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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Aug 08. 2019

[번역] 벨칸토 버전의 "로미오와 쥴리엣"

벨리니 오페라 "카풀레티와 몬테키"

<카풀레티와 몬테키 (I Capuleti e i Montecchi) >(이하 <카풀레티>, 카풀레티와 몬테키는 복수형으로 카풀레티 가문과 몬테키 가문이라는 의미이다.-역주)는 벨리니가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을 위해 쓴 첫 번째 오페라이다. 1830년 3월 11일에 초연되었다. 오늘날의 오페라 팬들은 이 작품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1.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엣>이 원작이라면, 왜 이 오페라는 제목이 <카풀레티와 몬테끼>인가? 그리고 왜 이 작품에서는 머큐쇼 라던지 유모 역은 나오지 않는가? 


2. 왜 로미오 역은 바지 역할(Hosenrolle: 오페라에서 여성 가수가 바지를 입고 남자 역할을 하는 것)이 되었는가? 


3. 매우 느린 작업 속도로 유명한 벨리니가 어떻게 6주도 안 걸리는 시간 만에 이 오페라를 작곡해서 상연시킬 수 있었는가? 


4. 실패작이었던 벨리니의 이전 오페라 <자이라>에서 많은 부분을 이 작품에서 재활용(?) 한 것은 아닌가? 


첫 번째 질문은 대답하기 어렵지 않다. 벨리니의 이 오페라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셰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 루이지 다 포르토라는 이탈리아 작가가 르네상스 버전의 원작(1530년)을 썼고, 그 후 루이지 쉐볼라가 1818년에 쓴 희곡이 이 벨리니 오페라의 기초이다. 


그 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지가 않은데 1830년 초의 이 오페라를 둘러싼 베네치아의 상황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빈센초 벨리니는 로씨니, 도니젯티와 함께  베르디 이전의 19세기 이탈리아의 3대 오페라 작곡가 중의 한 명이다. 로씨니가 파리로 간 지 얼마 안 돼서 벨리니도 파리로 갔었고, 거기서 주목받게 된다. 그는 도니젯티보다 몇 년 어렸지만, <해적>(1827)이라는 작품으로 단숨에 로씨니 뒤를 있는 이탈리아 오페라 대표 작곡자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로씨니와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로 작곡된 그의 첫 성공작은 낭만적이면서도 멜로드라마적인 오페라다.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의 위촉을 받아 썼으며, 당대 명가수들에 의해 초연되었다. 반면 도니젯티의 첫 번째 명작 <안나 볼레나>는 1830년에 이르러서야 등장했다. 


1829년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은 <해적>을 상연하고자 벨리니를  1829년 12월 26일부터 1830년 3월까지 초대한다. 당시 베네치아의 이 명망 있는 극장은 꽤나 오랫동안 이렇다 할 성공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로씨니의 <세미라미데>(1823)와 마이어베어의 <이집트의 십자군>(1824) 이후로 이 극장에서는 작품성과 흥행성 둘 다 만족시키는 성공적인 초연 작품이 없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작품은 두 작곡가가 이태리에서 쓴 마지막 오페라이기도 하다.) 라 페니체 극장의 골수팬들은 카라파, 타돌리니, 바카이, 페르지아니, 제네랄리, 코챠 등의 작곡가들이 쓰고 또 금방 잊혀 버린 작품들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 상황에서 당대 이탈리아 오페라 계의 오랜 잠을 깨울 신성 벨리니가 등장한 것이다. 

빈센초 벨리니, 30대 초반에 요절했다. 바람둥이로 매우 유명했다고... 인물 보면 그럴만하다.

1829년 벨리니가 베네치아로 향했을 때, 그는 새로운 오페라를 쓸 의도는 없었다. 그저 그동안 성공을 거뒀던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리고 싶었고, 필요하다면 베네치아에서 다음 시즌을 위해 계약할 수 있는 가수들의 캐스팅을 계획하고 싶었다. 그 시즌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곡가들의 두 작품으로 시작하기로 했으며, 벨리니 오페라가 1월 중순에 뒤를 잇고, 시즌의 마지막을 벨리니의 중요한 경쟁자로 평가받던 죠반니 파치니(1796-1867)의 새 작품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대단히 생산적이었던 작곡가 파치니는 80개 이상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는데, 2개 혹은 3개의 각기 다른 극장을 위해 동시에 작품을 쓰곤 했다. 벨리니는 그를 매우 싫어했다.


결과적으로 파치니는 <카풀레티> 작곡의 계기가 됐다. 그는 베네치아뿐만 아니라 토리노와 나폴리에도 계약이 되어 있었고, 벨리니가 12월에 베네치아에 도착했을 때, 파치니로부터는 소식도 없었고 물론 그의 새로운 오페라도 나타나지 않았다. 라 페니체 극장 측에서는 벨리니의 존재를 십분 활용하여 그에게 곧 상연되어야 할 새로운 오페라를 맡김으로써 난국을 헤쳐나가고자 했다. 


파치니가 그의 새로운 오페라를 들고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명백해졌을 때, 벨리니에게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즌을 위해 새로운 작품을 끝마쳐야 한다는 부담이 커졌다. 1월 5일 벨리니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그 내용은 파치니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이미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지만) 6주 이내로 <쥴리엣따 카펠료>라는 이름의 대본에 맞춰 작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벨리니는 동료들에게 한탄하기를, <해적>을 성공적으로 올렸음에도 4일 후인 1월 20일에 바로 새로운 오페라 작곡에 착수해야 하며 그것은 3월 11일에 연습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작을 하는 파치니와 같은 당대 이탈리아의 많은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벨리니는 신중하고 오래 걸리는 작곡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카풀레티> 같은 작품을  어떻게 6주 만에 완성할 수 있었는지 많은 이들은 의문을 갖는다. 벨리니는 이 작품 전에 파르마 극장을 위해 오페라 <자이라>를 작곡했는데 그중 몇몇 부분을 <카풀레티>에 차용하였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평판과는 반대로 사실 그는 가끔은 매우 빨리 작곡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또 다른 위대한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1831) 같은 경우는 <카풀레티>처럼 긴박하게 서둘려야 했는데도, <카풀레티>에서 보인 자가 복제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가 왜 <자이라>의 음악을 재활용을 했는가의 진짜 이유는 사실 그 오페라가 실패한 데서 기인한다. 그는 그가 창조한 멜로디가 살아남기를 원했다. 후에 그는 자랑스럽게 이렇게 밝혔다. „파르마에서 야유를 받았던 <자이라>가 <카풀레티>를 통해 복수에 성공했다 “


벨리니는 단시간 내에 다수의 오페라를 작곡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극장으로부터 더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작품을 제한하려 했다. 파치니의 공장식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작업 스타일을 그는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훗날 음악사적으로 봤을 때도 그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베네치아로 향하는 여행길에 쓰인 그의 서신에서 파치니에 대한 벨리니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 이번 시즌에만도 파치니는 세 개의 오페라를 쓴다네. 하나는 밀라노 라 스칼라를 위해, 또 하나는 토리노 극장을 위해, 마지막으로는 베네치아 극장을 위해. 그리고 요즘 그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10월 4일에 무대에 올릴 작품을 마쳐야 한네. 너는 이미 알겠지, 그가 결국 얼마나 형편없는 음악을 쓸 수밖에 없는지..... 베네치아의 음악감독은 내가 올린 액수를 받아들였다네. 그것은 1,840 나폴리 두카테로 8,000 프랑에 해당되는 액수야. 다른 작곡가들이 그저 3,000에서 3,500 프랑을 받는데 말일세. 1년에 그렇게 많은 오페라를 쓰는 것은 나 스스로를 죽이는 일이네, 나는 일 년에 하나 혹은 두 개 작품이면 족하네. 그에 반해 파치니는 올해에만 5개를 쓴다고. “


오페라 공장장님, 죠반니 파치니

<해적>의 연습을 통해 벨리니는 이 작품이 베네치아에서 공연될 수 있을지에 대한 가수들의 역량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고  <카풀레티>의 작곡에도 그들의 장점과 단점이 반영되었다. 당대 스타 메조소프라노였던 쥬디타 그리지는 그 해 1월 17일에  <해적> 공연에서 어려운 이모게네 역을 성공적으로 불렀다. 반면 테너와 바리톤은 다소 비중이 약하게 보이는데, 이는 최고의 가수를 배치하던 당대의 스타일과는 좀 다른 면이다. 벨리니는 테너 가수가 이끌지 않고, 또한 베이스들을 부각시키지 않는 그런 오페라를 자신이 써야 한다는 걸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여자 성악가들의 목소리만으로 오페라가 성공하려면, 남자 주인공 역을 그들 중 하나가 맡게 해야 수긍이 간다. 그것을 위해 <로미오와 쥴리엣>은 가장 이상적인 주제였다. 게다가 초기 이탈리아 버전의 로메오는 여자들이 불렀으며, 또한 쥬디타 그리지는 이미 여러 중요한 바지 역할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둬 유명해진 가수였다. 


메조소프라노 쥬디타 그리지


이탈리아 오페라에는 이런 역할이 많았다. 카스트라토의 숫자가 꾸준히 감소했기 때문에 오래된 오페라에서는 여자들이 남자 주인공 역을 맡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계속해서 당대의 유명 알토나 메조소프라노를 위해 이런 역을 작곡하곤 했다. 메르카단테는 1822년 메조소프라노를 위해 '햄릿' 역을 썼다. 벨리니도 <카풀레티>에 많은 부분을 차용한 자신의 오페라 <자이라>에 남장여자 역을 써서 메조소프라노에게 주었고 훗날 자신의 미완성작 <에르나니>를 위한 스케치에서는 영웅적인 타이틀 롤을 여자에게 주기로 했다. 여자가 남자 주인공 역할을 불렀던 그 당시 다른 작품으로는, 이미 앞서 언급한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의 대성공작들인 로씨니의 <세미라미데>와 마이어베어의 <이집트의 십자군>을 들 수 있고, 심지어 1825년에 쓰인 바카이의 오페라 <쥴리엣타와 로메오>(쥴리엣과 로미오의 이태리 식 발음이 쥴리엣타와 로메오이다-역주)에서도 메조소프라노가 로메오이다. 이 오페라들에서 테너 역할은 완전히 2열로 물러나 있다. 전혀 영웅적인 역할도 아니고 여기 테발도의 경우처럼 종종 테너들이 주인공의 라이벌 역으로 대척점에 서있다. 


아마도 <카풀레티>의 모델은 1796년에 쓰인 <쥴리엣타와 로메오>로 여겨지는데, 이 작품은 나폴리의 니콜로 안토니오 친가렐리가 썼다. 그는 벨리니가 존경하던 선생님으로, 이 작품에서는 카스트라토 크레쉔디니를 위해 로메오역을 작곡했다. 벨리니의 <카풀레티>는 친가렐리의 오페라에게는 곧바로 경쟁작이 됐음에도, 그는 자신의 스승과 라이벌화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새로운 작품에 다른 이름을 붙이게 된다. 친가렐리의 작품은 1820년대에도 여전히 공연되었으며, 주인공 카스트라토 역할은 프리마돈나에게 이어졌다. 이 역은 벨리니의 가장 유명한 여자 성악가였던 쥬디타 파스타의 애창 레퍼토리이기도 하였다. (훗날 벨리니는 그녀를 위해 1831년 노르마를 작곡한다.)


벨리니는 당시 이탈리아 낭만주의 오페라에서는 유일한 외향적이고 영웅적인 역인 '로메오'를  1830년대 프리마돈나들에게 선사한다. 이런 장르의 주인공 바지 역할 중에서는 가장 최후에 작곡됐으며 당대 프리마돈나들, 이미 '안나 볼레나', '아미나' 혹은 '노르마' 등으로 유명해진 그들이 그들의 눈부신 커리어를 다른 차원으로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쥬디타 그리지와 마리아 말리브란 같은 스타들은 그녀들의 다른 여자 주인공 역들과 마찬가지로 '로메오'를 불러서 빛냈다. 


메조소프라노들은 이 '로메오' 역할을 사랑한다. 무엇보다도 <카풀레티> 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길게 펼쳐진 레가토 라인이나 그의 다른 전작들, <라 스트라니에라><자이라>에서와 같은 소박하고 음절적인 멜로디, 그리고 <노르마><몽유병의 여인> 같은 벨리니의 후기 오페라에서 볼 수 있는 특색 있는 벨리니 만의 스타일 때문일 것이다. 


로메오의 첫 번째 아리아 „만일 로메오가 한 아들을 죽였다면 “은 8분의 9박자 안에서 놀라운 도약들과 리듬적인 변화로 가득 차있다. 이 아리아는 <자이라>에서 차용되었지만 거기에서는 4분의 3박자로 멜로디가 진행된다. 로메오의 캐릭터적인 움직임은 벨리니 스타일 안에서 발전을 보여주는데, 1막 피날레의 8분의 9박자로 된 3 중창에서는 이미 <노르마>를 보여준다. 새로운 방법의 리듬적이고 운율적인 유연성은 1막의 피날레의 제창 멜로디 „Se ogni speme “의 계속되는 라인에서 특별히 더 도드라진다. 벨리니는 여기서 고음부의 로메오와 쥴리엣타의 목소리를 다른 앙상블 라인과 대비시킨다. 중단 없이 31마디 동안 펼쳐지는 이 환상적인 선율과 이탈리아 오페라의 간단하고 선율적인 설계는  훗날 베를리오즈를 자신의 오페라의 드라마틱한 작용에 관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합창과 레치타티보, 유연한 아리오조와 앙상블이 끊임없이 교차되어 벨리니가 구현하고자 했던 강력한 음악드라마적인 설계를 보여준다.


글:시몬 마퀴르 (DG I Capuleti e i Montecchi 음반 부클릿 중)

번역(...이라고 쓰고 의역이라고 읽는): 오주영 

<카풀레티와 몬테키>가 초연됐던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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