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지옥의 오르페우스>, <그래핀 마리차>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벌써 작년이라 일컬어야 하는 지난 연말에 오페렛타 세 작품을 관람했다.
오페렛타는 오페라의 대중적인 버전이랄까. 대사를 노래하는 레치타티보 대신 뮤지컬처럼 말을 한다. 극장에 따라서 마이크로 처리하기도 하고 생목으로 대사를 치기도 한다. <지옥의 오르페우스> 같은 경우가 생목이었는데, 극장이 아담한 크기라서 방심했는지, 몇몇 배우들의 대사는 잘 안 들렸다.
비스바덴 <그래핀 마리차>
그래핀은 백작부인이라는 뜻으로, 돈 많고 예쁘기까지 한 (다만 성깔은 좀...) 마리차가 진정한 사랑을 찾는 스토리다. 대부분의 오페렛타가 그렇듯이 매우 통속적인 진행을 보여준다. 가난한 백작 타씰로가 여동생을 보살피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백작부인의 저택 관리인으로 위장 취업한다. 백작부인은 이 저택 말고도 다른 재산이 많으니 그동안 한 번도 얼굴 볼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백작부인이 오늘 밤 당도해서 결혼을 발표하고 파티를 연다는 통보를 받는다. 사실은 마리차가 넘쳐나는 구혼자들을 떼어내기 위해 헝가리에서 가장 흔하디 흔한 이름이라는 쭈판 후작이라는 사람과 결혼한다고 거짓 발표를 할 셈이다. (우리나라의 김진사쯤 되려나..)
하지만 진짜 그 이름을 가진 귀족이 파티에 나타난다... "대체 나랑 결혼한다는 여자가 누군지 궁금해서 와봤소" 곤란해진 마리차. 그 와중에 자꾸 눈이 가고 마음이 가는 자신의 관리인 타씰로. 그리고 파티에 손님 중 한 명으로 등장한 타씰로의 여동생 리자. 그녀는 자신의 오빠가 자기 때문에 그 생고생을 하는 줄 모른다. 쭈판 후작은 그런 순진무구하다 못해 백치미를 살짝 풍기는 리자에게 반한다. 두 남매가 정원에서 둘이서만 대화하는 걸 사람들이 오해해서 마리차에게 일러바치고, 그걸 오해한 마리차는 한 성깔 하는 성격답게, 타씰로에게 퍼붓는다. 위기의 두 사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결국은 오해가 풀린다. 게다가 타씰로는 부유한 친척의 재산까지 유산으로 상속받게 돼서 이제 마리차에게 꿀리지 않게 됐다. 모두 다 해피 엔딩!
지금이야 너무나 뻔하지만 당시에는 아름다운 음악과 멋진 춤으로 관객들이 빠져들었을 것 같다. 연출은 무난했고 결코 모험을 하지 않았다. 3막에 등장한 독일 스타 데지레 닉(코미디와 오페렛타를 넘나들고 TV 출연도 엄청 많이 했다 함)은 대놓고 웃기기 위해 등장했으나, 독일 유머 코드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 장면이 너무나 길었다.
오페렛타에는 노래는 안 하고 대사만 치는 역이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박쥐>의 감옥 간수 프로쉬. 예전에 다름슈타트 <박쥐>를 보러 갔다가 프로쉬가 헤센 사투리로 한참을 스탠딩 코미디를 하는 바람에, 나는 하나도 이해 못하고 박장대소하는 관객 사이에서 매우 뻘쭘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 그 뻘쭘함 이번에 비스바덴에서 다시 한번.... 아아.... 남들 웃을 때 혼자 못 웃는 비극이란....)
오페렛타는 은근히 부르기 쉽지 않다. 독일어의 리듬을 타면서 칼만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이겨내기란, 개인적으로는 바그너 못지않은 도전이라고 여겨진다. 아무튼 그 날 따라 주역 가수들도 좀 버겁게 노래하는 면도 없잖아 있었는데, 가수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칼만은 다른 오페렛타 작곡가들의 곡보다 유독 가수가 힘들어하는 음역대를 많이 건드리는 것 같다. (예전에 마리차의 아리아 공부해본 적 있었는데... 정말 쉽지 않았음)
아무튼 궁금했던 칼만의 오페레타를 처음 경험한 것으로 만족.
묀헨글라드바흐, <지옥의 오르페우스>
NRW주에 갈 일이 있어서 간 김에 그쪽에서 공연도 보자 해서 검색했더니, 독일 서쪽 국경에 거의 다다른 작은 도시 묀헨글라드바흐에서 <지옥의 오르페우스>를 한다는 반가운 소식. 쾰른에서 공부할 때 그 인근 도시여서 이름을 자주 들었지만 한 번도 방문한 적은 없었다.
쟈크 오펜바흐는 <호프만의 이야기>가 대표작이지만 사실 엄청난 양의 오페렛타를 쓴 작곡가이기도 하다. 독일 출신이면서도 프랑스에서 오페렛타 작곡가로 자리 잡았던 오펜바흐의 가장 인기 있는 오페렛타 중 하나가 바로 이 <지옥의 오르페우스>다. 신화 속의 숭고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이야기를 사정없이 비틀어 버린다. 이 오페렛타는 몰라도 여기 나오는 캉캉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이제까지 본 중 가장 화끈한 캉캉을 선사한 무용단원들께 깊은 감사)
서로 상처만 주는 결혼 생활에 지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지옥의 신 플루톤이 에우리디체를 납치하자, 오르페오는 되려 기뻐하는데, '여론'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신들의 세계로 가서 에우리디체를 구해와야 한다. (여론'Public Opinion'이라는 이름을 가진 역할이다.)
오르페오를 다룬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이다. 여기 나오는 메인 아리아 "에우리디체 없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Che farò senza Euridice)"인데 이 아리아를 오펜바흐는 사정없이 패러디해서 조롱(!)을 서슴지 않는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자인 글룩이 이걸 안보고 죽었기에 망정이지, 봤으면 뒷목을 잡았을 듯..ㅎㅎㅎ
오펜바흐의 풍자 정신을 이어받아 연출가는 '여론'역을 독일 수상 메르켈을 연상시키는 외모와 제스처로 설정했고, 신들의 회의는 유럽연합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에 독일 통일과 무너지는 베를린 장벽을 차용한 연출가의 아이디어도 신선했다.
참, 그리고 머큐리 역으로 나온 한국 가수 제임스 박 님이 참 반가웠다. 저 딕션은 절대로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의 딕션이 아니다 싶었는데, 프로필 읽어보니 역시나...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에 독일로 이주한 분이었다. 앞으로의 활동도 기대합니다~~!
도이체오퍼 베를린 <박쥐>
작년 연말, 12월 31일에 오페라 덕후로서는 꽤나 호사스러운 송년회를 가졌다. 친구를 잘 둔 덕에 도이체오퍼 베를린에서 연말에 가장 사랑받는 공연 중 하나인 오페렛타 <박쥐>를 관람한 것.
연출은 왕년의 스타 테너에서 빠르게 스타 연출가로 전업한 재주 많은 롤란도 비야손이 맡았다. (이번에는 여름 음악축제 감독까지 맡았더라.... 정말 리스펙트!!) 안 그래도 그의 연출작이 궁금하던 차에 좋은 기회였다. 이번 <박쥐> 프로덕션에서 그의 연출은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보였고, 베를린 답게 수준급 가수들의 가창력과 연기력이 뒷받침돼서 대박까지는 아니어도 평타 이상이었다. 대신 3막의 감옥이 미래의 우주선이고 간수 프로쉬를 사이보그로 설정한 것은 신선한 아이디어였지만, 사실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박쥐> 프로덕션을 매번 볼 때마다 어정쩡해서 아쉬웠던 바지 역할, 오를로프스키 공작의 캐릭터가 이번에는 뚜렷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화려한 아리아를 가진 로잘린데와 아델레에게 밀려 항상 존재감이 약했던 실제 주인공 아이젠슈타인이 이번 프로덕션에서는 돋보여서 참 좋았다.
지휘를 맡은 슈테판 칠리아스는 내가 마인츠에서 데뷔할 때 음악코치 중 한 명이었는데, 그때도 진중하고 열정적이었던 그가 어느새 베를린에서 이렇게 큰 지휘자가 됐다니 감개무량했다. '그때 더 친하게 지냈어야 했다....' 는 후회와 비애를 잠시 느꼈지만, '뭐 이 바닥에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 내가 잘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작년 한 해를 마무리했던 것 같다. 지인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슈테판의 지휘가 참 좋았다. 앞으로 더 크게 성장할 것이 자명해서 계속 지켜보고 응원할 요량이다.
이상 밀린 오페렛타 리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