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소프라노 '겸' 지휘자 바바라 하니건
"한 우물만 파라"
이 옛 말은 이제 정말 '옛 말'이다.
동료 중에 음악 코치이자 지휘자이며, 동시에 카운터테너이면서 쳄발리스트인 이가 있다. 물론 그의 영역은 바로크부터 고전주의까지 한정된 사조에 걸쳐 있지만, 아무튼 다방면에 걸친 그의 다재다능에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위에 언급한 모든 직종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최소한 유럽 음악계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재능이 다방면에 있다면 그 중 가장 경쟁력 있는 하나를 위해 나머지를 올인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능력만 된다면 얼마든지 인정해주고 지원해주는 풍토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다재다능함이 그 자체로 셀링 포인트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비단 음악계 뿐인가? 우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무수한 천재들을 알고 있다. 다빈치 경우는 역대급 천재로 방대한 영역에 걸쳐 그 천재성을 뽐냈지만, 나는 오늘은 미켈란젤로를 떠올리고 싶다. 스스로 조각가라고 생각했지만 불멸의 명작 '천지창조'를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남겨놓은 미켈란젤로. 어제 런던 바비칸센터에서 본 LSO(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며 미켈란젤로가 떠올랐다.
런던음악순례 2일째, 복합문화예술공간인 바비칸 센터를 방문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상주하는 곳이기도 한 바비칸 홀은 가장 저렴한 좌석에서도 훌륭한 음향과 뷰(view) 가 가능해서 놀랐다. 다른 인상적인 점은 정말 편안한 복장으로 공연을 관람하러 온 런던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LSO가 시민들과 격식없이 매우 친밀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제 프로그램은 솔직히 말해서 벨칸토 오페라를 가장 선호하는 나에게는, 평소 같으면 절대로 내 돈 주고 가지 않을 공연이었음을 고백한다. 클래식 음악 종사자인 나조차도 거리를 두고 어려워하는 현대음악이었기 때문이다. 리게티, 베르크, 거쉬윈(그래도 거쉬윈은 재즈리듬을 많이 차용해서 어렵지 않다.) 그래도 현대음악계에서는 전설같은 존재들이다, 나도 그들의 음악을 감상하고 연주해 본 경험이 있을 정도니. 그리고 그 어설픈 경험이 더 이상의 접근을 막았다. "맞아, 그 때 악보 보느라 힘들고 연주자도 청중도 같이 그 시간을 그저 감내해냈었지". 그리고 어제 음악회를 본 후 그 동안의 내 닫힌 태도를 반성했다. 가끔 사람은 안하던 짓도 해야 한다. 변화가 없으면 발전도 없는 법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제 연주는 대박이었다. 그저 바비칸 홀이라는 곳을 한 번 발이나 딛어보자 하며 아무 기대없이 예약한 이 연주 하나로 이번 런던행은 이미 충분히 가치가 생겼다. 이 연주를 보는 동안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청중들도, 심지어는 LSO 스스로도 정말 'enjoy'한 것 같았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사람은 바로 이 날 LSO를 이끈 지휘자 바바라 하니건(Barbara Hannigan: 혹시 이름 발음이 틀렸다면 지적해주시길 바람)과, 솔리스트로서도 맹활약한 소프라노 바바라 하니건이었다.
지휘계가 더이상 금녀의 영역이 아니게 된 건 오래전 이야기지만, 솔직히 말해서 수적으로 여전히 남성 지휘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게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여성 지휘자들이 중성적인 스타일을 가지곤 한다. 음악이 아닌, 외모에 관한 이야기다. 성적 차별이 아니라 외모나 패션에 있어서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구분은 여전히 유효하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는 지휘자는 흔하지 않다. (드물긴 하지만 그런 용기있는 지휘자가 있기는 하다......) 연주회에서 솔리스트는 가장 눈에 띄고 화려한 외모를 가져야 하고, 지휘자는 외양이 아닌, 음악적인 아우라와 카리스마로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불문율이지 않는가?그렇다면 그 솔리스트와 지휘자가 동일 인물이라면? 게다가 여성이라면?
이제까지 상상도 못했던 설정이었다. 지휘자가 노래를 하면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고? 이건 남성, 여성 젠더 구분을 떠나서 그 자체로 센세이셔널한 일이다. 그런데 그 연주 작품이 까다롭고 어려운 현대음악이라니! 그것을 아름다운 금발여인이 만들어낸다. 마치 금발미녀에 대한 세상의 편견(이라 쓰고 기대라 읽는다. 그래야 그나마 세상은 공평한 거라고 자위할 수 있지 않은가...)을 3단 날라차기로 부숴버린 여인. 지휘도 노래도 끝내주게 잘한 소프라노 겸 지휘자 바바라 하니건이었다.
'소프라노'를 '지휘자'보다 먼저 언급한 것은 그녀가 현대 음악계에서는 이미 기라성같은 업적을 쌓은 거장 소프라노이기 때문이다. 이 캐나다 출신 소프라노는 이미 사이먼 래틀, 안토니오 파파노, 키릴 페트렌코 같은 거장들과 작업했고, 유럽의 유수의 극장과 페스티벌에서 현대 오페라 작품들을 공연했으며, 그녀의 솔로 음반은 2018년에 그래미 상을 받기도 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래 그녀의 동영상을 보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듯.
현대 음악이 이렇게 파격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 나는 이 세계에 너무 무관심했고, 몰이해했구나 라는 각성이 몰려왔다. 클래식 음악을 너무 엄숙하고 형식적이라고 생각되고, '그들만의 리그'로 여겨지는 것을 깨기 위해 나 나름대로는 팟캐스트도 하면서 나만의 '클래식의 대중화, 관객의 클래식화'를 도모하고 있었는데, 다른 차원의 세계를 접하게 되니, 눈이 번쩍 뜨이고, 신선한 자극으로 충만해서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프로그램의 처음은 리게티로 열었는데, 리게티는 이미 현대음악 분야에는 고전에 해당하는 작곡가이다. 헝가리 음악 특유의 리듬이 가미된 이 작품은 처음 들어보는데도 전혀 거부감이 없었고 솔로 바이올린의 신들린 연주가 압권이었다. 그 뒤를 잇는 하이든 작품은 소위 '안전빵'으로 집어넣은 것 같은데, 나에게는 nothing special이었다.
2부는 알반 베르크의 룰루 모음곡으로 다시 문을 열었고, 문제작 오페라였던 룰루에서 나오는 관능적인 음향이 홀을 가득 채웠다. 총 5개 섹션으로 나뉘는데, 세번째 룰루의 노래에서 지휘자 하니건은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지휘 사인을 사방으로 보내면서 그 어려운 곡을 불러내는 모습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한 볼거리였다. 베르크 작품이 워낙 편성이 크고, 특히 관악기 쪽이 많이 사용되서 가수에게도 상당한 볼륨이 요구되는데, 소프라노로서 하니건에게 그 점은 좀 아쉬웠다. 가만히 서서 불러도 어려운 그 곡을 지휘하면서 부르니, 뭐라고 하는지는 잘 안들리지만, 아무튼 그 광경 자체는 서커스를 보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어차피 어제 런던 관객 중에 독일어 텍스트 자체에 집착할 사람은 거의 없었을테니...
이 날 연주의 대미를 장식한 거쉬윈의 Girl Crazy 모음곡은 거쉬윈의 곡들을 빌 엘리엇이라는 작곡가가 편곡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팬서비스 같은 작품이었는데, 앞서 언급핬듯이 미국 작곡가 거쉬윈은 재즈를 많이 차용해서 대중성이 상당히 높다. 누가 들어도 재미있고 신난다. 하나건도 마이크를 착용하고 나와서 뮤지컬 음악을 듣는 것 같았다. 작품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하니건이 "I got rhythm, I got music"이라고 부를 때는 정말 그녀가 이날 밤 모든 리듬과 음악을 접수한 것 같아서 여왕의 카리스마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이렇게 나를 압도할 때 정말 노래 잘한다고 이야기한다.
멋진 경험이었다.
그녀의 파격적인 퍼포먼스가 또 하나의 현대음악의 정형화를 만든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단 그녀는 작곡가의 의도를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 이런 시도 자체는 충분히 가치가 있고, 또 제 2의 제 3의 하니건이 나와서 nothing special more가 되버리면, 누군가 또 특출난 이가 등장해서 판도를 바꿀테니, 우린 그저 이 모든 것을 enjoy하자. 미리 마음의 문을 닫지는 말고.
서두에 미켈란젤로를 감히 언급했는데, 하니건이 소프라노로서도 지휘자로서도 두 마리 토끼를 계속 잘 잡길 바란다. 그녀는 현재 스웨덴 고텐부르크 심포니의 객원 지위자로 위촉돼 있는 상태이다. 그녀같은 하이 소프라노의 수명은 짧은 편인데, 그걸 본인도 다 계산하고 있지 않을까? 앞으로는 지휘자로서 활동 비중을 점점 늘려갈 것으로 살짝 예측해 본다. 전세계에 이런 음악회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을테니, 앞길은 매우 창창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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