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마철에 여행을 떠났다. 다른 해에 비해 이번 해는 불볕더위로 심각하게 더울 거라는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장마가 길어지고 하늘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서울과 경기도권 그러니까 중부 쪽에 물 폭탄이 떨어졌다. 더위와는 상관없는 홍수로 나라 전체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코로나로 외국 여행이 거의 금지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나마 국내 여행이 대세가 되어 모든 호텔이나 이름난 여행지의 숙소가 마감되어 어쩔 수 없이 유명하지 않은 곳, 그러니까 전라도, 그것도 한옥집 숙소가 만만했다. 한옥집이니 호텔처럼 럭셔리를 동반한 편안함은 포기해야 할 것이고 유명한 곳이 아니니 시설이나 교통은 거의 생각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마음을 단단히 잡고 떠났다.
산과 계곡의 잔잔함과 나지막하게 늘어선 조그마한 나무들이 허하게 쭉쭉 하늘로 뻗어만 있는 미국 나무들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한국의 정겨운 낮음이 이렇게 아늑하고 편안한 자연이 될 줄이야. 미국 사람처럼 키 큰 나무만 보다 낮고 자그마하고 수줍게 피어있는 나무들이 편안함을 주는 한국의 따뜻한 맛이고 멋이었다.
나즈막한 계곡도 지나고 한길로만 마감된 좁은 길도 지나고, 둑처럼 계곡을 막아 산책로를 낸듯한 작은 마을도 지나며 완주 한옥마을에 도착했다. 먼저 100년이 되어 벼락을 맞아 누워버린 나무가 멋스럽게 우리를 맞이했다. 가만 보니 뻥 뚫린 나무 구멍 사이에 넝쿨을 심어 그 안에서 인위적으로 나뭇잎이 나오는 모양새를 연출했다. 죽은 나무에서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즐거운 눈요깃감이고 번득이는 아이디어였다.
그 옆으로 기역자 한옥이 한 채 앉아있는 모습이 내 어릴 적 추억의 집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 옛날 나의 아버지는 기역자 일본 집을 손수 지으셨고 황토흙으로 벽을 바르고 길게 마루를 방마다 연결되게 지으셨다. 일본식이라 마루 끝에 유리문을 닫아 대청마루 느낌은 없었지만 길게 뻗어있는 마루는 지금의 한옥과 닮았다.
그런 추억으로 잠시 빠져들 때쯤, 대문을 통해 보이는 폭포가 어이없을 만큼 멋진 모습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한옥의 마루에서 대문의 휘어진 바닥이 붕 떠 있는 사각 형태에서 문을 열어놓은 대문 밖의 폭포수는 음... 이태백의 무릉도원이 부럽지 않아 시 한 수를 읊어야만 하는 그런 풍경이요, 장녹수가 시 한 수를 구슬프게 읊어야만 될 거 같은 한오백년의 역사가 훅 뒤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내가 장녹수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옛시인이 되어 시 한 자락 내어 놓아야 될 듯한 느낌이 그저 아쉬웠다.
길을 나서는데 검은 구름이 살짝 맑은 하늘을 가리는듯했다. 여지없이 빗방울이 한두 방울 차 창문을 두드렸다. 비가 내리고, 쏟아지고 비상등을 켰다. 비상등에 차 양 쪽 등이 연속적으로 깜박이고 점점 세찬 빗줄기가 강하게 내리더니 앞뒤 구분 없이 정신없이 내리쳤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면 여지없이 비가 내리는 건 자연의 이치이지만, 인생의 먹구름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인생을 걸어갈 때 먹구름이 오면 예측하고 비를 피하고 기다리고 그리고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측 가능했던 검은 구름이 순간적으론 무섭지만, 인생에 비해 얼마나 정직한지 고맙기까지 했다.
맑은 하늘에 기분이 좋다가도 검은 구름만 보이면 여지없이 비가 내리는 여행이었다. 한국에 살 때보다 한국을 떠난 후에 다시 한국을 찾은 이번 여행은 불안감이 항상 존재한 타국 생활로 지친 몸과 마음이 다 풀어져 버린 넉넉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홍수로 고생하시는 이재민에게는 정말 죄송스럽지만, 위기가 곧 기회라고 해야 하나? 다음엔 장마철에 강원도 여행에 도전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