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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Oct 30. 2019

야! 글이 춤춘다, 글놀이야 ~~

#47ㅣ45일 만에 45개 에세이를 쓰다 쓰러지고 삼계탕이 살렸다

글을 쓰다 정말 쓰러지는 경험을 했다.

이놈의 성격은 하나를 잡으면 끝을 봐야 하는 못된 구석이 있어서 한번 시도해봐서 해 볼 만하다 싶으면 끝까지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들이 있다. 반면에 양면성이 있어서 어떤 거에는 놓지 말아야 할 건대도 뒤도 안 돌아보고 확 놔버리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상황들을 뒤돌아보면 밑도 끝도 없이 질기도록 그냥 그냥 하는 것들이 많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한번 해 보지 뭐! 하는 마음으로 글이라는 걸 써보았다. 근데 어라? 반응이 살짝 좋다. 칠렐레 팔렐레처럼 아무 생각 없는 듯 사는 사람이 글을 쓴다? 나 자신도 모르는 나를 보고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씩 흥미로워짐은 나를 실타래 풀듯 조심조심 한 올 한 올 풀어놓으니, 내가 나를 보는 생각도 남이 나를 보는 생각도 조금씩 재미있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게 시작된 글이라는 것이 마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나의 단어만 떠오르면 단어의 말꼬리를 잡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내 머릿속을 흔들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경험들이 문장이 되어 처음과 끝이 딱 떨어지는 글들로 풀어헤쳐졌다. 기이했다. 내 머릿속에 뭐가 이리도 많았나 싶게 이 말이다 싶으면, 저 말로 댕겨 나오고, 저 말하고 싶었는데 이 말로 튀어나와 또 다른 말들로 풀어지고 헤쳐지다 점점 균형 잡힌 글들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하나를 쓰면 다른 하나가 연상되어 나무를 쓰려다 숲을 쓰고 있고, 커피를 쓰려다 커피의 종류를 분석하고,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동물의 유래를 언제 그리 섭렵하고 있었다는 듯...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글이 춤을 추듯 저장고에 쌓아 두었던  와인을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붓듯 한 번도 써보지 않았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글이라는 걸 써 내려갔다. 에세이가 뭔지도 모른채 45일 동안 45개의 주제를 가지고 글을 썼다면 (그것도 4-9 페이지 분량) 그 글이 정말 좋은 글이든 아무것도 아닌 끄적거림이든 방대한 양이 되어버렸다. 




허나,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주어야 인지상정인지라 비즈니스 하면서 집안일 하면서 가족 챙기면서 짜투리 시간에 글을 그야말로 써댔으니, 먹는 거에 그리 중요한 하루 일과가 아니었기에 먹는 것보다는 글 쓰는 게 재미있고 자는 것보다도 빨리 내 머릿속을 비워야 하므로 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쓰기에만 열중했으니, 내 몸이 쓰러지지 않고 어찌 견딜 수가 있을까? 이 외수 작가는 자기의 방을 감옥처럼 창살을 만들어 아내가 사식을 넣어주며 글쓰기에만 전념했다 하고 조 정래 작가는 가부좌를 틀고 며칠을 꼼짝도 안 하고 글만 쓰다 그대로 쓰러졌다는데 모두 행복한 작가님들 이야기다.


내가 작가도 아니고 그저 글쓰기에 정신이 나간 초짜에게 그런 호사는 있을 수도 없고 일과 가정을 병행해야 하는 마당에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줄이지 않으면 별도리가 있겠는가? 솔직히 누가 그렇게 미친 듯이 쓰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니고 단 $1도 안 나오는 일이니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소리없이 흐느작 거릴때 나의 동료 언니가 삼계탕을 가지고 왔다. 그때에 그 삼계탕은 나를 살리는 구세주 같았다. 코앞에 밥이든, 약이든, 하다못해 물을 가져다주어도 잠시 먹을까 말까를 생각하는 나임을 어찌 알고 한 끼에 하나씩 먹을 수 있는 양을 포장해 지퍼락에 넣고 또 첫끼는 바로 먹을 수 있도록 보온 도시락통에 담아 스푼까지 얹어 내 코앞에 디미는데 어찌 안 먹을 수 있을까? 거의 사경(?)을 헤맸었는데 삼계탕을 다 먹고 내가 다시 살아났음을 언니는 알까?

   


누구나 살면서 어느 때, 어느 순간에 누군가와 혹은 무엇인가와 나랑 딱 맞아떨어지는 경험들이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내가 거의 하얗게 질려 실신할 정도로 맥이 빠져 있을 때 보약 같은 삼계탕을 줄 수도 있고, 방금처럼 죽은 사람을 친구와 이야기하는데 그 얼굴이 구름으로 빚어져 순간 포착처럼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전송하는 그 순간들... 그 찰나를 동시성이라는 명명 아래 동시에 생각하고 동시에 말하는 동시다발적인 사건 사고를 경험하며 살고 있다. 

    '잠자리를 좋아해' 하는 순간 내 눈앞에 잠자리가 휘휘 날아가는 동시성

어릴 때 생각나는가?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똑같은 말을 동시에 하면, ‘찌찌봉’하며 서로에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옆구리를 쿡 찌르던 기억들... 그 순간에 어찌 그리 똑같은 말, 똑같은 행동, 똑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새를 좋아하고 물고기를 좋아하고 네 개의 날개에 똑같이 그려놓은 듯한 투명한 종잇장 같은 ‘잠자리를 좋아해’하는 그 순간 내 앞에 날개 짓는 잠자리가 휘휘 날아가는 동시성.., 커피 한잔이 그리운데 커피 한잔을 슬며시 놓아주고 가는 고마운 사람... 잠이 쉬이 오는 않는 날 울리는 전화 한 통화... 이런 걸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난 그런 동시성을 좋아한다. 그래서 난 짝사랑도 싫다. 여자든 남자든 동시가 아니니까.

  

그래서 그런지 난 미리 계획된 일들이 싫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야 한다는 그 순간부터 난 머리가 아프다. 아무 일 없다가도 그날이 되면 비가 오고 스케줄이 없다가도 생기고 그 약속 때문에 다른 일을 며칠씩 못하는듯한 핑계도 만들게 되고, 그것 때문에 마음에 담겨있는 뭉쳐진 보따리를 하나 얹고 있는 것처럼 풀어지지 않고 그 일이 끝나야 비로소 보따리가 풀어져 소진되는 편안함을 알기에, 난 그냥 날이 좋으면 어딘가 훌쩍 가고 싶은 순간에 시간적 여유가 되는 누군가와 같이 떠나게 되고, 아니면 혼자여도 되는 그런 자유로움이 좋다.


그래서 꼭 예약해야 하는 이 사회에서 나 같은 사람은 살기가 참 어렵다. 머리도 꼭 예약해야 하니 혼자 잘라 버리고, 병원 예약도 꼭 해야 하니 웬만하면 마트에서 약 사서 먹든지 참아 버리고, 시간 개념이 별로 없으니 시간 맞춰 샾을 오픈하는 일도 쉽지 않은 게으른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런 내가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며 나의 갑작스러운 전화로 심통을 내는 내 지인은 이제는 또 심심하구나? 하며 시간을 자유롭게 쓰는 나를 이해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 있어서 인간의 그 순간순간을 미리 정해 놓은 거라 하고,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DNA가 뇌에 바코드처럼 입력되어 정해진 데로 살아가는 거라고도 한다. 또 우주의 법칙은 우리가 우연히 박수 한 번을 치는 그 순간도 모두 미리 정해져 있다고도 한다. 순간순간이 이미 정해져 있는 시간의 나열이라면,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생각을 나열하는 이 순간과 또 다른 생각의 순서와 다음 순간의 일도 미리 정해진 규칙대로 흘러간다면 인간사 걱정할 게 없구나! 참으로 간단한 법칙이구나!  하루하루의 인생을 행복의 순간으로 즐기며 걱정 없이 살아도 되겠구나 싶다. 

    

그렇지만, 그 순간의 안타까움은 참으로 많다. 천재지변으로 수만 명의 목숨이 개미처럼 바닷물에 쓸려가고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걸 잃어버리기도 하고, 그 자리에 가지 말아야 하는 곳에 이상하게 가게 되어 변을 당하고, 스케줄이 꼬여 가야 되는 곳인데도 가지 못해 오히려 큰 사고를 비껴가는 일도 있다. 모든 게 찰나에, 순간에 일어나는 그때.... 그때를 피할 수 있는 것도, 일부러 그때를 만들 수도 없는 게 인간사다. 왜 하필 내 눈앞에 파리가 보여 인간에게 순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지, 왜 하필 눈 꽃송이에 쌓여 한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무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지 그런 모든 것이 신의 영역이라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시간을 되돌려 보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에게는 참으로 쉬운 일이 누구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라니...

  

왜 그 찰나에 일기장을 봐서 평생 응어리진 채 아픈 글귀에 매달려 살아가야 하고, 왜 하필 작은 쪽지가 내 눈앞에 있어 속임수 당함을 알아버려 뒤를 돌아봐야 하는 것이 되며, 왜 누구는 그 순간에 들은 한마디의 말이 비수가 되어 헤어짐의 시작을 직감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바닷물의 밀물과 썰물로 내 발자국이 사라져야 나의 짐 진 무거움을 내려놓을 수 있는데, 그 순간 때린 사람은 잊었는데 맞은 사람은 발은 뻗고 살지언정 평생 가슴에 든 피멍은 왜 안고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피멍도 한 번에 쓸려가지 못한 발자국이 두세 번 쓸리면 다시 새로운 깨끗한 모래로 덮이듯 엷어지고 지워져 나의 고통이 희석되고 있는 건 나에게는 글의 힘이다.

   순간의 생각들이 스치는 글들의 향연

글이 풀어헤쳐져 이리저리 나부끼다 엉켜버린 실타래를 한 가닥 한 가닥 집중해서 풀다 보면 가지런한 실타래가 되듯 글들이 자리를 잡아간다. 마음이 정리되어 분명해진다. 분명 삼계탕을 먹으며 어떻게 이렇게 내가 필요할 때 이걸 주었을까?라는 마음으로 시작된 글이 다른 시각의 찰나를 이야기하게 되고 참 삼계탕을 쓰려고 했지? 하다가 또 한 순간의 생각에 사로잡혀 DNA까지 나오는 것도 모두 순간의 생각들이 스치는 글들의 향연이다. 글이란 참으로 신비한 힘을 가졌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삼계탕이다.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감동은 그냥 주고받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늘 그 사람을 생각하고 관심 있는 순간에 내밀 수 있는 선물 같은 카드인데, 그 선물이 받는 사람에게 딱 떨어지는 감동의 순간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내가 정말 허무함에 달랑일 때 나를 조용히 잡아주는 그 손길이, 절대 뜨지 않은 바닷속의 큰 바윗돌처럼 절대 믿음이라는 큰 선물이 되었다. 아주 사소한 일들이 가장 큰 선물이 되는 그 찰나는 쉽게 오지 않는다. 난 그런 순간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그런 순간을 지배하는 건 신의 영역임을 아니까...

   

나에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런 사람이 내게 있어 행복하듯 글이 있어 참 행복한 맑은 새벽이다. 글이 춤을 추는 글놀이를 한번 해 볼 참이다. 찰나가 모여 인생이라는 긴 실타래가 됨을 아는데, 실타래가 얽히고 풀어가며 사는 게 인생인데  ... 자자! 뒤죽박죽인 내 생각아! 생각의 순간을 접자. 그냥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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