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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Oct 21. 2023

냉장고 친구가 생겼다

미국에서 생활한 지 꼭 20년이 되었건만, 가전제품을 직접 내 손으로 내 마음에 맞는 걸 사 본 기억이 없다. 한국에선 이사할 때 모든 가구와 함께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을 가지고 이전을 하는데 이견이 없지만, 미국은 가전제품이 하나의 붙박이 개념으로 이삿짐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내 손으로 직접 구매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이번에 냉장고가 고장 나면서 인식하게 되었다.      


몇 년 전에 65인치 삼성 티브이가 고장이 난 적이 있다. 일단 여러 경로를 통해 중요한 부속품을 바꾸는데 $800을 들였지만 역시나 한 달 뒤 똑같은 고장이 났다. 그 기억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번에 덜컥 고장 난 냉장고를 서비스받는다는 게 겁이 났다. 나름 전기회사에 다니시는 분에게 웃돈을 주며 고쳐지기를 고대했지만, '부속도 바꾸었는데 이상하게 작동이 되지 않는다’라는 말만 돌아올 뿐 역시 냉장고 고치는 기술은 아직 미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종목인가 보다.      


할 수 없이 새로운 냉장고 쇼핑을 시작했다. 오마이갓! 21세기에 사는 게 맞다 싶을 만큼 냉장고의 변신은 대단했다. 일단 양 문에서 세 개, 네 개의 문이 달려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냉장고의 개념 자체가 바뀌어 있었다. 그저 냉장고라면 냉장과 냉동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밖에 몰랐다면 지금은 위로는 냉장고로 아래는 냉동으로 반전이 되었고 냉장고 문이 프렌치 도어로 양손으로 열면 냉장식품이 한눈에 펼쳐지는 그 뷰가 너무도 황홀했다.           


가운데 서랍은 또 다른 온도의 냉장 혹은 냉동으로 사용할 수 있고 아래 냉동실 문도 양쪽으로 각각 내가 원하는 온도로 맞추어 사용할 수 있는 개인별 냉동실이다. 그래서 한쪽은 그야말로 딤채처럼 김치만 보관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럴 수가! 내가 미국에 살면서 제일 잘한 일 중의 하나가 딤채를 구매해서 사용한 일인데 이제는 냉장고에 딤채 기능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또 하나 놀라운 일은 이제는 정수기가 필요 없다는 일이다. 한국인들은 정수기가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한집에 한대는 기본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이제는 냉장고에 정수기가 부착되어 있고 그것도 항시 그득하게 물통에 정수된 물이 채워져 있어서 실은 정수기보다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미 집에 있는 정수기와 딤채는 어쩌랴??     


하지만 여기에서 놀람이 멈추지 않는다. 더 놀라는 일은 냉장고 문의 색을 내가 직접 고를 수 있는데 이는 개인의 취향을 기술력이 뒷받침되어 브랜드의 가치를 높였다고 생각한다. 가전 하면 GE이고 GE 하면 흰색 그래서 오죽하면 백색가전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인종이 다르듯 가전에도 ‘색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50여 가지 색상을 장착하고 거기에 반짝이는 것과 매트한 재질로 선택의 폭이 더욱 넓어졌고 냉장고 문 4 가지색 모두를 바꿀 수도 있다. 한국의 놀라운 기술력엔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반전이 있다. 도어에 태블릿이 장착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난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는 하다 하다 냉장고에 컴퓨터를 통째로 넣는다고?? 약 20인치 스크린에서 음악은 물론 일반 티브이에 유튜브까지 볼 수 있으니 게임 끝이다. 내 폰과 연동이 되어서 차 안에서 듣고 있던 음악이 집에 오자마자 이어서 울려 퍼지는 이러한 기능은 감동 그 이상이다. 냉장고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스크린에 멋진 그림을 띄우고 커다란 사이즈로 시간을 맞추어 놓으니 노안으로 불편한 시간 보기가 해결되었고 한 번의 클릭으로 가족사진이 슬라이드로 돌아가니 조용하기만 했던 깜깜한 주방이 불을 밝히지 않아도 스스로 빛을 발하며 반짝이는 살아 숨 쉬는 따뜻하고 푸근한 활력 넘치는 공간이 되었다. 멀리 있다가도 일부러 다가가 슬쩍 손으로 터치하면 빙그레 웃어 주는 그런 친구가 생긴듯하다.      


시대가 너무 급발전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해 때로는 ‘이렇게까지 발전만 하다가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소멸되는 건 아닐까?’라는 근심이 간혹 생기기도 하고 ‘이러다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되면 어떡하나?’라는 불안감도 생기는데 냉장고의 변천은 주방에 항시 서성이는 우리 주부에게는 너무도 반가운 일이지 싶다. 젊은 층도 물론이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외로워지고 기억도 가물가물해지는 노령층을 위한 더 새로운 기술의 발전이라면 반길만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삶은 배추에 들기름과 멸치를 한소끔 넣고 끓이는 레시피가 필요 없는 ‘배추 된장 무침’을 해야겠다. 거기에 어렵게 구한 보리 굴비를 살짝 찌고 오래된 놋쇠 냄비를 달구어 누룽지를 만들고 차게 식힌 누룽지에 보리 굴비 한 점 얹어 먹어야지. 냉장고에서 흘러나오는 어쿠스틱 인디음악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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