줄기 끝을 그 안으로 밀어 넣어 주욱~ 잡아당긴다. 그러면 토끼풀끼리 머리가 맞물린다. 붙은 토끼풀 머리 양 갈래로 난 줄기를 작은 손가락에 줄기 양 끝을 야무지게 묶고 남은 줄기를 이로 잘근 씹어 끊어내면 포동한 토끼풀 반지가 되고 팔목에 대면 하얗게 통통한 팔찌가 되었다.
팔찌처럼 토끼풀 머리를 연속으로 줄기 배를 갈라 머리를 그 안으로 디밀고 또 디미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주렁주렁 목에 걸 수 있는 목걸이가 되고 인내를 발휘해 여러 개를 합하면 아담한 꽃다발이 만들어지기도 해서 토끼풀의 변신은 무한적이었다. 그런 뚝방길을 짧은 다리로 뛰다 걷다 꽃반지 낀 동생의 손을 옆집 어른에게 인계하면 잘 데리고 놀았다며 간식거리로 요구르트나 눈깔(?) 사탕을 손에 쥐워 주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그리 행복할 수 없었다. 그런 시절의 뚝방길이 유치원을 대신해 주는 고마운 배움의 장소였다.
일반 주택 구조상 뾰족한 지붕과 천장 사이에 삼각형 모양의 빈 공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시절에도 그런 숨겨진 공간을 머리 좋은 한국 사람들이 그냥 비워 놓을 리 만무하다. 기준선도 모호한 벽은 쓰다 남은 꽃무늬 벽지를 발라 여기저기 구멍 투성이었고 삐걱대는 오래된 나무 바닥에는 흐트러진 낡은 전선줄이 얽혀 있었다. 아무렇게나 노출된 공간이 위험하기도 했을 터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이런 낡고 오래된 공간이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나마 촉이 낮은 어두운 전등이 대롱대롱 달려있어 오래된 그림책을 친구들과 읽을 수 있었고 엄마에게 혼이 나면 살짝 숨어 훌쩍이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고 아빠가 숨겨놓은 말린 문어를 질경이며 친구와 비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도 어렴풋이 난다. 명절에 들어온 온갖 선물 꾸러미며 아이들에게 손타지 않을 귀한 것들을 보관해 놓은 엄마는 고양이 앞에 생선을 맡겨 놓은 격이라는 걸 절대 몰랐었으리라.. 몰래 훔쳐 먹는 약과며 곶감을 빼먹는 맛이 얼마나 기막혔는지 아마 그런 맛을 아는 이는 절대 그 맛을 못 잊으리라. ㅎㅎ
만 5살에 가야 하는 유치원에는 못 가봤지만 50년이 흐른 지금의 나는 어느새 어른 유치원인 시니어 센터에 등록할 수 있고 시니어로써 나라에서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시니어라는 말은 보통 학교에서 제일 높은 학년을 시니어라고 하고 사회에선 나이가 많은 연장자나 노인을 말한다. 미국에서 55+라는 사인이 붙어있는 장소에선 무엇이든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인데 크게는 집을 살 때도 시니어 하우스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도 있거니와 공공기관에서도 시니어에게 주는 혜택 또한 상당히 많고 작게는 나이가 많아 할인된 커피를 마실 수도 있다는 뜻이다.
주마다 그 주법이 달라 시니어로 혜택을 받는 기준은 모두 다르다. 보통 시니어는 60세부터라고 알고 있는데 여기처럼 55+라는 싸인이 붙은 장소가 생각보다 많다. 맥도널드에서는 55세 이상 고객에게 커피와 음료를 할인가로 판매를 하고 버거킹에서는 10% 할인 혜택을 준다. 주택융자도 55세부터 정부가 제공하는 보조 프로그램이 따로 있고 처방약 또한 최대 20% 할인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카운티마다 55+ 센터가 따로 있고 이곳에선 무료로 운동이나 취미 클래스를 운영하며 커뮤니티 활성에 큰 몫을 하고 있다. 한국도 나이만 다르게 적용되겠지만 기차나 항공권 또한 할인 혜택이 주어진다.
시대가 변하여 예전의 55세가 지금은 0.8을 곱해야 상식선의 지금의 나이롤 볼 수 있다고 한다. 즉 55*0.8은 44세다. 어느 정도 수긍하는 말이다. 시어머니를 지금의 내 나이에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내가 보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의 나에 비하면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던 게 사실이니까.. 그래서 몇십 년 전의 55세가 시니어였다면 지금은 당연히 65세쯤이 시니어라고 해야 맞는 말인듯싶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55세는 시니어의 대열에 들어가기엔 정말이지 너무도 젊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벌써 할인된 커피를 마셔야 하는지 말이다.
마음은 아직 청춘이라는 말이 무의식에도 흘러나오고 거울을 봐도 도무지 내 나이가 아직은 시니어로 대접받는 나이는 아닐지언데 왜 이런 주름진 시니어라는 이름으로 굴레를 씌우는 것인지 분통할 일이다. 그렇다. 뭐든지 공짜는 좋다고 하지만 나이가 많아 받는 공짜는 절대 사절이라고 손사래 치고 싶고 젊은 순서로 공짜를 준다면 줄을 서서라도 뭐든 받고 싶은 마음이 든다. 왜 하필이면 5라는 숫자가 두 번이 들어가고서야 두 번째 유치원에 가야 한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6살에 유치원에 갔더라면 66세에 시니어가 되었을까?
돌고 도는 게 인생사라고 하는데 믿기지는 않지만 5살에서 단지 50번의 겨울을 거쳤을 뿐이데 벌써 주름진 시니어 그룹에 들어서 있다. 인생무상함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돌아보면 동네에서 제일 좋다는 사립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새벽바람부터 줄 서 번호표를 받아야 했고 그런 유치원에 가기 싫다며 몇 날 며칠을 울었던 아이들이었는데 이젠 그들 세대에게 보호를 받아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니.. 이제부터 내가 제일 싫어하는 숫자는 55가 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