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허해서인지 요즘 법륜스님의 말씀을 필두로 마음에 관한 이야기들을 섭렵하고 있는 중이다. 그 말씀 중에 내 마음에 딱 고정되어 생각에 꼬리를 물고 다니는 화두 하나가 남겨졌다.
중년의 나이가 되면서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관계에 대한 정의가 흔들리더니 팬데믹이라는 어마어마한 파도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엉뚱하게도 인간관계의 재정립에 새로운 정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 또한 피해 가기 어려운 과정이었다. 가까운 가족은 물론이고 믿었던 친구며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 금이 갔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홀로 사는 가치관이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고로 살아가야 하는지 모른 채 오로지 아이와 남편 그리고 가까운 주변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나를 잃어버리고 불행했냐 하면 그건 아니다. 결혼하면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 설렜고 아이를 세 명씩이나 낳아 열심히 건강하게 키웠고 지금까지 나름 행복이라는 기준에 부합된 삶을 살았다.
다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뒤로 미룬 채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뒤도 옆도 보지 않고 앞만 보며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목표가 있었기에 홀로서는 방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어찌보면 그때의 그 바쁨과 그때의 그 앞만 보고 달리던 열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지난 세월을 통틀어 부인할 수는 없지만, 나를 잊은 채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충분한 만족감을 가지고 그 긴 세월을 보내지 못한 것에 관한 미련이 남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아이를 키운다는 목적이 점차 희미해지고 빈 둥지를 지키는 어미 새가 되어가고 있는 지금, 이제는 혼자 사는 삶의 목적과 방향이 정해졌는가? 목적 같은 건 필요 없고 삶을 가벼이 여기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살 수 있다는 존재의 가벼움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왜 삶은 이렇게 무수한 관계 속에서 무거운 짐이나 숙제처럼 꼭 무언가를 정해놓고 이루어야 하는 걸까? 나이가 드니 관계의 어려움은 날로 심해지고 삶의 방향은커녕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게 지식이듯 삶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무지랭이가 되어가고 있는듯하다.
전에는 이 세상에 하나의 점으로 태어나 하나의 존재로 살아가며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 적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그 유명한 사람도 한 점 흙도 남기지 않고 바람처럼 사라지는데 하물며 내가 뭐라고 무언가를 남기기를 바라는가? 삶은 무겁게 그리고 죽음은 가볍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과연 옳은 말일까? 존재가 그리 가볍다면 들에 핀 들꽃처럼 그냥 쉬이 살아도 되지 않을까?
나는 혼자 있으면 불안하다. 혼자 있을 때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 결과물이 있어야 하고 무언가의 과정이 연속적으로 있어야 오늘 일을 다 한 것 같은 강박관념이 있다. 이는 어릴 때 반드시 피아노를 제시간에 맞추어 쳐야 부모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 있었던 일종의 상과 벌이 철저히 구분되었던 결과물 중심의 가정교육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때부터 무언가를 집중적으로 해야 하고 하지 않으면 무서운 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형성된듯하다. 그래서 나는 쉬운 삶이 아닌 무거운 삶 쪽으로 선택되어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혼자 있는 게 싫어서인지 난 바쁘다. 틈나면 글을 쓰고 뷰틱 샾을 운영하면서 패션 유투브를 찍고 직접 편집해서 업로드한다. 물론 다 컷지만 아이가 셋이고 남편이 있고 강아지가 두 마리다. 싱글하우스라 집안일도 많고 정원에 핀 꽃들에게 물을 주는 일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 틈틈이 피아노도 치고 짬짬이 그림도 그린다. 그러고도 모자라 아무 생각없이 책을 필사하는 것에 신경을 빼앗기길 바란다. 그래야 무엇이든 하고 있는 중이고 그래야 나 혼자있는 시간을 보낼수 있다. 어쩌면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없애버리려는 방패 꺼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지도 모르겠다.
혼자서 잘 살라는 뜻은 아니겠고 혼자서도 외롭지 않고 잘 살 수 있는 길을 인도해주는 말로 이해된다. 가족도 언젠가는 나를 떠날 것이고 나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나를 떠날 것인데 어쩌면 나 자신을 친구로만 삼을 수 있다면 혼자서도 외롭지 않게 산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나와, 나를 바라보는 내가 있다는 결론이 나야 즉, 나 자신이 나를 바라보는 내가 있다는 걸 확신해야만 나 자신과 친구로 삼을 수 있다. 사람은 늘 생각한다. 그 생각하는 자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자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생각하는 나를 보는 나는 누구인가? 그럼 두 자아가 공존한다는 말인가?
나는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을 모토 삼아 살고 있고 순간순간 알아차림을 실천해야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존재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되뇌며 살지 않았었나? 항상 깨어있어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한다고, 이 순간의 행복을 실천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건만 이 모든 말은 나를 내가 바라보고 있어야만 성립된다는 말이었다는 걸 왜 이제야 깨닫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글을 쓰는 지금의 나를 저만치 떨어져 있는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면 나와 나를 바라보는 내가 정말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는 간단한 말이나 단순한 생각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다. 화가 나는 나를 보며 자제해야 한다는 친구의 알아차림에 귀 기울어야 하고, 외로움에 발버둥 칠 때 홀로 있지 않고 친구와 함께한다는 알아차림에 슬퍼하지 않아야 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친구가 전하는 희망적인 마음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 내가 나의 친구가 되어줄게.
기꺼이 친구로서 항상 곁에 있어 줄게.
새소리가 들리면 같이 들어주고 하늘을 보면 함께 하늘을 올려봐 줄게.
몸이 지치고 힘들어도 옆에 있어줄 것이고 외로우면 말동무가 되어줄게.
슬픈 일이 생겨도 옆에 앉아 있을 것이고 무슨 일이든 무슨 생각을 하든 언제나 어디서나 옆에 있을게.
걱정하지 마.
넌 결코 혼자가 아니야.
진심으로 사랑한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