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ㅣ어릴 적 연탄을 갈아본 추억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부엌의 변천사로
내 어릴 적 부엌은 온통 회색빛으로만 기억된다.
엄마가 혼자 항상 머물렀던 곳... 더 시골에 가면 흙으로 빚은 아궁이에 나무를 패 나무 불꽃으로 밥도 하고 아랫목을 데우기도 했다. 우리 집은 그나마 시멘트로 아궁이며 부엌 바닥이며 지금의 수납장인 선반 등 모두가 시멘트로 마감된 지금으로 치면 낡고 불편한 '젠' 스타일의 색감이었다. 시멘트 바닥이라 청소가 쉬우셨는지 아니면 엄마의 결벽에 가까운 성격 탓이었는지 매번 물청소를 하셨는지 시멘트 바닥은 항상 물기가 가득해 미끄러울까 봐 조심조심 다녔던 기억도, 추운 겨울엔 차가운 공기에 차가운 살얼음의 회색 바닥이 그렇게도 스산할 수 없었다.
참 연탄구멍 이야기를 하려다 시멘트 바닥으로 넘어갔는데 엄마가 아주 가끔 ‘연탄불 좀 갈아라’ 말하시면, 그 조막만 한 손으로 겁나게 긴 까만 쇠 집게로 연탄이 덮인 역시 엄청나게 큰 검정 덮개를 제치고 아주 조심스럽게 쇠 집게로 연탄의 수많은 구멍에서 집게가 들어갈 수 있는 퍼즐 맞추기처럼 딱 맞는 구멍에 넣고 들어 올려야 하는데, 너무 힘을 주면 깨지기 쉽고 너무 힘을 빼면 미끄러져 나가길 반복해야 하니 힘의 강약 조절이 필수였다.
한 장의 연탄을 어린 팔보다 긴 집게로, 어린 키 머리 위로 집게를 올려 조심조심 아궁이로 가져온다. 검은색에서 아직은 불꽃으로의 소명이 남아있는 위에 있는 연탄을 먼저 들어 올려야 하는데 이게 관건이다. 운이 좋으면 그냥 아래의 다 타버린 핑크빛 도는 재로 변해버린 쓸모없는 핑크 연탄과 분리할 것도 없이 살짝 들어 올려지는데 두 개가 딱 붙어버리면 머리 아파진다. 살살 집게로 구멍 사이사이를 돌려도 보아야 하고 그것도 안 되면 힘껏 두 개를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해서 떼내야 한다. 그래도 안되면 엄마를 불러야 하지만...
분리되어 다행히 불꽃이 남은 진핑크 연탄을 부엌 바닥에 놓고 연탄 아궁이 맨 아래에 있는 다 타버린 더 이상 뜨겁지도 않은 핑크 연탄을 올리는데 이때는 정말로 힘을 주어서는 안 된다. 잿더미를 건져 올려야 하는 작업인데 그나마 살짝 구워진 바삭한 느낌이라 바스라 지지는 않아 다행이다. 건져올린 핑크 연탄은 다시 재활용될 찬스가 많아 그냥 버리지 않는다. 눈이 오면 미끄럼 방지용으로 요긴하게 쓰거나 가끔 비온뒤 거름으로 쓰이는걸 본적이 있다. 불꽃이 남은 핑크 연탄을 아궁이 아래에 넣고 새로운 검정도 아닌 까만 연탄을 핑크 연탄 위에 얹는데 이번이 두 번째 관문이다.
까만 연탄의 두 번째 줄 8개의 구멍 중 대각선으로 균형 잡아 집게를 넣고 살살 돌려 아래 핑크 연탄과 위의 까만 연탄을 일직선으로 맞추는 고난도의 집중이 필요할 때이다. 아주 살며시 실눈을 감고 밑에서 새어 나오는 불꽃을 응시하며 관통하는 지점을 놓치면 안 된다. 자칫 어긋나게라도 놓이면 연탄이 잘 타지 않아 방바닥이 뜨겁게 달구어 지지 않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휴 연탄을 다 갈았으니 엄마는 잘했다며 귀한 요구르트 한 개를 주셨을 것이다.
참 연탄구멍은 총 3줄의 원으로 되어있는데 아주 정 가운데에 하나가 있고 중간 줄에는 8개가 있고 그 수의 배수로 가장자리에는 16개가 있어 총 25개의 구멍이 있다.
그 나이에 난 한참 숫자 공부에 열을 냈나 보다. 별개다 기억난다 싶지만 연탄구멍을 세어 보며 논 기억 때문이다. 나중에는 번개탄이라고 해서 이름값답게 번개처럼 타오르는 머리 좋은 녀석이 나왔다. 연탄을 제때 갈지 못해서 두 개 모두 꺼져버려 더 이상 불꽃이 없어지면 까만 연탄 두 개를 연달아 놓고 그 위에 연탄의 3/1 정도의 납작한 번개탄을 얹고 다 쓴 종이를 비벼 성냥으로 불을 붙여 호호 불면서 번개탄에 가져다 대면 정말 신기하게도 번개탄에 번개처럼 불이 붙어 잠시 후면 까만 연탄이 붉어진다. 엄마가 참으로 바빴나 보다. 종종 이런 번개탄 피우던 광경이 생각나는 거 보면...
부뚜막의 시멘트로 발려진 아궁이에서 부엌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시대는 우리나라가 급발전하는 80년대쯤인 거 같다. 엄마만의 공간인 부뚜막이 다른 방들과 엄격히 분리되었던 곳이라면 부엌은 독립된 공간이 아닌 공동체의 역할로서의 바뀜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초기 아파트의 부엌은 획기적이었다. 물론 화장실이 실내로 들어온 거만큼 놀랄 일은 아니지만, 부엌은 갇혀있던 엄마만의 부뚜막이 가족 모두에게 오픈되어 엄격한 아버지의 홀로 엄숙함을 지킬 수 있는 허락된 분리 공간이 없어지고, 아이들의 은밀한 자기만의 공간에서의 자유로움도 사라졌다. 서로 모두를 관찰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오픈되어버린 부엌은 아버지의 권위의식을 서서히 무너뜨리게 된 일등 공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버지가 신문과 티브이에만 눈을 고정시키고 있을 때 엄마만이 부엌에서 끊임없이 일하는 모습을 누가 보는가? 바로 아이들이 보고 있다. 물 한 잔이라도 아버지 손으로 떠다 먹을 수밖에 없다. 식사 준비에 오랜 시간 서 있다가 같이 식사도 못하고 다시 설거지를 해야 하는 엄마의 모습을 누가 보는가? 그럼 아버지는 빈 그릇이라도 설거지통에 넣어야 한다. 엄마의 폐쇄 공간이 가족들에게 공개되면서 부엌에서의 일들이 혼자만의 일이 아닌, 외로운 공간이 아닌, 가족 공동체의 공간으로 승화된 것이다.
시멘트 부뚜막이 나무 수납장 부엌으로 바뀌면서 연탄은 시골에서나 쓰는 난방 연료로 되면서 연탄의 소비는 급격하게 곤두박질쳤다. 그야말로 이제 부엌이라 하면 나무 수납장에 가스렌즈가 대세를 이루었다. 또한, 전기 곤로라고 해서 투명한 유리관이 회오리처럼 원을 그린 모기향 같은 모양으로 전기를 꽂으면 전기가 유리관을 통해 가열되어 빨갛게 달아오르는 열기구도 있었다. 부뚜막이 실내로 들어오니 전기가 대신해야 하는 거는 당연하다. 엄마는 이때부터 선풍기를 달고 사셨다. 아마도 지금의 나처럼 갱년기에 접어드셨을 텐데 부뚜막에서 일하시다 더우시면 밖으로의 길이 바로 옆이었다가 가스레인지의 열을 밖으로 발산할 수 있는 엄마가 더위를 삭힐 수 있는 길은 너무 멀었으리라. 그러니 선풍기의 힘을 빌릴 수밖에..
내가 시집을 갈 때쯤이니까 90년대 중반 ‘젠’이라 해서 일본에서 유래가 된 인테리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모든 게 그때의 나처럼 직선적이고 깔끔하고 날카로운, 간단한 소품 이외에는 탁자 위에 너저분하다고 생각되는 소품 하나 없고 색감도 절재 되어 무채색에 가까운 흰색 회색 거기에 포인트로 진파랑 색 정도만을 추가해 집안에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하는 디자인이 유행이었다. 역시 부엌 또한 흐름을 같이 했는데 새로운 집 주방들을 연 브라운 나무색에서 온통 흰색 톤으로 갈아치웠다. 부뚜막의 회색 톤과 어우러진 나무와 흰색의 과도기쯤으로 해석된다.
이때 처음으로 가스레인지와 함께 오븐이라는 열로만 가열되는 신개념의 조리기구가 도입되었다. 동양매직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가스 오븐 렌즈는 가스렌즈와 오븐의 일체형으로 신혼살림 1순위였음을 우리 시대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나의 오븐을 보고 자기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눈물지었던 친구의 질투를 받는 시기도 그때였다. 하지만 오븐이라 하면 그저 빵을 집에서 구울 정도로만 생각된 것이 한두 번의 실패로 큰 프라이팬이나 커다랗고 납작한 그릇을 넣을 수 있는 수납장으로 전락했다는 걸 그 친구는 몰랐을 것이다.
이태리 가구는 드라마 회장님 거실에 놓이는 럭셔리 가구
다시 30대가 되어서는 앤틱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한국의 앤틱이 아닌 즉, 이태리 가구라 해서 꼭 이태리에서 온 가구는 아니지만, 유럽의 중세풍으로 일단 곡선이 여러 모양으로 꼬여 있고, 나무의 색감이 진하고, 천들도 두꺼워지고. 거기에 수술이 달린 요란한 것들로 특히 드라마에서 회장님 거실에나 놓일법한 웅장하고 럭셔리한 가구들이 넘쳐났다. 당연히 수입품들이 판을 쳤고 거실 탁자 위에 놓는 스탠드 하나에 그 당시에 백만 원을 홋가 하는 돈을 지불하고라도 진귀한 것을 못 구해서 안달했다.
수입품이 난립을 하니 부엌에서 영어 이름인 키친으로 급선회한 건 당연한 일이다. 한샘 키친에서부터 모든 주방가구들이 키친으로 대혁명이 일어났다. 그전의 모든 가구들을 통합해서 가구라고 했던 것이 이제는 단독으로 키친 가구 전문점이 대세를 이루고 나 또한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 여자들의 최대 로망이 되어버린 키친 인테리어에 특히 신경을 쓰는 공간으로 중점을 두었다. 이제는 건설할 때 일자로 획일화되어 만들어지는 수납장이 아니라 주부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동선에 맞추고 실용적인 수납까지도 고려한 맞춤형 주방가구로 바뀌었다.
미국에 올 때쯤 나는 앤틱 바람을 잔뜩 타고 온 터라 미국에 온 첫날 앤틱 스탠드의 가격에 놀라 냉큼 집어온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타운하우스를 꾸밀 때에도 싱글 하우스에나 어울릴법한 기다랗고 우아한 8인용 식탁에 샹들리에를 직접 달고 구불한 커다란 거울도 벽에 걸지 않고 바닥에 비스듬하게 세워 놓았고 침대도 사방 모서리에 기다란 기둥이 있는 액틱 가구를 놓았다.
집 전체 페인트도 연브라운색부터 진 브라운 칼라로 어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했고 소파도 짙은 브라운색 가죽으로 한껏 앤틱임을 자랑했다. 주방도 체리 색으로 수납장을 천정까지 높이 제작했고 바닥도 카펫에 체리목 나무를 적절해 섞어 최대한 어둡고 묵직한 유럽의 중세스러움을 표현하고자 했다. 지금까지도 몇 개의 큰 가구는 어울리지 않은 이 집에 골칫거리로 남아있지만 내 나이의 흐름에 맞는 나의 취항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앤틱이 고급스러움을 강조한다면 그만큼 고루함을 피할 수는 없다. 내가 나이가 드니 가구도 나이가 드는 듯 앤틱이 왠지 나를 닮아 늙어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됨이 낡음으로 보이고 진한 색감의 페인트가 차분해 보이는 게 아니고 흐린 날씨처럼 마음이 우울해지는 듯했다. 흔들리는 촛불이 가냘픈 여인으로 보이지 않고 청승맞은 비 맞은 초라함으로 보이는 게 아마도 나이 탓이 맞는 거 같다. 이제는 다시 젠이다. 그전의 딱딱하고 날카로운 자로 잰 듯한 젠 스타일이 아니라 부드럽고 편안한 젠이다. 진하고 스산한 차가운 시멘트가 아닌 밝은 회색에 흰색을 적절히 섞고 블랙으로 포인트를 주니 해가 쨍쨍한 것처럼 마음이 젊어졌다.
주방 또한 밝아졌다. 체리의 늙으스레한 어둠이 걷히고 밝은 회색 톤이 전체 수납장을 차지하고 카운터 탑은 흰색 대리석 바탕에 회색 무늬가 서예로 붓칠 해 놓은 것처럼 번져있고 카운터 의자는 회색 천 의자로 편안한 주방을 만들었다. 특히나 오븐의 쓰임새가 오직 빵 굽는 용도로만 알았다가 미국 음식 대부분을 오븐으로 만든 음식문화 때문에 두 개의 오븐이 길게 아래로 되어있는 은빛 스테인리스 스틸이 젠의 느낌을 확실히 살렸다.
나뿐 아니라 이제는 가족의 동선까지도 고려한 아일랜드라고 하는 말 그데로 섬처럼 주방 정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커다란 식탁이 달라진 점이다. 크기가 열 사람은 족히 앉을 수 있게 길고 큰 데다가 정중앙에 있으니 가족 누구나가 이용할 수 있다. 큰 책상이 필요한 프로젝트를 할 때도 그 큰 보드를 펼쳐놓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완성하고, 방학이 되어 그 많은 짐 들을 다 풀어헤쳐놓고 정리하고, 한꺼번에 봐야 일이 쉬운 시골의 마트 나들이의 봉투들도 그곳에서의 펼침으로 풍성해진다. 추수감사절의 가족 모임은 아일랜드의 쓰임이 극을 다한다. 보기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음식 솜씨가 별로인 나인데도 희고 환한 테이블 위로 하얗고 큰 접시에 터키며 파이를 올려놓으면 모든 음식들이 나의 음식 솜씨를 맛보다는 눈으로 그 맛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고마운 식탁이 되었다.
연탄구멍이 몇 개였나 생각하다 부엌의 변천사를 쓰게 되었다. 그 시절의 연탄은 우리 엄마들의 하루에도 몇 번씩 뜨거운 물을 쓰지 못할까 봐, 방바닥이 행여 식을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며 갈아줘야 하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구석기나 신석기시대의 불이 절대적 신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에 비해 지금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가스 불이 켜지고 밥이 되고 빨래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지금도 아일랜드가 주는 편리함이 빛을 발하고 있다. 적어도 아일랜드에 앉아있는 엄마인 나한테는 말이다. 우리 아들은 2층 자기 방에서도 1층과 오픈된 덕택에 나의 감시를 피할 길이 없다. 조용히 난 나의 일을 하지만, 일거수일투족이 엄마의 레이다 망에 걸려있음을 적어도 아는 나이니까. 그래서 갑자기 생긴 오늘같은 빠른 퇴근을 그리 반기지 않나보다.
아들~~ 뭐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