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 날씨여야 맞는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이상기온으로 봄비처럼 비가 살짝 오는 바람에 후드티를 입고 작은 배낭을 메고 어깨를 살짝 기울인 채 팔을 양쪽으로 휘두르며 조금은 어눌하게 똑바른 길을 가려고 애쓰며 한 발 한 발 내미는 이 똑같은 폼을 난 벌써 10년이 훌쩍 넘게 보고 있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아주 조금 어깨의 기울기가 커지긴 했지만 세월의 흐름에 비하면 근소한 차이임을 나는 안다.
항상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 앞 차로 길을 걷고 또 걷고 있는 이 사내(이하 X맨이라 칭함)의 정체를 난 알지 못한다.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친 적 없으니 알 길이 없지만 물론 X맨도 나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한다. 난 X맨과 항상 같은 거리, 같은 시공간에 있지만 X맨은 길 위를 맨몸으로 힘을 다해 내딛는 발걸음인 공간으로 마주하고 나는 차 안에서 바퀴의 굴림으로 몸은 공간에 떠 있는 상태로 마주하니 절대 X맨은 나를 알아볼 수가 없다.
어떤 날은 X맨을 정면으로 마주쳐 볼 때도 있고 X맨의 한쪽으로 기울어진 걸음의 뒤태를 유심히 바라보며 지나칠 때도 있고 무심코 운전하다 휘휘 젖는 팔에 가려 옆얼굴도 못 본 채 다른 차량에 휩쓸려 안타깝게 지나쳐버린 적도 있다. 화창한 어떤 날은 면도도 말끔히 했는지 얼굴도 화사하게 빛나는 색으로 활기차게 움직이는 햇빛만큼이나 환한 날도 있는가 하면 잔뜩 찌푸린 흐린 날은 모자에 스카프에 등에 업은 배낭도 괜스레 무거워 보여 옆으로만 가려는 발이 힘겨워 보일 때도 있다.
오늘처럼 부슬하게 비가 오는 날이면 후드티로 머리를 쓰고 터벅터벅 걷는 발과 팔이 비에 젖은 힘없는 축축하게 늘어진 젖은 걸음으로 내딛는 모습이 한없이 슬픈 모양새인 날도 있다. 비 오는 날이면 비옷으로 무장하고 걷더니 오늘은 일기예보가 틀렸나 보다.
처음 있는 일이다. 항상 마음속으로만 인사를 하고 싶었다. 뭘 어찌해보려는 건 아니었다.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차를 세운 것이다. 하마터면 반가운 얼굴이라 Hi를 외칠 뻔했지만 참기를 잘했다. 창문을 조금 내리고 백미러로 X맨의 걸음을 응시했다. 천천히 역시나 어눌하게 꼭 내차로 오는듯해 움찔했다. X맨의 시선은 앞 자기 도로만을 응시하고 힘겹지만 힘차게 걷는 듯했다.
나는 잽싸게 사진 찍을 태세를 갖추었는데 뒤돌아보며 X맨을 정면으로 대놓고 찍기는 어려웠다. 백밀러를 대고 찍으려니 줌으로 당겨지질 않고 카메라가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없는데 사진 프레임으로 담기질 않아 애가 탔다. 점점 다가오는데... 에라 모르겠다. X맨을 향해 뒤를 돌았다. 카메라와 함께... 드디어 X맨을 찍었다. 성공이다.
X맨의 힘든 걸음이 나의 위로가 됨이 서글프도록 싫었다
수염이 덥수룩했다. 매끈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던 거 같은데 10여 년의 세월이 무상했다. 처음 X맨을 봤을 때 나랑 비슷한 나이인듯하고 젊은 나이인듯해서 안쓰러웠다. 똑같은 그 긴 길을 매일 아침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걸음인지 모르지만 퇴근쯤이면 큰 도로를 여태껏 걷고 또 걷고 있는 그 한결같음이 때로는 나의 쳇바퀴도는 시간들의 허무함이 X맨의 걸음으로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힘든 걸음이 기껏 나의 허무의 위로 정도밖에 되지 않음이 서글프도록 싫었다. 왜 그의 외로운 발걸음이 나의 위로가 되는가? 하루도 쉬지 않고 산뜻하게 말끔하게 차려입고 걷는 모습을 볼 때는 내 모습도 환하게 뒤돌아 봐지고 충충하니 어두운 모습이면 내 모습도 서늘하게 뒤돌아 보게 되었다.
혼자서 하는 일은 아닌듯하다. 매일 혼자서 옷을 바꿔 입으며 계절에 맞게 날씨에 맞게 차려입을 수는 없는 일이리라. 아마 부보님의 보살핌이 있겠지. 나이가 있으니 부인이 갈아 입히는지 알 길이 없다. 단 한 번도 누구와 동행해서 걸어본 적이 없으니 물어볼 수도 없이 매일매일 상상의 나래를 편다. 있을 거야 자식도 있고 부모도 있고... 하지만 난 왜 이리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다.
아마 나처럼 이 길 위에 사는 누군가는 의문이 들겠지만 나처럼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그 모습을 통해 위로를 받거나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모두 있지는 않을 터인데 나는 길 위의 X맨이 남 같지 않다. 매일 나만 X맨을 만나지만 꼭 알아볼 거 같은 착각을 한다.
나의 세계는 심하게 내적 외적 변화무쌍한 하루하루를 거쳐 10년의 세월인데 X맨의 10년은 왠지 아무런 변화도 아무런 동요도 없는 10년일 거 같다. 그래 어차피 앞으로의 10년의 세월도 똑같이 흐를 참인데 왜 나는 매일, 매시간, 매순간 힘들고 외롭고 나를 찾는다 소리치고 불안하고 미래를 걱정하고 또 걱정하는가? 아무런 말을 할거 갖지도 않고 불만도 외로움도 아무것도 없이 길 위를 걷는 저 사내가 왜 기쁜 발걸음이라 여겨지는 날인지 모르겠다.
그저 걷고 또 걸으면 10년 아니 내가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도 시간은 흐를 참이고 또 그렇게 될 것인데 무엇이 걱정이고 무엇이 불안일까? 모두가 부질없고 모든 게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첫날 같은 날이다.
하.. X맨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드디어 나를 보았다. 알아보는가? 아니다. 이내 앞만을 응시하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난 몰래 사진을 찍은 게 죄스러워 얼른 창문을 올리고 다시 출발한다. 백미러로 보이는 X맨의 모습에서 나를 본다. 나도 길 위를 걷고 또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