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ㅣ
어릴 때 갔던 동네 목욕탕을 기억하는가?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 아침 엄마의 어김없는 목소리
'지나야 목욕탕 가자'
엄마의 육중한 손매가 얼마나 맵고 아프던지 이태리타월의 빨간 손이 왜 그렇게 무서운지
그놈의 이태리 사람들은 왜 그리 아픈 타월을 만들어서 여기까지 가지고 온 거야 하며 원망도 했더랬다.
네모네모 모양의 아주 작은 타일이 바닥이며 벽을 가득 메웠는데 지금으로 치면 모자이크 타일이라 해서 1 스퀘어미터를 망사로 연결해 한꺼번에 시공할 수 있게 만들었지만 그때는 그 조각조각을 일일이 줄 맞추어 누군가 시멘트를 발라가며 붙였을 텐데 그때의 타일공이 진정한 장인임에 틀림없다.
바닥은 어떤가? 아마 흰색은 때가 탄다고 아주 연한 하늘색이었을 것이다. 머리통 한 대씩 쥐어박혀 본 기억이 생각나는 장면은 아이들이 그 바닥을 뛰어다닐 때다. 지금은 넌슬립 타일이라 해서 미끄럼 방지를 한 타일을 사용하지만 그때는 이랬다.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뛰지 말라고!!!
아니나 다를까 내가 그 바닥에서 미끄러진 장본인이다.
미끌거리다 우당탕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져 글쎄 앞니가 부러지는 불상사를 겪고야 말았다. 한 번의 실수가 지금까지도 상처로 남아 그 어린 시절의 아픔을 기억하게 한다.
그때는 때밀이 아줌마가 목욕탕에서 제일 무서운 갑이었다. 차라리 엄마의 이태리 손맛이 낫지 그분(?)에게 잘못 걸려 등이라도 맡겨질라치면 벌겋게 달아올라 쓰라림의 아픔을 며칠은 견뎌야 했다. 왜 그리도 목욕에 대한 집착들이 강한 때였나 생각해보면 집에 목욕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명절을 앞두고 때 빼고 광을 내야 하는 일이 부모의 첫 번째 과제이자 임무인양 엄마는 시어머니와 딸들과 함께 아빠는 당신의 노부와 아들들을 데리고 몸을 깨끗이 닦여 놓여야만 마음이 시원했던 모양이다.
그런 정갈함이 남아서인지 세월이 지나 사우나가 들어섰나보다. 그 뒤로는 내가 한국에 있었을 땐 없었던 찜질방이라는 것으로 목욕탕이 변하면서 온돌 문화인 바닥의 뜨근한 찜질과 여자 따로 남자 따로의 목욕탕이 아닌 가족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족공간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부엌이 주방이라는 이름으로 변하며 가족공간으로 오픈되었듯이 남녀평등의 시작점과 동시에 권위를 앞세운 부모와 자식의 상하관계에서 허물없는 수평관계로의 사회구조와 딱 맞물린 톱니바퀴가 된 셈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찜질방이, 드라마를 보며 침만 흘려야 했던 양머리의 신호탄이 이곳 동부에도 상륙했다. 1시간 이상 운전을 하고 가야 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깊은 겨울 동안 별다른 이견없이 가족 모두가 찬성하며 갈 수 있는 연례행사처럼 즐기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환호했던 한인들이 점점 줄어들고 북부에서 온 러시아나 북부 유럽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는 이유는 한국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싼 원인이 있다. 물론 원자재에서부터 자잘한 인테리어에 쓰이는 소품이나 하다못해 숯이나 한방재까지 찜질이라는 고유의 개성을 살리려면 한국에서 공수해야만 운영이 되기 때문에 당연히 비싸야 하겠지만 우리는 한국의 가격을 알고 있기에 비교가 되어 못 가는 게 사실인데 추운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한국에서의 가격을 모르니 그저 좋을 수밖에 없다.
한국에 비해 공수해온 시설이 좋을 리 없고 서비스도 좋을 리 없는데 가격은 거의 5배 이상이고 시설은 한국의 3/1 수준이라고 보면 맞을 건데 우리 5명 식구가 가면 입장료만 $220(약 250,000)이고 때를 밀라치면 $100에 팁을 적어도 $20은 줘야 하니 밥 먹고 찜질의 하이라이트인 팥빙수와 식혜 그리고 맥반석 계란까지를 섭취하려면... 1박 2일 일정의 먼 여행을 다녀올 만한 경비가 듦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그 따뜻함에 반해 안 갈 수가 없다. 멀리 럭셔리 호텔을 갈까 찜질방 가서 팥빙수 먹을까 하면 당연히 찜질방에 한 표씩을 내민다.
이렇게 비싸기도 하지만 너무 먼 거리라 망설여지는 게 사실인데 한국에 가면 정말 우리 세상이다. 저렴한 가격에 동네 어디에 가든 꼭 한두 개씩은 자리하고 있으니 공짜 같은 동네 여행(제주도 여행길에도 찜질방에 갔다)이 된다. 찜질방은 겨울에 가는 맛도 좋지만 한여름에 가는 맛도 대단히 즐겁다. 이열치열의 맛이 그 맛으로 특히 이곳에서의 때를 미는 맛을 난 이렇게 표현한다. 1시간 반 동안 천국에 다녀온 기분이라고! 그런 걸 보면 나에게 천국은 너무 쉽게 다가오는 공기이거나 빠르게 다녀오는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그러니까 내가 한 20대쯤 목욕탕에 가면 나이 드신 아주머니들이 높은 상단에 벌떡 누워있는 모습이 솔직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사람대 사람인데 한 사람은 맨몸으로 자랑스레 누워있고 한 사람은 검은 족쇄를 입은 모양으로 땀까지는 아니더라도 힘겨워 보이는 인간의 노동에 대한 연민과 안쓰러움이 어린 눈에 커 보여 누워 있는 그 아줌마들의 맨살이 그렇게 추하고 흉해 보일 수 없었다. 그래서 난 내가 살아 있는 한 내 몸을 위해 남에게 때를 밀게 하진 않으리라 혼자 맹세했었다.
그랬던 나인데 어느 날인가 생각이 바뀌었다. 때를 미는 일을 요즘엔 세신이라고 하던가? 직업의 이름이 바뀌어서 다행이긴 한데 난 좀 더 전문적인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디 클리너 같은 이름이 얼마나 좋은가? 물론 세신이라는 말이 몸을 깨끗이 한다는 풀이로 보면 같은 말이긴 한데 때밀이나 세신사보다는 듣기에도 좋고 불리기도 좋으니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한국은 한국말에 영어를 살짝살짝 믹스해서 쓰는 강력한 센스가 있지 않은가?
생각이 바뀐 이유를 말하려다 이름으로 전환되긴 했는데 일단 이름이 멋지게 바뀌면 내 생각이 바뀐 맥락과 같지 않을까 하는데 온 몸이 누구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아파 찜질로 몸을 풀려는 심사로 사우나에 갔다가 마사지를 잘하는 분이 계신다는 말에 입구에서 바로 예약을 했다. 알고 보니 때를 먼저 30분가량 민 다음 전신 마사지를 하는 세트개념이었던걸 몰랐었다. 놀라기도 했지만 예약이 된 거라 어쩔 수 없이 경멸(?) 비슷한 걸 했던 난데 내가 그곳에 덜렁 눕게 된 것이다.
일단 눈을 꼭 감고 경직된 몸을 그분에게 맡겨야 하는데 좀체 몸이 풀리지 않으니 연변 사투리로 '와이리 때가 안 나오는지 모르갔네' 하시며 시계를 흘낏 쳐다보았다. 난 순간적으로 알았다. 이분은 내가 사람이 아니고 하나의 상품이고 상품 하나가 시간이며 다음 상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지금 상품을 빠른 시간 내에 마무리해야 하는구나. 상품이 준비가 안되면 돈이 안 되는 거구나. 상품이 있어야 최선을 다할 수 있고 그 속에 인간애도, 그 너머의 인간에 대한 사랑도 들어가겠구나.
그들의 노동이 내 눈에 힘겨워 보인다고 그 일을 주지 않으면 노동을 할 수 없고 그 일이 돈을 벌 수 있는 그들의 직업인 것을 난 왜 나의 몸이 노출되고 나의 몸을 닦아주는 그들의 직업을 낮은 노동이라고만 아니 가진 자의 높낮이로만 생각했을까? 직업의 귀천을 나 스스로가 나누고 따지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말로는 직업의 높고 낮음이 어디 있고 누구에게나 똑같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나 스스로가 편견을 가지고 있었구나. 나의 몸이 경직되어 때가 잘 밀리지 않아 시계를 보는 그 순간 내 몸은 스르르 풀렸다.
내가 뭐라고, 나는 단지 그분에게 손님이고 그분은 내 몸을 깨끗이 해주는 일만 하면 그뿐인걸 단지 숙련된 노하우로 내가 그 시간에 천국을 다녀오면 그뿐인걸.. 그 뒤로는 자신 있게 내 몸을 바디 클리너에게 맡기게 되었고 내 아이들도 아직은 어려 건강을 위한 비타민은 죽어라 먹지 않아도 마사지는 온몸의 긴장된 근육을 풀어준다며 좋아한다. 건강을 지키는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되는 대목이다.
내 몸을 천국으로 이끄는 또 하나가 있다. 대학교 2학년 때 엄마와 가락동 수산시장에 가서 무거운 짐을 들다가 그만 허리가 삐끗했다. 어릴 때 목욕탕에서 순간 미끄러져 평생 아픈 기억으로 남은 내 앞니는 나의 실수로 엄마의 예지력을 거슬러 생긴 불상사이므로 어디 하소연할 수 없는 나만의 아픔이었다면 가락동 사건은 반대로 엄마가 나에게 시키고 나의 실수가 가미된 아픔임에 당당히 한 달을 누워있었고 한 달을 학교에 못 갔음에도 미안한 아픔이 아니었기에 다행인 불상사, 바로 그 젊은 20대에 허리가 나가버린 대사건이었다.
그 허리를 낫기 위한 방편으로 지압이라는 걸 받았다. 물론 아픔이 우선이었기에 누군가에게 내 몸을 맡겨 뼈를 맞추고 비틀고 하는 행위에 대한 반발은 없었지만 우락부락한 사내의 힘이 젊은 나에게 느껴져 매번 가고 싶지 않은 일과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 당시의 치료방법으로는 꽤나 효과적이었는지 거뜬히 나았고 학교에 한 달 반 동안 수업을 들어가지 못했지만 휴학 없는 학년을 마칠 수 있었다.
문제는 미국에 오고 생겼다. 1시간 이상을 서있지 못하고 주저앉아야 했다. 15년의 세월을 지탱해준 지압으로 효과를 본터라 양약 치료보다는 지압 같은 뼈를 맞추는 근본적인 치료를 받고 싶었다. 다행히 눈이 안보이시는 분이시지만 미국에서 라이센스를 따신 매직 우먼이라 내가 부르는 선생님을 만나 단 3개월 만에 완벽히 뼈를 맞추고 15년이 넘는 지금까지의 튼튼함을 선물 받았다. 희한한 건 지금도 엑스레이를 찍어보면 5번과 6번 사이의 척추가 붙어있어서 꽤나 아플거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가끔 뒷목이 아플 뿐 정작 허리는 아프지 않으니 엉터리 추측이란 걸 알지만 그때의 지압으로 나의 허리뼈를 아예 석고처럼 붙여버려 떨어져 있는 뼈가 정상이 아니고 붙어버린 내 5번 6번 뼈가 정상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된다. 하하
지압으로 단련된 몸이 드디어 사람이 아닌 기계의 힘을 빌려 그 익숙함을 연속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내 몸이 축복을 받은 셈이다. 사람이 손으로 하는 마사지를 감히 따라올 수는 없겠지만 사람의 손처럼 강약을 조절하며 구석구석 그렇게도 정교하게 할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운 일이 바로 마사지 체어다. 난 10여 년 전에 지인으로부터 일본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체어를 알게 되어 혼자만의 호사로 혼자만의 천국행에 탑승했지만 요즘엔 한국에서나 이곳에서나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50살까지 살아보니 내 몸을 지탱하는 나의 몸이 생각보다 오래 견뎌줌에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아주 작은 아기의 몸에서 뼈가 점점 자라고 키가 커짐에 뼈에 살도 붙고 근육도 붙고, 배안의 장기도 커져 키와 몸의 형태가 자리 잡는 성장을 하고 그 몸을 가지고 평생을 사용하다가 이제는 조금씩 근육도 작아지고 살의 영양도 빠져나가 푸석해지고 뼈도 아주 조금씩 줄어들고 장기에 때가 끼듯 이물질이 껴 건강한 장기의 힘이 빠져 상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모든 뼈와 근육과 살이 말라져 결국엔 쓸모없는 한 줌 재가 되어가는 나의 몸이 대견하게 생각되었다.
어차피 소멸되어 없어질 몸뚱이지만 그날까지 조금씩 사랑하며 유지해야겠다
그 몸을 그래도 오래 유지하고 붙들어 메어 살고자 남에게 의지하여 때를 밀고 지압을 받고 마사지 체어에 앉아 몸을 풀어주는 기계에 의지하며 닳아 빠지는 뼈와 근육에 힘 쏟고 있다. 어차피 작아지고 소멸될 몸뚱이지만 남들에게 특히 내 가족이 힘들지 않게 내가 내 힘으로 밥을 해 먹을 수 있고 내 힘으로 걸을 수 있는 그날까지 내 몸을 조금씩만 닳아지게 하고 조금씩만 영양이 빠져나가게 유지해야겠다. 그러려면 내 몸에 감사하고 건강한 생각과 건강한 음식과 적당한 정보로 몸을 유지하는데 힘을 내야겠다.
빨간 이태리타월 때밀기의 추억으로 시작해 마사지의 천국으로 갔다가 마사지 체어에 이르기까지 결국은 이 모두가 내 몸뚱이 하나를 위한 행위이며 앞으로의 내 삶은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이 건강한 정신 유지에 가장 큰 역할을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론에 도달된 이 글이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자극을 주고 딱 떨어지는 말이 되게 하는 내 머리가, 아직은 그런대로 자판을 두드리는 내 손이, 붙어버렸지만 잘 버텨주고 있는 내 허리뼈와 그런 내 몸이 참으로 고마운 아침이다. 맛난 떡볶이를 기다리는 느긋한 일요일.. 우리집 일상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