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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Feb 03. 2023

고맙다, 한국 냉장고

미국에서 생활한 지 꼭 20년이 되었건만, 가전제품을 직접 내 손으로 내 마음에 맞는 걸 사 본 기억이 없다면 아마 믿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선 이사할 때 모든 가구와 함께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을 가지고 이전을 하는데 이견이 없지만, 미국은 가전제품이 하나의 붙박이 개념으로 이삿짐에 포함되지 않는다. 아파트라는 개념 또한 사고팔 수 있는 개인 소유가 아닌 커다란 회사 소유로 한 공간을 빌리는 렌트 즉 오피스텔 개념이라고 보면 맞을듯하다. 집만 렌트가 아니라 집 안에 있는 모든 가전제품 또한 렌트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냉장고, 세탁기, 드라이기 또는 전자레인지나 스토브 또한 붙박이로 되어있어서 있는 그대로 사용해야 된다. 하지만 소파나 테이블, 침대 같은 일종의 가구는 직접 구매해야 한다.      


아파트뿐만 아니라 일반 주택을 사서 이사를 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주방의 가전제품은 집을 구매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치기에 리모델링할 때 어떤 제품으로 구매하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미국에서도 삼성이나 엘지 등 한국 제품이 가장 좋다는 인식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주방 기기에 한국제품이 들어가 있다면 일단 엄지를 올린다. 다만 아직 티브이는 붙박이 개념이 아니어서 이사 때 굳이 가지고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데 그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내 손으로 직접 구매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이번에 냉장고가 고장 나면서 인식하게 되었다. 미국의 가전제품은 애프터서비스라는 개념이 잘 통하지 않는 나라다. 꼭 필요하면 처음 구매할 때 많은 돈을 들여 워린티를 미리 사는 걸 권고하는데 굳이 사지 않는 이유는 한국처럼 빠른 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렵고 된다 해도 제품의 파트가 오래되면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그렇지 않아도 비싼 제품을 구매하는데 따로 워런티를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큰돈을 들여 산다 해도 고장이 나면 울며 겨자 먹기로 그냥 폐기하는 게 오히려 쉬운 일이라 생각된다. 설마 하겠지만 실제로 고쳐 쓰는 게 버리는 것보다 어려운 곳이 바로 미국이고 새로 구매할 때 헌것을 가져가는 비용을 지불하는 시스템에 익숙해져야 한다.


몇 년 전에 65인치 삼성 티브이가 고장이 난 적이 있다.


일단 여러 경로를 통해 어렵게 서비스 센터에 연락을 했다. 집에 온 기술자는 한참을 이리보고, 저리 보더니 여기에선 도저히 고칠 수가 없다며 손수 센터에 가져가서 고쳐오겠단다. '이렇게 큰 걸 가지고 가서 고치시겠다'. 그래도 일단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가상해서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했다. 텅 빈 벽을 몇 날 며칠을 보며 있다가 없는 자리가 왜 그리 큰지.. 하지만 미국에서 삼성 티브이를 고쳐줄 수 있다는 마음에 조금은 설레었다.     


하지만 역시나 일단 중요한 부속품을 바꾸는데 $800(한화 백만 원쯤)이 든다고 했고 우리는 또 오케이를 했다. 왜냐하면, 몇 년 쓰지 않은 제품이었고 부속을 바꾸면 다시 쓸 수 있다 하니 새로 사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지인들은 말렸다. '괜히 돈 허비하는 거'라고... 역시나 한 달 뒤 똑같은 고장이 났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더 큰 티브이를 사면서 기존 것을 그대로 버리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그 기억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번에 덜컥 고장 난 냉장고를 서비스받는다는 게 겁이 났다. 더군다나 삼성도 아니고 세계적인(?) 월풀이지 않은가? 너무 억울한 건 사용한 지 4년이 채 되지 않았고 세컨드로 쓰는 냉장고라 거의 새것이라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속상한 마음은 들지만 어떡하랴. 그새 냉장고의 운명이 다했음을.. 그래도 나름 전기회사에 다니시는 분에게 웃돈을 주며 고쳐지기를 고대했지만, '부속도 바꾸었는데 이상하게 작동이 되지 않는다’ 라는 말만 돌아올 뿐 역시 냉장고 고치는 기술은 아직 미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종목인가 보다. 한국은 애프터서비스가 세계 제일일 텐데 말이다.     


할 수 없이 새로운 냉장고 쇼핑을 시작했다.


오 마이갓! 21세기에 사는 게 맞다 싶을 만큼 냉장고의 변신은 대단했다. 일단 양문에서 세 개, 네 개의 문이 달려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그동안 눈을 감고 살았나? 냉장고의 개념 자체가 바뀌어 있었다. 그저 냉장고라면 냉장과 냉동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밖에 몰랐다면 지금은 위로는 냉장고로 아래는 냉동으로 반전이 되었고 (아, 내가 처음 어릴 때 접했던 냉장고는 위가 냉동 아래가 냉장이었다) 냉장고 문이 프렌치 도어로 양손으로 열면 냉장식품이 한눈에 펼쳐지는 그 뷰가 너무도 황홀했다.      


가운에 서랍은 또 다른 온도의 냉장 혹은 냉동으로 사용할 수 있고 아래 냉동실 문도 양쪽으로 각각 내가 원하는 온도로 맞추어 사용할 수 있는 개인별 냉동실이다. 그래서 한쪽은 그야말로 딤채처럼 김치만 보관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럴 수가! 내가 미국에 살면서 제일 잘한 일 중의 하나가 딤채를 구매해서 사용한 일인데 이제는 냉장고에 딤채 기능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또 하나 놀라운 일은 이제는 정수기가 필요 없다는 일이다.


미국인들은 정수된 물을 잘 먹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수돗물을 그대로 마시고 집에서는 엄마들이 수돗물로 모든 음식을 한다. 유독 한국인들이 정수기가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한집에 한대는 기본으로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는 냉장고에 정수기가 부착되어 있고 그것도 항시 그득하게 물통에 정수된 물이 채워져 있어서 실은 정수기보다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미 집에 있는 정수기와 딤채는 어쩌랴??ㅎㅎ


하지만 여기에서 놀람이 멈추지 않는다. 더 놀라는 일은 냉장고 문의 색을 내가 직접 고를 수 있는데 이는 개인의 취향을 기술력이 뒷받침되어 브랜드 가치를 높였다고 생각한다. 가전하면 GE이고 GE하면 흰색 그래서 오죽하면 백색가전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인종이 다르듯 가전에도 ‘색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안다. 한국에서는 이미 너무 오래전부터 쓰고 있던 일이라 이리 놀라는 것이 오히려 너무도 시대에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한국의 놀라운 기술력엔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20여 년 전에도 빌트인 냉장고가 있긴 있었지만, 물론 한국산이 아닌 수입품이었기에 개인이 설치하기에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재벌이 아니면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이제는 자랑스러운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으로 50여 가지 색상을 장착하고 거기에 반짝이는 것과 매트한 재질로 선택의 폭이 더욱 넓어졌고 냉장고 문 4 가지색 모두를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결정장애가 있는 사람은 오히려 선택사항이 너무 많아 즐거운 비명을 지를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반전이 있다.


도어에 태블릿이 장착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난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는 하다 하다 냉장고에 컴퓨터를 통째로 넣는다고?? 그렇다 치더라도 그저 시계나 메모 정도를 예상했다면 그것 또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약 20인치 스크린에서 음악은 물론 일반 티브이에 유튜브까지 볼 수 있으니 게임 끝이다. 내 폰과 연동이 되어서 차 안에서 듣고 있던 음악이 집에 오자마자 이어서 울려 퍼지는 이러한 기능은 감동 그 이상이다. 냉장고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다른 기능도 많다. 예를 들어 마트에 갔는데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을 때 폰을 열면 그 즉시 냉장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들여다보니 가운에 도어에 카메라가 3개가 장착되어 있었다. 마치 몰래카메라 같다) 물론 뒷면까지는 보이지 않지만 급한 대로 살펴보면 될 것이다.      


스크린에 멋진 그림을 띄우고 커다란 사이즈로 시간을 맞추어 놓으니 노안으로 불편한 시간 보기가 해결되었고 한 번의 클릭으로 가족사진이 슬라이드로 돌아가니 조용하기만 했던 깜깜한 주방이 불을 밝히지 않아도 스스로 빛을 발하며 반짝이는 살아 숨 쉬는 따뜻하고 푸근한 활력 넘치는 공간이 되었다.


멀리 있다가도 일부러 다가가 슬쩍 손으로 터치하면 빙그레 웃어 주는
그런 친구가 생긴듯하다.      


시대가 너무 급발전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해 때로는 ‘이렇게까지 발전만 하다가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소멸되는 건 아닐까?’라는 근심이 간혹 생기기도 하고 ‘이러다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되면 어떡하나?’라는 불안감도 생기는데 냉장고의 변천은 주방에 항시 서성이는 우리 주부에게는 너무도 반가운 일이지 싶다. 젊은 층도 물론이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외로워지고 기억도 가물가물해지는 노령층을 위한 더 새로운 기술의 발전이라면 반길만한 일이라 생각된다.      


빠르게 변화하고 빠르게 받아들이는 한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이런 변화가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국의 이런 엄청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미국 메릴랜드라는 주의 시골에 사는 아줌마에게도 벅찬 자랑스러운 일이었음에 박수를 보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삶은 배추에 들기름과 멸치를 한소끔 넣고 끓이는 레시피가 필요 없는 ‘배추 된장 무침을 해야겠다. 거기에 어렵게 구한 보리 굴비를 살짝 찌고 오래된 놋쇠 냄비를 달구어 누룽지를 만들고 차게 식힌 누룽지에 보리굴비 한점 얹어 먹어야지. 어쿠스틱 인디음악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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