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장례식

#46ㅣ

by 멜랜Jina


..말이나 개구리 눈처럼 360도를 본다해도,

하늘이 이뻐서 미국에 왔다는 친구의 말이 무슨 말일까? 별 의미 없이 들은 지 몇 년이나 흘렀는데 난 이제야 하늘이 왜 이쁜지 알게 되었다. 일단 땅의 크기에 비해 인구가 적고, 인구가 적으니 건물과 빌딩이 많을 필요가 없어 공해도 적고, 공기도 좋아 하늘의 구름도 맑게 더 높이 보이고, 빌딩에 가려 반밖에 보이지 않던 하늘이 하나의 손실 없이 전체의 하늘로 보인다. 만약 우리의 눈이 말이나 개구리 눈처럼 앞만 아니라 옆면까지를 볼 수 있다 해도, 한눈에 담지 못할 정도의 넓고 넓은 끝도 없는 하늘이다. 장례식을 다녀오는 길에 올려다본 하늘은 끝없이 펼쳐진 360도 천체 우주에 해도 구름도 하나가 되어, 나도, 너도, 날아가는 새도, 심지어 달리는 자동차도 하나가 되는 기이한 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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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어제저녁 식사도 잘하시고 사랑하는 딸과 전화로 이야기도 잘하시고 난 후 새벽에 아무도 없는 방에서 홀로 주무시다 운명하셨다고 한다. 그 딸은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실 줄은 상상도 못 했고 아직 살아계신 것 같다며 좀 더 이야기를 나눌 걸, 한 번이라도 더 사랑한다는 말을 해드릴 걸, 물이라도 한잔 떠드릴 걸, 그럴걸, 그럴 걸을 반복 하여 말하면서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하며 그녀도 곧 눈을 감아 버릴 거 같은, 눈동자의 빛이 희미해졌다.


할머니의 마른 몸이 딱딱하게 굳어 미이라 같은 시체를 내 어린 나이에 보았다. 어렸기에 호사라는 말뜻도 모르고 나에게는 그저 갑자기 절대 내편인 할머니가 사라진 사건이었다. 아빠가 할머니의 눈을 감겨 드리려고 애를 쓰시는데도 잘 안 감기는지 곡을 하시며 감겨 드려야 했다. 나는 그 눈을 왜 감기냐며 다시 떠서 나를 보라며 울고 또 울어야 했다. 그렇게 꽃상여를 타시고 우리가 살던 집을 한 바퀴 휘휘 돌고 까맣고 긴 자동차에 실려 시골길을 달렸다. 하얀 종이꽃이 네모진 상여에 얹히고 하얗고 크게 성스럽게 포장되어, 기다랗고 두꺼운 대나무 위에 얹고 파란 긴 천과 빨간 긴 천을 상여의 맨 꼭대기에서 대나무 끝을 묶어 몸집이 큰 아저씨들이 앞뒤 대나무 하나씩을 어깨에 메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저 꽃상여 속에 할머니가 누워 계실까?


그 긴 시골길을 아빠는 할머니의 흑백 사진을 힘없이 들고 상여 뒤를 따랐다. 몇몇 친척분들이 그 뒤를 똑같이 누렇고 딱딱한 삼베 두루마기에 지푸라기로 새끼를 꼬아 얹은 삼베 모자를 위로 뾰족하게 쓰시고, 지푸라기 짚신에 버선을 신으시고, 버선목에는 역시 지푸라기로 꼰 끈을 매셨다. 뒤따르는 어른들은 계속해서 곡을 하시는데 마른 울음을 앞뒤에서 주거니 받거니 어~이, 어~이하며 느릿느릿 걸어갔다. 난 어린 마음에 꽃상여 속에 정말 우리 할머니가 계실까? 정말 안에 계시면 상여 멘 아저씨들이 너무 무거울 테고 우리 할머니도 어지럽겠다. 왜 저런 가짜 울음을 내는 걸까? 아이가 보는 어른의 죽음 후의 절차는 참으로 기이한 모습으로, 가짜 인형 놀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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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들어가실 묘에는 이미 누군가가 깊고 넓게 그리고 반듯하게 뚫어 놓았다. 상여를 그 앞에 내려놓았다. 상여에 정말 할머니가 들어가 계셨는지, 동그란 원이 뚜렷이 새겨진 빨간 비단 천에 덮인 관이 주~욱 나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빨간 관을 노끈으로 양쪽을 묶어 네 사람이 똑같이 손의 균형을 맞춰 차가운 땅속으로 서서히 내려놓았다. 노끈을 걷어 올리시는 아빠는 그렁그렁한 빨개진 눈으로, 빨간 관 위에 구덩이를 파냈던 흙을 조금 뜨셔서 흔들리는 삽으로 흑, 뿌리셨다. 곡소리가 최고조로 올라갔다.


나도 왜 그 모습이 가장 슬픈 영상으로 낙인 되었는지 삽으로 누군가가 흙을 떠내면 그리 슬퍼질 수가 없다. 참으로 단순한 기억 연상 작용이다. 그리고 산소 앞에서 꽃상여를 불로 태웠다. 그리 많은 종이를 불로 태우니 그 불꽃이 얼마나 대단한지 처음엔 커다란 집채만 한 불덩이가 하늘 끝까지 오르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사그라들어 나중에는 재가 되어 하얀 가루만 남았다. 왜 그 재가 할머니를 태운 가루 같다는 느낌이 훅, 들었는지 모르겠다. 왜 벼 심은 긴 시골길에 상여를 메고 가는 모습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또렷하게 기억나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죽음이 남겨놓은 아련한 애탐이 아직도 살아 있나 보다.


..쪽지시험처럼 갑자기 닥친 죽음은,

그래도 날짜가 공표된 시험은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거니 어느 정도 준비를 할 수가 있다. 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음은 오히려 축복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죽음의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면, 병을 이기려는 노력도 할 수 있고 삶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정리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갑자기 보는 쪽지 시험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갑자기 닥치는 죽음은 그야말로 사라짐의 허망함에 준비되지 않은 학생처럼 결과를 예상할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이 저녁식사까지 잘하고 그 밤 사이에 사라져 없어져 버린다면 남은 자의 슬픔을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할머니의 죽음은 아빠한테는 예견된 시험이었을까? 아니면 죽음이 사라짐의 허망함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쪽지 시험이었을까? 아빠의 허망함이 그대로 전해졌는지 그때부터 우리 집에 불행한 일들이 겹쳐졌다. 하필 그 시기에 오빠가 군대에 가버려 엄마의 허망함이 더해지고, 언니는 언니의 사랑을 찾아 집을 떠나 버리고, 잘 나가던 아빠의 사업이 맥없이 무너지는 시간들이었다. 아빠의 허무함이 집 전체에 퍼지는 듯한, 할머니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아픈 이별들이었고 집의 든든한 기둥을 받쳐주는 단단한 받침돌이 깨져버린 아픈 시간들이었다.

느린 언니의 왼쪽 다리처럼 조용한 우리 언니가 사라졌다


내 옆에 숨 쉬고 있는 나의 절대적 존재가 한순간에 사라져 없어지는 경험은 또 한 번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약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기 때 열이 많이 나서 약간의 소아마비 증세가 있었지만, 그때는 너무 경미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을 것 같은데,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에 비해 약했는지 뛰거나 심지어 빨리 걷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성격도, 느린 언니의 왼쪽 다리처럼 조용한 성격인 우리 언니가 사라졌다.


학생 때, 버스에 서 있는 게 너무 창피해서 아빠가 데려다주지 않으면 택시만을 탔다고 말하곤 했는데, 순진한 공주과라서 그랬던 게 아니었던 걸 내가 큰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버스에 올라타고 내리기가 힘들었구나... 그런 조용한 ‘배종옥‘을 닮은, 그림 같은 언니가 가슴에 무언가가 있다고 얘기했을 때는 이미 늦었을 때였다. 한쪽 가슴을 도려내는 대수술을 한 후 꼭 2년 만에 왼쪽 발등이 아프다는 말에 침을 맞을 요량으로 가까운 한의원을 갔는데, 의사 하는 말이 ’ 절대 그냥은 아플 수 있는 부위가 아니니 큰 병원에 가보라 ‘는 말에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뼈로 전이가 되었다는 그 충격 이란... 난 그때 미국에 오려고 준비를 하던 참이었고 출발 전 언니 집에서 머무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암의 성장만큼 언니의 고통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없는 듯 있는 듯하던 조용하고 여린 풀잎 같은 여자가, 깡 말라버리는 몸으로 악다구니 치며 괴성을 지르며 우는 모습에 아이들에게 이모의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모의 존재는 천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내가 인테리어 일을 하는 관계로 언니가 우리 집에서 내가 퇴근할 때까지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하루 종일 아이들과 부딪기며 살았으니 이모는 그냥 엄마였다. 내가 미국에 오기 전 정신이 멀쩡할 때 하는 말이

“너는 좋겠다...”
“왜 언니?”
“저렇게 이쁜 아이가 둘이나 있어서...”
“언니는 잘난 아들이 있잖아”
“지금은 없잖아...”
“캐나다에서 오라고 하지 그래”
“아니... 지금 잘 지내고 있는데 나오면 다시 힘들어질 거야...”
“그래도...”
“지나야, 넌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 잘 키워. 너무 이쁜 아이들이야...”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채 미국으로 떠나야 했고 그렇게도 사랑하는 아들도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한국에서 다른 친구들에 비해 뚱뚱하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해 차선책으로 캐나다로 유학을 보낸 엄마는 그렇게 아들의 얼굴도 못 본채 사라져 버렸다. 나는 미국의 감옥 같은 빨간 대문에서 그렇지 않아도 유배 생활하는 듯 홀로 지내는 미적지근한 재미없는 천국에서 들은 언니의 비보는 그렇게도 이쁜 하늘에 언니는 새가 되어 하늘 속으로 사라져 버렸으니 난 그 허망함을 숨길 도리가 없었다. 진짜 천국으로 가 버린 것이다. 전화하면 금방이라도 ‘지나니?’ 할 것 같고 아이들이 ‘이모’ 하면 ‘응 우리 공주들 잘 있지?’ 할 것 같은데 이제는 한국에 가도 그렇게 조용하고 이쁜 언니가 없다. 언니의 말처럼 이쁜 두 아이중 한 아이는 대학을 졸업했고 한 아이는 대학을 다니는 성장 모습도 보지 못한 채 사라졌다.

내 마음도 로미오와 함께 줄리엣처럼 사라져 버릴 거 같다

내가 아끼던 소중한 반지가 없어져도 며칠은 속상하고 두고두고 생각나는데, 하물며 사람 목숨이 다해 사라져 버렸는데도 이 하늘은 없어지지 않고 또 그대로의 아침을 맞는다. 마지막 잎새처럼 그림으로라도 잎새를 그려 영원히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간절함이 있다는 걸 나도 느낄 수 있는 때가 되었다. 24시간, 내 안에서 공기처럼 숨 쉬는 절대적인 존재가 함께 있다가 한순간에 그 끈이 끊겨 버리는 아픔을 나도 이제는 알 거 같다. 그건 자식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아직 결실을 맺지 못한 연인일 수도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소설은 그냥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사라져 버린다는 거, 내 마음도 로미오와 함께 줄리엣처럼 사라져 버릴 거 같다.


장례식에서의 그분은 말없이 눈을 굳게 닫아버리고, 입술도 닫아버리고 긴 손가락만 빳빳하게 살아 있어 이 세상을 가리키고 있는 듯한데 입을 열면 그대로 말을 할 거 같고 눈을 띄워주면 세상을 보며 반짝 일 거 같은데 그냥 반듯하게 누워만 있다. 몸은 그대로 껍질이 되어 도대체 누구의 아빠이고 누구의 남편이고 그 누구의 연인이었을까? 그분도 분명 아빠이고, 남편이고 그 누군가에겐 연인인 남자였을 텐데 삶과 죽음의 찰나에 생명은 죽은 나무의 껍질이 되어 태워졌으리라. 그렇게 재가되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내 어린 나이에 본 할머니의 모습처럼...


자. 남은 건 없다. 사라진 장례식이 되었다. 죽음은 사라짐이고, 연기처럼 사라진 자리는 털끝 하나 남아 있지 않다. 그럼 남은 자는 어떻게 될까? 같이 숨 쉬는 세상이 없어졌으니 같이 멈추어야 맞는 걸까? 줄리엣이 죽었다. 로미오가 그 모습을 보고 독약을 마시고 따라 죽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다 정말 로미오가 죽은 걸 보고 다시 죽었다는 슬프고도 슬픈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은 이브가 뱀의 꾐에 꼬여 사과를 먹은 후 죽음의 벌을 내리시지 못하고 인간에게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나게 하시는 벌을 주셨고, 또 백설 공주가 마녀의 유혹에 사과를 먹고 죽었다가 왕자의 키스를 받고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들은 무언가를 먹고 죽고 다시 산다. 모두가 사라짐을 막기 위한, 허무함을 막기 위한 행동들이고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면 숨쉬기를 거부하고 다시 살려내는 기적을 만들까?


내가 연기처럼 사라지면, 처음엔 나를 찾겠지.


집안을 관리하는 엄마로서의 존재는 내가 아파 누워 있을 때 빛을 발한다. 옷은 어디 있냐? 밥은 어떻게 먹을까? 라이드는 누가 할까? 전기불은 제대로 끄고 나가려나, 도시락은 싸가지 못할 테니 돈을 줘야 할 텐데, 남편은 뭐라도 먹고 출근해야 하는데, 당장 첼로 연습하라고 말해야 하는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툴렸던 일상들이 제자리를 잡고 태연하게 정리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언제 엄마가 있었나 하며.. 한국에 있는 가족이나 친척은 더 빠른 정리로 돌입하겠지.


매일 보는 사람들도 아니고 기껏 일 년에 몇 번 보는 가족이고 자주 대놓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니 나의 사라짐은 그냥 추억으로 남겠지. 결국은 숨 쉬지 못하는 자만 숨 쉬지 못하는 것일 뿐, 숨 쉬는 모든 것은 그대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허망함이 하늘 끝에 닿아 숨 쉬지 못할 정도의 공기층이 없는 곳까지 가더라도, 조금만 내려오면 맑고 깨끗한 숨 쉴 수 있는 유혹을 떨쳐 버리지는 못하리라. 우리 언니의 죽음에 같이 숨쉬기를 거부할 거 같은 옆 사람도 금세 다른 사람과 호흡을 같이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이고 또한 삶과 죽음은 들숨 날숨의 숨쉬기 운동 같은 종이 뒤집기 정도의 차이다. 삶이 숨쉬기라면 숨을 제대로 일정하게 천천히 쉬면 된다. 숨이 흔들리면 숨이 가팔라지므로 언젠가는 숨을 쉴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 지금 숨 쉴 수 있을 때 숨 쉼을 감사히 여기며 운동하자. 숨을 쉴 수 없는 것도 삶이다. 쉴 수 없어 멈춘다면 내 영혼의 겉껍질이 못 쉬는 것일 뿐, 내 영혼까지 숨쉬기를 멈추는 건 아니다. 그 숨이 내 가족과 같이, 내 친구와 같이 마음으로 쉴 수 있다. 별 차이가 있겠는가? 얼굴을 보면서 같이 숨쉬기를 하던지, 보지 않고 같이 운동을 하던지...



..마음속에 별 하나씩을 품고 사는 게 인생이다,

별이 사라진다고 별을 품고 있던 자리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별자리는 그대로 두자.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다. 내 마음속에 별자리로 남아 있는 것이다. 또 나의 철학이 스믈스믈 발동한다.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는 건, 영원함이 없는 이 순간이 지나면 지금 이 순간은 또 다른 과거가 되는데, 이 순간만을 기억하고 아파한다면 과거에만 살게 되는 것이다. 이 순간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시간적인 존재가 아닌 찰나를 연속한 삶이다. 이 순간이 지나면, 이 찰나를 지나면 또 다른 찰나가 온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의 내 손이 고맙고, 작게 보이는 글들을 크게 보여주는 안경이 고맙고, 이글이 지나면 다른 글이 풀어지고 합쳐지는 나의 머릿속이 고맙고, 노란 커피잔 안에서 나를 따뜻하게 기다려주는 커피가 고맙고, 마구 써도 커서 하나로 지웠다 다시 쓸 수 있는 컴퓨터를 보내준 사람이 고맙다. 이런 순간의 행복들이 사라지고 또 다가온다. 내 손도 내 머리도 커피도 컴퓨터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돌다 사라지고 또 하나가 되어 돌고 사라진다. 쉴 새 없이 돌고 돈다. 삶과 죽음도 별이 되어 사라지고 살아난다.


이제는 어서 글을 마치고 오줌보 터질 듯 엄마만을 기다리는 우리 티오와 산책을 해야 하고 얼른 우리 아이 라이드를 가야 한다. 바람이 있다면 그 멋진 아저씨의 딸도 별이 된 아빠의 별자리가 남아 있음을 고마워하고, 나 또한 내 가슴에 새겨준 할머니와 우리 언니의 고운 별을 고마워해야겠다. 사라지지 않는 반짝이는 별을 선사해 주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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