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a Apr 26. 2018

당신에게 내린 세월의 눈(雪)이 보이시나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빈 국립오페라극장(Wiener Staatsoper).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가 상주하는 극장. 현재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이하 ‘메트’)과 런던의 코벤트 가든(로얄오페라하우스), 그리고 빈 국립오페라극장을 선택하겠다. 선택 기준은 세계 오페라계의 트렌드를 얼마나 주도하고 있느냐, 또 자본이 얼마나 쏠리고 있느냐 등이다. 코벤트 가든이나 메트는 압도적인 자본력을 바탕으로 스타 마케팅이나 영상사업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으니 언급을 하지 않겠다. 하지만 왜 밀라노의 라 스칼라보다 빈을 더 높게 평가하냐고 묻는다면, 사실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둘 다 성악가들에게는 꿈에 무대이다. 그리고 각 나라의 자존심이며, 살아있는 역사와 전통의 극장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극장 시설, 관객의 호응, 솔리스트와 합창의 수준, 프로그램의 다양성 등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는데, 나는 각 나라의 현재 경제 상태 등을 고려해서 빈의 손을 살짝 들어주고 싶다. (휴우.. 헤라와 아테네, 아프로디테, 이 셋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황금 사과를 줘야 했던 파리스의 심정이 살짝 이해가 간다.)

빈국립오페라극장. 사진 출처-위키페디아

서론이 길었다. 그런데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작년 8월에 빈에 있는 에이젼시에 오디션 초대를 받았는데 오디션은 12월이었다. 다른 도시를 가게 되면 내 일정 즈음해서 그 도시의 오페라 극장이나 콘서트홀에 무슨 프로그램이 있는지 찾아보게 된다. 빈에는 빈 국립극장 말고도, 독일어로 된 작품을 주로 올리는 빈 국민극장(Wiener Volksoper)과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하는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등 몇몇 극장이 더 있다. 마침 빈 국립극장에서 언젠가는 꼭 한 번 실제로 보고 싶었던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 장미의 기사 »가 프로그램에 있었다. 이런 횡재가! 그래서 사이트에 가입하고, 같은 독일어권이지만 뭔가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은 느낌의 이런저런 절차를 거쳤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 축하합니다, 당신은 (가장 비싼) 206유로의 자리를 획득하셨습니다 » 헉! 알고 보니 예약을 했다고 생각했던 그 과정은 사실은 이미 4달 전임에도 진작에 매진됐던 공연의 대기자 리스트였던 것이다. 거기서 가격을 설정할 수 있었는데,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0원부터 최고가까지 거침없이 체크했던 것이다. 덕분에 4번째 줄 중앙에 앉는 작년 한 해 최고의 호사를 누리게 됐다.  

빈국립오페라극장 내부, 이 극장은 특이하게 하단에 보이는 1층의 중간 부분에 입석을 배치했다. 사진출처-위키페디아

그런데 11월 말에 이태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침대에만 누워있는 우울한 날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오디션 날짜가 다가오자 진통제를 먹으면 어찌어찌 버틸 수는 있는 상황까지 호전됐다. 그리고 이 « 장미의 기사 »는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기가 싫었다. 무리를 했다. 노래를 하면 진통제 먹은 상태에서도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또 막상 판이 벌어지면 엄청난 아드레날린이 나와서 통증을 잊게 해줄 테니까. 하지만 현실은 참혹했다. 통증을 극복하고 성공을 이뤄내는 감동스토리는 내 것이 아니었다. 오디션을 망치고 빈의 중심가를 헤매는데, 그 바람이 어찌나 매섭던지. 노래를 그만둬야 하나, 나는 여기까지인가 싶은 패배감에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그 달콤하다는 빈의 멜랑쥐 커피나 자허 케이크도 나를 달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오페라를 보러 갔다. 이것이 빈이 내게 베푸는 마지막 호사일 테니.  

빈의 명물, 자허 케이크(Sachertorte)와 멜랑쥐(Melange)커피

사실 이 « 장미의 기사 »를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는 소프라노 크라시미라 스토야노바 (Krassimira Stoyanova)의 노래를 듣고 싶어서였다. 작년 초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오페라 <돈 카를로>를 보는데, 엘리자베타 역을 부르는 소프라노가 너무나 잘하는 것이었다. 잘한다는 것이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거나, 엄청난 성량을 자랑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스토야노바는 아무리 오래 들어도 지치게 하지 않는 소리와 엘리자베타  역에 맞는 표현과 연기를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보여줬다. 선을 넘는 게 없었다. 그래서 스토야노바의 노래를 들으면 귀가 피로하지 않다. 이후 유튜브에서 찾아들어봤는데, 실제로 들었던 그 소리의 감동을 녹음된 영상으로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2009년에 이미 빈의 궁정 가수가 된 이 소프라노는 62년 생으로 만 55세다. 외모도 화려한 오페라 스타들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바이올린을 전공해서 그런지 빈 필 단원들이 인정할 정도로 음악성이 탁월하고 정확하다.  그래도 베르디의 엘리자베타와 슈트라우스의 마르샬린은 다르다. 한쪽을 잘한다고 해서 다른 역도 잘하라는 법은 절대 없다. 그리고 마르샬린은 참 어려운 역이다. 너무 젊은 소프라노가 이 역을 하면 그 깊이를 살리기 힘들고, 나이 든 연륜의 소프라노가 하면, 행여 이미 바이브레이션이나 음정의 컨트롤이 둔해졌을 경우 이 어려운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해내는데 무리가 따른다.   

소프라노 크라시미라 스토야노바, 사진출처 www.krassimira-stoyanova.com

오페라는 옥타비안과 마르샬린이 아침에 함께 침대에서 눈을 뜨는 것으로 시작된다. 마르샬린은 사실 이름이 아니라 직책인데, 우리말로 하면 원수부인 쯤 될까, 30대 중반으로  원래 이름은 마리 테레제이고 베르덴베르크 공작부인이다. 옥타비안은 메조소프라노가 부르는 대표적인 ‘바지 역할’ 중 하나인데,  마르샬린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젊은 정부이고 백작이다. 이 둘은 뜨거웠던 간 밤을 암시하는 노래로 도입부를 시작한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하인들 조차 알면 안 되는 지라, 하인들 눈을 피해 옥타비안이 숨다가 여장을 하고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다. 그런데 마르샬린의 사촌 옥스 남작이 와서는 부유한 상인 파니날의 젊은 딸 소피와 약혼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호색한에 안하무인 캐릭터인 옥스 남작은 여장한 옥타비안에게 반해 추근거리고, 그 와중에 온갖 시종들, 귀족들, 협잡꾼 부부, 심지어는 이탈리아 가수(가장 아름다운 아리아 한 곡만 부르고 사라진다. 테너들에겐 꿀 같은 역할임.)까지 등장하는 어수선한 장면이 지나간다. 이후 홀로 남은 마르샬린은 독백을 통해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고 자신에게도 세월이 내려앉음을 인식한다. 그녀는 옥타비안을 놔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옥타비안은 마르샬린의 갑작스러운 이별통보에 괴로워한다.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이 부르는 "Di rigori armato" 들어보기

https://youtu.be/9qDHEVLtv0Y

2막에서 옥타비안은 장미를 전해주는 기사 임무를 하러 소피네 집을 방문한다. 옥스 남작 집안은 결혼하기 전에 기사를 선발해 예비 신부에게 은으로 된 장미를 전해주는 전통이 있다. 옥타비안과 소피, 이 두 젊고 아름다운 남녀는 장미를 전해주는 순간 첫눈에 반한다. 이 순간을 슈트라우스가 얼마나 아름답게 음악으로 표현했는지 들어보자.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와 메조소프라노 안네 소피 폰 오터가 부르는 듀엣 들어보기

https://youtu.be/AuS337uc-4Y

안하무인인 옥스 남작이 소피에게 무례하게 굴자 옥타비안은 화가 나서 결투를 신청한다. 당연히(!) 결투에서 진 옥스 남작은 부상을 입고 씩씩거리는데, 한 편지가 그에게 도달한다. 마르샬린 방에서 만난 그 하녀에게서 온 편지. 비밀 데이트를 제안한 그 편지를 읽고 남작은 언제 결투를 했었는지도 모르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된다. 슈트라우스의 아름다운 왈츠에 맞춰 춤추며 도취 남작은 차라리 귀여울 정도이다. 하지만 그 하녀는 사실 옥타비안이 여장했던 것이었다.  

3막. 옥타비안이 파놓은 덫. 하녀로 변장한 옥타비안은 옥스 남작을 궁지로 몰아넣고, 여기에 소피와 소피의 아버지, 경찰까지 등장한다. 이에 옥스 남작과 소피와의 약혼은 없던 일이 되고, 마르샬린이 등장해서 옥타비안과 소피를 이어주고 무대를 떠난다. 스토리만 보면 지극히 통속적인 내용인데, 대사가 주옥같고, 슈트라우스의 음악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난다. 예전에 옥타비안 역을 콘서트에서 연주한 적이 있는데, 공부하면서 두 번 울었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아무리 공부하고 연습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정도로 어려워서 울었고, 나중에는 드디어 곡이 익숙해지고 나니,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서 많이 울었다.  

요새는 내가 나이가 들었는지 마르샬린이 독백하는 부분에서도 눈물이 많이 난다.


Kann mich auch an ein Mädel erinnern,  나도 한 소녀를 기억해,

die frisch aus dem Kloster ist 이제 막 수녀원에서 나와

in den heiligen Ehstand kommandiert word’n. 성스러운 결혼생활을 명 받았던.

Wo ist die jetzt? 그녀는 지금 어디 있지?

Ja, such’dir den Schnee vom vergangenen Jahr. 그래, 지난 세월의 눈(雪)이 네게 보이네.

Das sag ich so: 그렇게 말하겠어.

Aber wie kann das wirklich sein,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dass ich die kleine Resi war, 내가 작은 소녀였고,

und daß ich auch einmal die alte Frau sein werd.... 그리고 내가 이렇게 나이 든 여자가 되다니....

die alte Frau, die alte Marschalin! 늙은 여자, 늙은 원수 부인!

„Siegst es, da geht die alte Fürstin Resi! “봐봐, 저기 늙은 공작부인이 간다! “

Wie kann denn das geschehn?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거지?

Wie macht denn das der liebe Gott? 사랑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걸 행하신 거지?

Wo ich doch immer die gleiche bin. 나는 여전히 내 그대로인데.

Und wenn er schon so machen muß,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하셔야 한다면,

warum laßt er mich zuschau’n dabei, 왜 내게 그걸 지켜보게 하셨을까.

mit gar so klarem Sinn? 이렇게 또렷한 이성을 가지고 말이야.

Warum versteckt er’s nicht vor mir? 왜 내게 그걸 숨기지 않으실까?

Das alles ist geheim, 모든 것이 비밀스러워,

so viel geheim, 너무 많은 것이 미스터리야,

und man ist dazu da,  그리고 사람은 거기서 어떻게든

daß man’s ertragt. 그걸 견뎌내지.

Und in dem „Wie,“어떻게" 견디느냐에 따라

Da liegt der ganze Unterschied. 거기에 모든 차이점이 있어.


소프라노 키리 테 카나와가 부르는 마르샬린의 모놀로그 들어보기

https://youtu.be/FT302zBTbok

스토야노바는 지극히 담담하게 이 독백을 불러냈다. 내가 스토야노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무대 위에서 궁정 가수 스토야노바가 아니라 엘리자베타이고, 또 마르샬린이기 때문이다. 현재 최고의 오페라 스타 안나 넵트렙코는 어떤 역을 하던지 넵트렙코가 보인다. 그것이 그녀의 카리스마이자 엄청난 티켓파워의 원동력이다. 나도 그녀의 목소리와 연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스토야노바 같은 가수도 있다. 이런 가수도 있고, 또 그 노래를 들으며 나는 오열했다. 오페라를 보며 오열한 적이 얼마나 오랜만이었던가. 작품의 어느 지점과 내 영혼이 맞닿아서 감정이 폭발하는 이 희열감은 진정 오랜만이었다. 또한 치유의 과정이기도 했다. 성공의 수단으로써의 음악이 아닌 음악 그 자체에 대한 갈증과 애정이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후에 기회가 되면 마르샬린의 사랑에 대해 서술하고 싶다. 어릴 적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던 <리골렛토> 중 질다의 사랑, <나비부인> 초초상의 사랑이 나이가 들수록 이해가 됐다. 여기 <장미의 기사>에서 마르샬린의 사랑과 감정은 앞의 것들보다 더 어렵고 복잡한 것 같다, 가슴 절절히 동감은 되는데, 도저히 언어로 표현이 안된다. 훗날 내가 한 인간으로 더 무르익어서, 또 내 글재주가 더 성숙해져서 이 사랑을 글로 서술할 수 있는 날이 오길..


이 글의 마무리를 번스타인이 지휘한 <장미의 기사> 왈츠곡으로 맺는다. 나를 울리기도 행복하게도 만드는 마법의 곡이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이 음악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길 소망한다.

https://youtu.be/qhe8gZtRAlA


(쓰다 보니 이 글은 간증이 돼버려서, 이 공연에 대한 좀 더 전문적인 리뷰는 번역해서 따로 올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