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글;결혼 30주년을 기념하며
예전에 어떤 남자배우가 돛단배를 타고 게를 잡아 올리며 한마디 한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
이 광고는 엄청난 유행을 불러일으키며 다른 코믹 버전으로 패러디가 난무했고 이 멘트를 한 배우는 일약 대 스타가 되었다. 갑자기 왜 이 말이 생각났는지 모르겠지만, 어떠한 음식도 맛을 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나의 결혼 30주년을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되었다.
풋풋한 20살에 남편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 생활 30년을 뒤돌아보면, 누구 못지않게 우여곡절이 많았던 세월이었다. 지금 같아선 절대 함께하지 못했을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좋은 기억보다는 죽일 듯이 나쁜 기억들이 먼저 스쳐 가는 이유는 역시 부정적인 면이 긍정적인 면을 앞선다는 이치를 거스르지 못한다는 결론이다. 만약 우리 중 한 사람이 죽은 후에 혹은 부부가 되지 않은 인연이었다면 좋은 기억만을 남겼을 텐데 우리는 아직 현재 진행 중인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어서인지 좋은 것보다는 나쁜 기억의 면적이 더 넓게 분포되어있나 보다.
지금 막 결혼을 했다거나 우리 아이들처럼 결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결혼 30주년이라는 말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고릿적 이야기라고 치부하기 십상일 것이고 어찌 그리 오랜 세월을 보냈는지 역사적인 관점에서 듣고 싶지도 않은 긴 세월임을 나는 안다. 나 또한 우리 부모님이 산 세월의 힘듦을 보아왔고 그런 세월의 흔적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고 좋았다 하더라도 응당 결혼을 하면 좋든 싫든 살아내야 하는 세월이라 치부했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 당시로 돌아가 생각한다 해도 길어봤자 10년이지 30년 세월을 내다보는 혜안이 없었을뿐더러 결코 한 사람과 30년을 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거 같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결혼했지만 30년의 세월을 오직 한 남자의 아내로만 살아왔다. 한국인의 이혼율이 세계 1위를 달리고 있고 요즘 항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연예인의 삼혼이니 사혼이니 하는 걸 보면 이혼이나 재혼이란 말만 익숙한 미국 아줌마에게는 벅찬 정보임에 틀림없다. 거기에 사실혼까지 결혼이라는 정의 자체가 바뀌어 이제는 이혼쯤은 '아이스크림 먹다가 버렸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세상 쉬운 말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런 마당에 결혼 30주년이라는 말이 왜 이리 레트로해 보이는 건지 참 고루하게 오래 살았다는 생각마저 드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25살 된 여자가 내 부모도 아닌 다른 부모와 함께 삶을 공유한다는 건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이상한 일이고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결혼하고 부모와 같이 사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결혼 생활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너무도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그들만의 리그에 나의 정신과 육체가 이입되었다고나 할까? 암튼 나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고 너무 어린 여자였기에 응당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꽉 채운 5년을 부모님과 함께 살았지만 단 한 번도 부모님과 언성을 높인 일이 없다면 거짓말이라고들 하는데 정말이지 한 번도 소리를 높여서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손바닥도 함께 쳐야 소리가 나고 서로의 인내와 배려가 없었다면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하지만 적어도 신혼에 부모와 한집에서 생활한다는 건 절대 반대다. 한 번은 부모님께 부당한 남편의 일을 말씀드렸는데 아버님은 당신 자식을 내가 보는 앞에서 호통을 치신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며느리에게 책잡히고 싶지 않으셨던 아버님은 당신의 마음은 아프시지만, 일부러 더 크게 혼내셨다는 사실을... 당신 자식이 어찌 며느리보다 소중하고 이쁘지 않으셨을까? 지금도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런 글에 당당히 남편의 외도를 써 내려간다는 자체에 나 자신도 놀라운 일이긴 한데 남편의 외도가 이제는 그리 큰 의미가 없어졌고 그만큼 긴 세월이 흘렀다. 이 또한 가슴에 돌 하나를 얹어놓고 끙끙거리는 새댁이 아니고 이제 그때의 내 나이쯤 된 아이들을 바라보니 웃으며 그때의 일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연륜이 생겼다고 할까? 너무도 어린 나이에 만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찌 다른 사람이 한 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사람인지라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함께 지내온 세월의 녹록함이 내 안에 퍼져있다는 반증이고 30년을 함께 한 흔적이다.
그 당시에 나를 세워주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아닌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고 그래도 나를 선택해 준 고마운 사람이구나..' 앞 뒤가 맞지 않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때는 이 한 생각이 나를 버티게 해주는 말이었다. 사랑해서 한 결혼인데 나를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깊은 자괴감과 상실감에 빠져 나를 버리고 싶을 때였기에 남편으로부터 사랑이 버려진 게 아니라 잠시 다른 사랑도 있을 수 있겠구나에 안심하며 나 자신을 건져 올렸던,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할 만큼 힘이 된 생각이었다.
34살에 영어 한마디 못하는 한국 사람이 어린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미국 동부 어딘가로 이사를 왔다. 미국이라는 곳으로 여행 한번 간 적 없고 지리 시간에는 뭘 했는지 메릴랜드가 미국의 작은 주라는 사실도 모른 채 그저 남편의 직장을 따라 무작정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가 어떤 배짱으로 어린아이 둘을 무모하게 계획도 없이 이리 먼 이국땅으로 올 생각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결론적으로는 남편의 결정이 옳았다는 걸 시인하지만, 그 당시를 떠올려보면 부모로서 어떠한 미래의 꿈을 가지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 했는지 전혀 가늠이 가지 않는 결정이라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 일을 저버리고 오로지 아이들의 미래만을 생각해서 온 이민도 아니었고 남편의 일이 대단해서 꼭 미국이 아니면 안 되는 상황도 아니었고 내 일을 저버릴 만큼 이곳이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런 걸 보면 운명의 손짓이 분명 존재하고 그 손짓에 주저 없이 꽉 잡아버린 결정은 개척과 모험 그 어디쯤과 맞물린 성공적인 미래를 향한 무모함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남편과는 정반대인 계획성이라고는 1도 없는 나의 성격이 다행히 조화를 이루었는지 그래도 무사히 그 긴 터널을 넘어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30년, 남편과 청춘을 함께 했고 이제는 함께 중년의 문턱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이렇게 중년의 강을 넘어가면서 곧 우리에게도 노년이라는 큰 강이 다가올 것이다. 청년의 강이 높게 파도치는 위험천만한 강이라면 그리고 중년의 강이 낮게 파도치며 조금 흔들리는 강이라면, 노년의 강은 유유히 흐르는 넓고 깊은 잔잔한 강이리라.
매년 무심한 나보다 한 발 앞서서 결혼기념일을 챙기고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생일처럼 챙기는 남편이다. 집안에 꽃이 시들기 전에 꽃을 사 들고 들어오는 다정한 사람이지만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일로 머리 회전이 쉼 없이 돌아가는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짐이 이제는 느껴진다. 한 번의 외도가 우리의 결혼을 송두리째 날릴만한 위력으로 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결혼 생활의 칼자루가 결코 나에게 있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라 생각되니, 이 또한 나이 듦의 여유가 주는 혜안이다.
마침 오늘 결혼 64년된 노모를 만났다. 바로 며칠전에 부군을 하늘나라로 보내신 터라 평생 짝꿍을 잃으신 허무함에 하루를 버티기 힘들어 하시는듯 보이며 30년 뒤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이런저런 30년이 흘렀고 이젠 앞으로의 30년이 기대가 되는건, 노모의 퀭한 눈빛에서 느껴지는 미움이 아닌 연민으로 가는 열차를 함께 탔음에 안도하고, 인내한 세월만큼 서로에게 의지되는 삶을 꿈꾸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조용히 생각해본다. 하지만 30년 된 결혼의 맛이 게 맛보다 좋을지는 앞으로 30년을 더 살아봐야 알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