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ㅣ파랑새는 희망인 동시에 자유를 찾아 날아가 버리는 외로운 이별
새와 참 인연이 깊다
대학 졸업 작품으로 ‘Wing’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커다란 합판을 날개 모양으로 잘라 테이블을 만들고 하얀 페인트를 두껍게 입히고 테이블 모서리에 테이블 다리가 지지대가 되어 그 다리와 일직선으로 테이블 위로 높게 철 주물로 기둥을 세우고 그 끝에 금장 날개를 얹었다. 세트로 비슷하게 의자도 만들었다. 의자 바닥과 기둥 모두 테이블과 같은 형태에 다리를 세 개만으로 중심을 잡고 그 다리에 바퀴를 달았다. 졸업 심사 때 하필 교수님이 내 의자에 앉아볼 게 뭐람! 여자 교수님이 날개의 모양이 신기하셨는지 편안한 의자도 아닌 나무로 된 딱딱한, 그것도 바퀴가 달린 의자에 살짝 걸터앉으셨는데 그만 꽈당!! 덕분에 B 학점을 받아야 했지만 난 나의 날개 테이블과 날개 의자를 좋아했다.
새를, 그것도 파랑새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할머니의 흥얼거리신 노랫가락에서 희미하게 퍼져 나온다. 난 할머니의 단아한 얼굴이 좋았다. 지금으로 치면 계란형으로 자그마한 체구에 동백기름으로 매일 아침 치장을 하셨는데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탁! 하고 꽂으시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 엄마의 최대 불만이셨던 모시 삼베 한복을 매일 판판히 다리셔야 만족해하셨던 깔깔한 베이지 색감의 치마저고리는 할머니의 상징이셨다. 그런 깔끔하신 할머니 방에 나지막하게 걸려있는 액자 하나가 있었다. 마른 갈색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파랑새 한 마리가 나무 액자에 그것도 유리가 덮인 액자였는데 할머니는 그 새를 보시면서 노래를 하셨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녹두장군 울고 간다~”
글을 쓰고 있는 내입에서도 할머니의 입 내음이 나는 듯 함께 흥얼거린다.
예전에 어떤 이가 나에게 “너는 나에게 ‘파랑’이야”라고 말했는데 왜 나는 파랑이 그냥 색감으로써의 파랑이 아닌 파랑새를 연상했을까? 파랑이라는 색이 밝아서인지 희망과 꿈을 줄 수 있는 활기찬 색임이 분명하고, 거기에 높이 솟아 날아가는 새가 연상되니 파랑새는 막연한 기대와 높이 날아오르는 기상을 대표하는 자격이 충분한 거 같다. 그렇게 파랑은 내가 되었다. 나에게 파랑이라 말한 어떤 이는 내가 파랑새가 되어 훨훨 날아가리라 예상했을까? 파랑새는 희망인 동시에 자유를 향해 날아가 버리는 외로운 이별이라는 사실은 왜 몰랐을까?
뉴턴이 하루는 사과나무에 앉았다가 자기 앞에 떨어진 사과를 보고 지구가 자석처럼 아래로, 아래로 잡아당기는 힘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그 힘을 중력이라고 했지만 단 한 가지 중력의 힘을 거스르는 것 또한 새이다. 새가 자유를 상징하는 대목이 이것인데 새의 친구들인 동물이나 꽃들도, 사람들도, 모두가 땅 위에서 노는데 단지 새라는 녀석만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놀다가 땅으로 놀러 오고, 엄마가 부르면 금방 하늘 집으로 가버리는 자유로움을 선사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새처럼, 훨훨 날아 자유롭게 어디론가 떠나고 싶나 보다.
엄마 새가 아기새를 보호하려는 엄청난 일을 겪은 후에는 새의 머리가 나쁘다는 말을 절대 할 수 없는, 그 말을 완전히 뒤집은 사건이 있었다. 아파트 살 때였다. 우리 아이 방 창문에 나무 한 그루가 창을 뒤엎어 버릴 정도의 잎을 피웠는데 어느 날 우리 아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를 불렀다. 어느 날부터 부지런히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에 마른풀 가지 들을 실어 나르더니, 마른 잔가지들을 얼기설기 얹고 어디에서 주웠는지 낡은 비닐도 보이고 작은 휴지도 끼워 넣고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는 듯이 분주히 집을 짓고 있었다. 작은 국그릇 하나가 가지 사이에 있는 듯 자연과 자연스레 어울리는 고즈넉한 둥지였다. 그런 낣작하고 튼튼한 새 둥지를 만드는 걸 매일 아이들과 관찰하던 중이었는데...
어머나!
언제 저렇게 작고 아담한 짚 둥지에 작은 4개의 파랑 알을 낳았을까? 어? 근데 왜 파랑 알이지? 파랑새가 아닌 몸집이 작고 귀여운 갈색 우리나라 참새 같았는데 희한했다. 정말 진파랑 색에 살짝 흰 점박이가 조그맣게 박혀있었다. 엄마 새가 와서 잠시 알을 품더니 날아가고 또 날아오고 또 품고 있고...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빠 새가 둥지 주위를 돌며 계속해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엄마가 알들을 품고 있으면 아빠가 없어지고 엄마가 어디론가 날아가면 아빠가 근처 나뭇가지에서 둥지를 응시하고 있다. 다른 새가 채 가기라도 하면 달려들 기세였다.
언제 부화를 했는지 엄마 아빠가 열심히 지렁이며 과일이며 정말 부지런히 물어다 먹인다. 우리가 창문 안에 있으니 새들은 우리가 안 보이나 보다. 보이면 여기다 둥지를 만들지도 않았을 테니까... 며칠 뒤 남편이 더 가까이 새들을 보고 싶다며 창문을 확 열었는데 아뿔싸! 놀란 아기새 한 마리가 날갯짓 연습을 하려고 둥지 가장자리에 서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린 대형사고가 나버렸다. 아직 날 준비가 안 된 어린 새였는데 말이다. 우리는 너무 놀라 뛰어 내려갔다.
후다닥... 땅에 떨어지면서 다리라도 부러졌으면 데려다 보살펴야 되니 온 식구가 1층으로 내려가 현관문을 여는데 어? 엄마, 아빠 새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가족 머리 위를 퍼덕퍼덕 소리를 내며 쪼는 게 아닌가? 우리가 잘못했으니 어쩔 거냐며 시위라도 하듯이 우리 주의를 뱅글뱅글 돌며 쪼아 대는 통에 아이들은 일단 들여보내고 나와 남편은 그래도 아기새를 구하러 머리통을 감싸고 나무 밑을 살펴보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그새 엄마가 아기를 물어가 옮긴 건지, 아기새가 그 다리로 걸어 다른 데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그 뒤로도 우리만 나가면 어디선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머리를 쪼아대서 한동안 밖에 나가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문을 사용하는데 우리를 어떻게 알고 복수를 하는 건지 영리해도 너무 영리한 새들이다. 유리창 안에서 자기들을 보고 있는 우리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보처럼 우리만 몰랐다. 그해 이후에 그 집에서 다시는 그렇게 아름다운 새둥지를 구경도 못해본 아쉬운 사건이었다.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던 건 싱글하우스로 이사온지 얼마 안 된 일이었다. 우리 집 현관문이 동남쪽을 향해 있어서 여름에는 아침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해가 비춘다. 현관문 중앙에 꽃들로 장식된 동그란 리스가 걸려있는데 하필 그 안에 새둥지를 틀었다. 엄마새와 아빠 새가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걸 보니 알을 낳았음이 분명한데 문제는 해가 너무 뜨거울 거 같았다. 부화를 할 때는 꽃들 속에 파묻혀 있어서 다른 새들의 공격을 받을 염려도 없는 좋은 환경이겠지만 새끼가 태어나면 더울 것임이 분명했다. 난 용기를 냈다. 그 리스를 서향에 있는 덱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옮겨 주었다. 해가 덜 비추니 좋고 문을 여닫을 필요가 없으니 놀라거나 떨어질 염려 없어서 좋고 더군다나 유리창으로 되어 있으니 알을 품는 과정에서 부화해 아기 기르는 가족 모습도, 또 엄마를 따라 나는 연습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는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자연학습의 목적이 다분히 계산된 조치였다.
바로 뒤로 돌아가면 아기가 있는데 그걸 못 찾니
그렇게 조심스럽게 새둥지를 옮겼건만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 아빠 새가 오지 않았다. 다시 현관문으로 가보니 바보처럼 그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둥지를 찾고 있었다. 바로 뒤로 돌아가면 아기가 있는데... 말로 설명을 해 줄 수도 없고.... 다음날도 오지 않았다. 비정한 엄마 같으니라고만 생각했다. 그걸 못 찾니. 바로 뒤에 있다고... 새둥지에서 엄마품을 기다리고 있는 파란 알들은 부화가 되지 못한 상태로 그렇게 말라 버렸다. 이번엔 내가 새들에게 잘못했다. 새들은 둥지가 없어지면 바로 포기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현관을 그렇게 며칠 배회하다가 그 며칠이 지난 후에 엄마 아빠 새가 덱으로 찾아왔다. 때는 이미 늦었음을 간파하고 뒤도 보지 않고 푸드덕 날아가버렸다. 얼마나 애가 탔을까? 미안하다 새들아! 인간의 이기심으로 감히 새들의 생리현상을 판단하고 행동해 버렸다니! 설마 엄마가 아무 곳에나 둥지를 만들었을라고... 아기를 위해 얼마나 안전한 둥지를 찾고 찾았을 그 자리인데...
모성본능만 있는 다른 동물들이 비해 모성과 부성 모두 있다는 새에 대한 학계 보고는 참 많다. 더군다나 자기 아기새가 아닌데도 자기 둥지에만 있으면 엄마 아빠는 제 새끼인양 열심히 보살핀다. 그래서 여러 인종이 섞여 질서를 지키며 살아야 하는 나라인 미국은 독수리가 상징이 되었나 보다. 보통 한 나라의 상징으로 우리나라는 호랑이이고 중국은 팬더곰,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스페인은 황소, 호주는 캥거루 등 많은 나라들이 크던 작던 동물을 상징하는데, 하긴 독수리는 새이긴 하지만 크고 우람해서 작은 새의 느낌은 아니지만, 새의 자유성과 여러 새를 동시에 조건 없이 기르는 특징을 부각되게 상징하는 면에선 맘에 드는 나라다. 하지만 독수리는 절대 직접 사냥하지 않는다. 검은 독수리 떼에 둘러 쌓여있는 사슴 사체의 피 살갗들이 보이고 뼈만 남기는 소름돛는 장면들을 많이 보게 된다. 새의 군집성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한동안 새의 깃털이 이뻐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순수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아크릴 물감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내가 이젤을 놓고 깃털 하나하나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새가 처음 태어날 때는 털이 없다. 민둥 살로 태어나 하나하나의 숨구멍을 통해 찢기는 아픔을 감내하며 깃털이 자라 나온다. 그 깃털이 자라며 그렇게도 아름답게 빛나는 색으로 승화된다. 하나의 깃안에 수만 개의 털들이 자라남을 축복하고 싶도록 사랑스럽고 깃털모양이 새의 종류만큼이나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색감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해서 처음엔 하나하나를 관찰하며 그리다 깃털을 뒤집어서도 그려보고 한 줄로 세워 놓은 모양도, 몽땅 다발로도 그려보고, 아크릴을 유화처럼 진하고 묵직하게, 또 아크릴을 수채화처럼 맑고 투명하게 물이 흐르듯 그렸더니 집안 전체에 여러 색감의 깃털 그림만 가득해져서 우리 아이들이 새장 안에 있는 거 같다고도 했다. 누군 나에게 그렇게 깃털을 그리다 내 몸 어딘가에서 날개가 나올지도 모른다며 날개를 감추고 있어야 될 거 같다고 했다. 지금도 너무나 가벼운 깃털들이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
날아다니다 지쳤나 보다. 우리 할머니처럼...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뼈만 앙상히 남은 모습으로, 반듯하게 누우신 모습으로 그렇게 파랑새가 되어 날아가셨다. 중력의 힘이 다해서 죽음으로 승화하신 모양이다. 정말 내 어깻죽지에 날개가 있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 아직은 없기를 바라지만) 날개를 펴고 이 세상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수 있다면, 파랑새가 되어 녹두꽃에 조심스럽게 앉아계실 우리 할머니와, 고소 공포증이 있어 날개가 있어도 날아보지 못했을 나의 작은 언니와, 새처럼 날아 처절히 살다 간 어떤 이와 그렇게도 가고 싶어 했던 제주도 섬에 같이 날아가고 싶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을 그 아기새와, 새 둥지를 옮겨버려 엄마품에 한번 안겨 보지도 못한 4개의 파랑 알들과도 반갑게 만나길 기도하는 파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