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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May 15. 2018

본죠르노, 시뇨르 로씨니!

오페라 가이드 - 로씨니 시리즈 No. 1 서문 - 오페라 작곡가 로씨니

1865년의 조아키노 로씨니 Gioacchino Rossini (1792-1868) 사진출처-위키페디아

로씨니 오페라 이야기를 쓰기 전에 이 작곡가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고 싶다. 넉넉한 인상에서 엿볼 수 있듯이 로씨니는 생전에 부와 명예를 다 누린 편이다. 로씨니의 인생을 현대식으로 각색하자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1820년, 20대 청년 로씨니. 사진출처-위키페디아


 A라는 영화감독이 있다. 14세에 벌써 단편영화를 만들어 자신의 재능을 세상에 알렸다. 이른 데뷔의 배경에는 소위  ‚업계‘에서 일하는 부모님의 영향도 있다. 아버지는 영화음악 작곡가이며, 어머니는 배우 출신이다. 금수저까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영화로 둘러싸여 있다.


차츰 경력을 쌓아가던 A는 18세에 발표한 영화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는다. 처음에는 재능 좀 있는 어린아이 정도로 치부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진짜 감독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발표하는 영화마다 흥행 차트 석권은 물론 외국에서도 열렬한 반응이 있었다. 20대 초반의 A는 이미 거장으로 대우받고 그의 이름은 흥행 보증 수표가 된다.  그리고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B와 결혼했다. B의 놀라운 재능은 A의 뮤즈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A는 B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다수 제작하여 공전의 히트를 친다. B는 A의 영화에서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줬고, A는 B의 연기력이 최고로 발할 수 있는 역할과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는 일 년에도 몇 편씩 영화를 찍는 다작형 감독으로 코믹, 액션, 전쟁, 멜로 등등 장르도 다양했다. 하지만 어느 작품이든  A의 것임을 알 수 있는 자신만의 코드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영화에 주로 출연하는 배우 사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영화 세계를 구현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특별한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를 두고  ‚A의 남자‘, ‚A의 히로인‘이라는 특별한 호칭이 생기기도 했다.


남 부러울 것 없는 성공의 가도를 달리며 부와 명성을 쌓은 A는 37세에 만든 작품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다른 감독들은 30대 중반이면 서서히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A는 돌연 은퇴하고 미련 없이 업계를 떠났기에, 그의 이른 은퇴를 놓고 설이 분분했다. 훗날 인터뷰에서 왜 그리 은퇴를 서둘러서 했냐는 질문에 A는 영화 찍는 것보다는 먹는 것이 더 즐거웠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A의 영화 스타일이 점점 구식으로 취급받고, 또 그의 작품세계를 소화했던 배우 사단이  점점 줄어들게 되면서 그는 그 바닥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혹자는 A의 이른 은퇴의 배경에 7살 연상의 부인 B가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의심한다. 그녀가 A를 만나게 된 건, 서른 즈음. 이미 그녀는 당대의 배우로 손 꼽히고 있었다. 불행한 점은 A가 전성기에 막 진입할 때, B는 전성기의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혼 생활 내내 그들은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며 수많은 명작을 선보였지만, A가 B를 위해 만든 첫 작품에서 마지막 작품까지는 1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작품의 실패가 계기가 되서 B는 영화계를 은퇴하게 된다. 그 후로 A는 몇 편의 작품을 더 쓰게 되지만, B와의 사이는 악화되고 결국 별거에 이른다. 젊어서부터 도박 중독에 빠졌던 B가 전성기를 지나 내려오는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과 그것이 A에게 미친 악영향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이후 대중들이 기억할만한 그의 활동은 미식에 탐닉하며 ‚수요미식회‘같은 프로그램에 출연, 미식가의 절정을 보여준 것이었다. A의 이름을 딴 요리가 있을 정도였고, 그의 사인이 걸린 식당은 셀 수 없을 정도. 그렇다면 A가 영화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을까? 그의 컴백을 원하는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50세에 다큐멘터리 영화를  발표해 대반향을 일으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영화는 다시 찍지 않았다. (작품을 발표하는 대가로 후원자가 엄청난 거금을 제안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37세에 은퇴하고 37년을 더 살았던 A감독은 과연 후반기 37년 동안 어떤 소회를 느꼈을까? 부족한 솜씨로 로씨니의 생애를 현대식으로 각색해 보았다. 로씨니의 진짜 생애는 다음 링크에서 자세히 읽어볼 수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95%84%ED%82%A4%EB%85%B8_%EB%A1%9C%EC%8B%9C%EB%8B%88


우리는 모차르트 같은 요절한 천재를 보면 애석하다고 느낀다. 혹은 베토벤처럼 평생을 치열하게 고뇌하며 마침내 장애마저 극복하고 명작을 남긴 거장에게는 진한 감동을 느끼며 때론 경외감마저 든다. 하지만 로씨니 같은 삶도 있다. 어떠한 인생도 수월한 인생은 없다. 다들 나름대로의 번뇌와 고통을 얇은 희망으로 포장하며 살아간다. 겉으로 볼때 현세에서 누릴 거 다 누린 로씨니는 뭇사람들의 질투를 받아서일까? 사실 음악적인 평가가 절하되는 감도 없지 않다. ‚세빌랴의 이발사‘와 ‚신데렐라‘를 제외하고는 자주 상연되지도 않는다. 한편으로는 그의 작품을 소화할 가수도 많지 않다. 그의 특별한 테크닉을 가진 가수를 남자는 ‚로씨니아노(Rossiniano)‘, 여자는 ‚로씨니아나(Rossiniana)‘라고 부를 정도로 특별 대우를 해준다.


이 공간은 로씨니를 연구하기 위한 현재 진행형 아카이브이다. 이 공간이 채워질수록 로씨니에 대한 내 사랑이 더욱 깊어질 거라 확신한다. 그리고 로씨니를 더 잘 알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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