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랜Jina Oct 22. 2019

외로운 '팔랑귀'

에피소드 #18 

얼마 전에 한국 지인으로부터 ‘머니 패턴’이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개인의 심리 테스트를 통해 돈의 법칙을 이해하는 새로운 유형의 책이다테스트 결과 난 외로운 팔랑귀형으로 나왔다대부분 억울한 질러형이거나 경쟁심의 쟁취형인데 반해나는 팔랑귀형이라는데 그것도 외롭다는 단어가 나의 과거부터의 기억을 흔들었다.

    

팔랑귀라는 말은 나 스스로를 표현할 때 잘 쓰는 단어이다똑딱 3초라는 별명답게 무슨 일을 결정할 때에 그냥 저지르고 그냥 한다누가 이야기하면 말하는 그대로를 한 점 의심 없이 믿고할 수 있는 일이면 할 수 있을 거라 나를 믿고한다고 결정하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잘하면 좋은 일이 되는 거고 못하면 바로 포기하는데 후회도 하지 않으니 팔랑귀처럼 귀가 얇다는 말이 딱 맞다나한테는...

          


그 처음은 이랬다피아노의 쓰라린 맛을 본 후 3년의 세월은 나의 정체기이다그 3년이 고등학교 생활을 통 틀은 시간이니 고등학교 때의 기억은추억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만큼 통통 튀었을 성격이 물아래 침전된 비이커의 모래알처럼 가라앉은 상태로 누군가 흔들어줄 때를 기다리는 듯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재수를 하며 내가 꿈꾼 예지몽을 빌미로 엄마에게만 급제안을 했다아빠에겐 일급비밀로 하기로 하고 딱 9개월만 미술학원에 보내 달라고 그것도 미술의 일번지 홍대 정문 앞 그 당시 제일 잘 나가는 학원에 보내주면 홍대나 이대 정도는 갈 수 있다면서 겁도 없이 엄마를 설득했다.

  

꿈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다른 친구들은 어릴 적부터 미술교육을 받아 이미 대학 수준의 실력을 갖춘 비밀 병사들인 반면난 쌩 초짜였으니 불쌍히 여기는 몇몇 친구들이 자기들의 경쟁자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다선 긋기부터 시작해서 소묘의 시작인 둥근 원의 형태나 삼각뿔의 그림자 표현법등 기본만을 살짝 배운 뒤에 대입시험까지 시간이 없으니 바로 그 유명한 아그리파를 그려보라는데 그만 각이 확실하게 잡힌 로봇 태권브이를 닮은 '로봇 아그리파' 탄생시켜 웃음을 자아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학원에서 오전 수업을 듣고 오후부턴 낡은 이젤에 앉아 그 많은 하얗고 멋지게 생긴 역사의 인물 석고상들을 보노라면 하얀 도화지에 검은 석탄 연필로 그들의 자태가 하나의 점에서부터 쓱쓱 연필 가는 데로 윤곽이 나오고 그 명암 번짐의 황홀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나만의 도화지에서 그들을 멋지게 재탄생시키고 싶었다나의 침전된 모래알이 도화지에 흔들리며 번지고 있었던 때였다.

 

  비이커를 제대로 흔들었다.

 

정말 9개월 만에 홍대나 이대는 아니더라도 내가 원하는 그림을 원 없이 그릴 수 있는 미대에 합격했다한 번에 결정해서 단기간의 집중 노력으로 한방에 이루어낸 최초의 경험이 내 안에 잠재되어 지금 이 나이까지 나의 행동 패턴으로 고착되었고 그 뒤로도 팔랑귀의 행진이 계속되었다.

 

결혼을 하면서 회사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고 프리랜서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일단 내 전공을 살려 인테리어에 관한 모든 걸 해줄 수 있다는 당찬 포부를 적은 전단지를 만들어 아파트마다 돌렸다현관에 필요한 신발장 주문이 처음으로 들어왔다디자인과 실용성이 가미된 신발장을 만들어 주고 5만 원이 남았다그래 바로 이거야그 뒤로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를 만들고 안산 중앙역에 배 모양의 4층 카페를 만드는 데까지 두 번째의 귀가 팔랑대는 결과물이었다.

 

미국에 와서 나의 놀이터에서 놀이 친구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을 무색하게 나는 내 머리를 깎는다. 한두 번 내 맘대로내가 원하는 대로 조금씩 잘라보다가 전체를 깎을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를 즈음이었다내가 내 머리를 깎듯 놀이 친구들에게 머리를 깎아주면 얼마나 좋을까그냥 한순간 팔랑귀가 흔들렸을 뿐인데 버지니아에 있는 1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는 미용전문학교에 거금의 돈을 주고 등록을 해버렸다.


수개월에 걸친 나의 행보는 거의 사투를 건 싸움이었다직장도 다녀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세 아이도 돌봐야 하는 벅찬 일이었지만 누가 등 떠밀어 시킨 일도 아니고 꼭 필요한 일도 아닌 그냥 결정했으니 밀고 나가는 성격 탓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

   

초집중해야 했다강의 들을 시간이 없으니 전문 의학 서적과 맞먹는 영어 원서를 거의 독학해야 했고 긴 머리가 민머리가 될 때까지 해야 하는 마네킹 머리를 쉴 새 없이 자르고 또 잘랐다학교 수업 1500시간을 채워야 시험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워지고 필기시험을 보았다학원에선 처음 보는 점수라며 놀랐지만필기는 무조건 외우면 되는 거니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실기시험이 문제였다. 5개 과목으로 나누어진 실기시험으로 손이 너무 떨려 정말 있을 수 없는 실수를 했지만다행히 개별 점수가 아닌 종합점수제여서 턱걸이로 간신히 한 번에 합격했다헤어와 네일얼굴 마사지까지 세 가지 모두를 할 수 있는 전문 Cosmetology가 된 것이다.

   

인체의 뼈구조에서부터 각종 염색체며 몸안의 세균까지 의학서적을 방불케하는 헤어와 네일과 얼굴 마사지 라이센스를 위한 책


미국에서 미국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다는 거밖에 아무 쓸모없는 이 카드 한 장을 위해 수개월의 시간을 가족의 희생과 함께 얻었지만실은 난 남의 머리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내 두 딸들의 머리 하나도 쫑쫑 야무지게 못 매어 핀잔을 받았는데하물며 모르는 사람의 머리를 어떻게 만질 것인가더 나이가 들어 미용실의 원장으로 진두지휘만 할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남들은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히 알고 그 시간을 즐기기를 원하지만 난 혼자 있는 시간이 불안하고 힘들다오죽하면 남편은 자기가 죽은 후에 엄마를 재혼시키라는 유서를 써놓았다는 말을 할까혼자 있는 잠시의 시간이 불안해서 이것저것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 것이다어딘가에 집중하는 시간이 혼자 아무것도 안 하는 외로운 불안함보다 낫다 겉으로 보는 나는 뭐든 열심히 하는 열정이 많은 사람으로 인식하지만 '외로워서 펄렁이는 팔랑귀'라는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팔랑귀가 외롭다는 걸 어찌 알았을까? 그 작가는..

 

그래서 난 글을 쓴다누군가가 글을 한번 써보는 게 어떠냐는 말을 덥석 물었다팔랑귀가 가만히 넘기지 않을 터이다미술학원에 다니게 해 준 엄마에게 평생을 고마워하며 살게 되었듯이 고생만 하고 손에 쥐고만 있는 헤어 라이선스가 어떻게 쓰일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글을 한번 써보라는 이에게 남은 일생동안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집중하는 일을 선사받았음을 정말 지금은 알 수 없다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의 눈 꽃송이도 바람이 불어 흔들리든비에 젖든 정확한 그 자리에 내려앉는다는데 내 인생이 어디로 정확히 내려앉을지는 신의 법칙만이 알 것이다오늘도 난 내 비이커를 열심히 흔들어 댈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이게 말이 돼? 한국 의료보험은 미쳤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