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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Nov 19. 2019

뚱뚱한 오페라 가수는 안 되나요?

만하임, 베르디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 장면 1

여기는 만하임 국립 극장. 가수들 초주검 만들기로 유명한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가 상연 중이다. 가수들도 오케스트라도 선방하고 있다. 연출도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의 취지는 공감한다. 자, 드디어 오늘의 프리마 돈나인 '레오노라'가 등장해서 그 까다로운 첫 번째 아리아를 부르러 나오는 타이밍인데.....


아니.... 그런데.... 그녀의 풍채가 남다르다. 물론 베르디나 바그너 같은 작곡가는 풍성한 성량과 특별한 테크닉이 필요하니까 남녀 불문, 파트를 가리지 않고 소리도 풍성하시고, 체구도 그에 맞춰 풍성하신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번 레오노라는 그 풍성하신 케이스 중에서도 톱클래스이다. 오케이, 노래만 잘하면 되지... 그런데 그녀의 실수인지 연출자의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아리아 부르는 내내 그녀는 신발을 한쪽만 신고 있다. 가뜩이나 얇은 슬립만 입고 있어서 그녀의 풍채를 더 드러내는 판에 슬립 아래로 드러난 하체와 애처롭게 그녀를 지탱하는 한쪽 맨발에 자꾸 눈이 간다. 도저히 신경이 쓰여서 노래가 감상이 안된다. 저 어려운 아리아를 저렇게 쉽게 부르는데.... 그런 와중에 나란 인간은 이렇게 외모지상주의에 절어있는 사람이었던 것인가...라는 자학과 자기반성. 나는 왜!! 불편함을 느끼는 건데?? 그래서 더 불편했다.


# 장면 2

얼마 전 디즈니 실사 영화 '인어공주'의 주인공이 배역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인터넷 상에서 논란이 많았다. 이 또한 그 작품을 사랑하는 팬들과 캐스팅을 해야 하는 제작사간에 일어난 해프닝이겠지만, 사실 이런 논란은 원작이 유명할수록 더 흔하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520599


인터넷 누리꾼들 사이에서 쓰는 '싱크로율'이라는 단어가 있다. 원작의 캐릭터와 얼마나 흡사한지 가늠하는 단어이다. '싱크로율이 높다'면 그것은 원작을 찢고 바로 나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인 것이다. 싱크로율과 캐스팅 논란은 원작을 가공해서 각색할 때, 피할 수 없는 과정일 것이다.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에 나오는 레오노라는 이런 캐릭터다: 일단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두 형제(서로가 원수지만 알고 보면 형제라는...) 만리코와 루나 백작이 너무나 사랑하는 여자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만리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18세기 오페라 (남성) 작곡가들이 퍽 좋아했던 그런 비련의 여주인공이다.


내가 공연을 본 날, 레오노라를 노래한 소프라노는 극장 소속 가수는 아니고 게스트로 왔다. 그런데, 극장 홈페이지에 있는 캐스팅 표에는 그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당일 공연장에서 구매한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이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다. 아마 예상컨데, 대타로 왔다던지, 대타로 왔다가 반응이 좋아서 몇 번의 공연을 더 줬다던지.. 아무튼 무대 비하인드 스토리야 모르지만 중요한 건 내가 본 공연에 그녀가 레오노라를 불렀다는 것이다.


인 캐스팅이 아닐 경우, 무대 연습도 제대로 못하고 공연에 올라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녀도 첫 등장에서 동선이나 동작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 부자연스러웠다. 압권은 무대의상으로 슬립만 입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분명, 연출자는 애초에 의상이나 동선을 구상할 때 그녀는 염두하지 않았으리라. 극장 홈페이지에 있는 캐스팅 표에 그녀 이름이 없다는 것은 프로젝트가 이미 출발점을 떠난 이후에 그녀가 합류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녀를 배려하지 않은 의상과 익숙하지 않은 동선. 다음 장면에서는 문제의 그 슬립 위에 가운 같은 걸 걸치고 나왔다. 그랬더니 한결 그녀가 노래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제발 가려주세요. 그렇지만, 젠장... 연출의 의도인지, 곧 다시 가운을 벚어젖힌다. 아아.... 제발 벗지 말라고...!!!! 속으로 애원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내가 그녀를 레오노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불편한 거였구나....


3막 이후부터는 수월했다. 왜냐면 그녀가 수녀복을 입고 나왔고, 그 수녀복은 완벽하게 그녀를 감쌌다. 시종일관 어두침침한 무대에 검은 수녀복! 탁월하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두 번째 아리아 "D'amor sull'ali rosee"(사랑은 장밋빛 날개를 타고)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다. 그녀의 테크닉은 CD 듣는 것 같이 흠잡을 곳이 없었고, 그녀의 소리는 마치 악기 같이 편안했다. 그녀가 왜 이 무대에 서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디션에서 이 곡을 이렇게 잘 부르면 어떤 지휘자도 도저히 그냥 돌려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수녀복에 감긴(?) 그녀는 얼굴도 조그맣고 심지어 멀리서 봐도 미인이었다. 그래서 그와 대비되는 그녀의 체구는 더 도드라졌다. 그녀의 노래와 외모 사이의 갭(gap) 때문에 나는 공연 보는 내내  고뇌에 빠졌다. 이제까지 육중한 토스카, 폐결핵이 아닌 당뇨에 걸린 것 같은 미미는 종종 봤지만, 이번처럼 이렇게 불편한 적은 없었다. 아마도 그녀를 배려하지 못한 의상 탓이 컸으리라.


그리고 '과연 대중이 원하는, 혹은 용납하는 싱크로율은 어디까지일까...'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다. 싱크로율은 관객이 작품에 빠져들게 하는 첫 번째 미끼일 것이다. TV 드라마에서 캐스팅이 내 마음에 안 들면 채널을 돌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시간과 금전 그리고 수고까지 들여서 극장까지 가는 관객의 심리는 이런 것일 것이다. 


"나를 3시간 동안 이 현실세계에서 분리시켜서 환상의 세계로 데려가 줘,

나에게 카타르시스를 달란 말이야,

내 뇌에서 도파민과 엔도르핀을 분비되게 만들라고!!!" 


그리고 싱크로율이 높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배우(혹은 가수)우리는 사랑하게 된다.


만하임의 레오노라, 그녀는 앞으로 그 싱크로율 때문에 많은 애로사항이 있을 것이다. 싱크로율을 높이라는 압력도 많이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러 이유로 자신의 체형을 쉽게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가 나의 인종을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본인을 변화시켜야 할 수도 있지만, 그녀가 계속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다면, 관객이 그녀 쪽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 그녀는 과연 어떤 길을 가게 될 것인가...


"뚱뚱한 오페라 가수는 안 되나요?"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금발의 공주 역에 동양인 오페라 가수는 안 되나요?"

"장애를 가진 오페라 가수는 안 되나요?"

"흑인 인어공주는 안 되나요?"


내 대답은 이렇다.


"당신이 나를 즐겁게 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내 돈과 시간, 그리고 수고를 지불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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