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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Jul 20. 2018

환희의 송가(頌歌), 고통의 비가(悲歌), 그리고...

<음악 에세이> 베토벤은 청력을 잃고 나는 허리를 잃고...

이 놈의 허리가 또 도졌다. 작년 말에 허리 디스크 부상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었는데, 불과 반년 만에 다시 요단강을 반쯤 건넜다. 일단 잘못은 내가 했다. 내 육신의 한계를 멀찌감치 잡아놓고 욕심만으로 밀어붙이니 가장 고생한 허리에서 먼저 경고 신호를 보냈다. 몸을 쓰는 직업이다 보니, 운동선수들처럼 주로 쓰는 부위가 있다. 같은 성악가라고 다 같은 근육을 쓰는 게 아니다. 100미터 단거리 육상선수와 마라톤 선수의 체형이 다른 것처럼 우리도 각기 다른 근육을 사용한다. 드라마틱 소프라노가 한 음 내는 동안 백 개의 빠른 음을 내는 나 같은 콜로라투라 성악가는 '파파파팍'하고 배와 허리를 치는 잔근육(?)을 많이 사용한다. 아무튼 나는 노래할 때 허리를 많이 사용한다. 과하게 노래하면 탈 나는 곳도 꼭 허리이다.


침대에 누워 몸을 돌리는 것조차 칼로 베이는  괴롭고, 가장 두려운 것이 재채기인 이 상태에서는 달리 대책이 없다. 진통제와 소염제가 제 할 일을 열심히 해주길 기다릴 수밖에. 특히 모든 게 느긋한 여기 독일에서라면 더더욱... 그러니 오래간만에 차분한 시간이 왔다.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하는 원인 분석에서 반성에 이르기까지 깊은 성찰의 시간이 저절로 온다. 원인은 많다. 조그만 조각이 모여 모자이크를 만들듯이 많은 요인이 모여 지금의 사달이 났다. 하지만 다시 과거의 그 지점으로 돌아간다 해도 과연 그 '무리'를 안 했을까? 아니다. 난 그 시점에서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을 선택했으니까. 그래서 반성은 해도 후회는 없다. 깨달음은 내 한계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가깝다는 것. 내 몸이 내는 경고 신호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  


그 와중에 느낀 것은 인생은 정말 기가 막히게 플러스(+) 마이너스(-) 영(0)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 인생은 내가 다 그 속을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나는 이제까지 노력한 것 이상의 복, 소위 말하는 요행을 누려본 적이 없다. 예를 들면 어쩌다가 콩쿠르에서 상을 받으면 돌아오는 길에 항공편이 꼬여서 그만큼의 돈을 날린다. 그간 떨어진 콩쿠르가 무수하고, 물심양면 들어간 공은 엄청나며, 본전 뽑을 날은 요원하건만... 가뭄 끝에 비가 와도 소가 외양간을 탈출하는 격이랄까. 결국 내 결론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하나를 얻고 싶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최근에 얻은 것 중에 요행까지는 아니어도, 스스로도 이건 좀 얻어걸렸다 싶은 일이 있었다. 감사하게도 베토벤 합창교향곡에 알토 솔리스트로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누구나 알고 있는 멜로디에, 쉴러가 쓴 인류애 가득한 가사 등등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교향곡일 것이다. 이 곡의 감동의 포인트는 다른 곳에도 있다. 영화 "불멸의 연인"에서 보면 청각을 잃은 베토벤이 이 곡을 초연할 때 지휘를 하는데 연주를 마치고도 관객의 열광적인 환호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자 악장이 베토벤의 뒤를 돌아보게 해 열렬한 관객의 반응을 알려주는 감동적인 장면이 있다. 반면 영화 내내 베토벤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그런 그가 청력을 잃고 나서도 '모든 인류가 형제가 되는 희망'을 노래하는 내용의 이 교향곡을 작곡한다는 스토리는 '악성(樂聖)'의 반열로 올라간 베토벤 신화가 지금까지도 건재한 원동력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화를 아니더라도 음악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이 넘치는 작품이다. 4악장 중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우리가 모두 아는 그 멜로디를 합창의 거대한 에너지와 함께 휘몰아칠 때, 잘 만든 스펙터클한 블록버스터 영화 저리 가라 하는 전율이 느껴진다. 이러니 이 작품은 어김없이 관객의 기립박수를 받는다. 특히 여기 독일어권에서는 모국어로 텍스트의 메시지가 전달되기에 감동의 폭도 더 큰 것 같다. 그 감동은 관객이 기꺼이 일어나서 연주자들에게 박수를 보내게 만든다. 이번 연주도 엄청난 환호와 기립박수를 받았다. 물론 잘 알고 있다. 이 박수에 내 지분은 극히 작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리스트라고 해서 무대 맨 앞에서 따로 박수도 받고 하니, 한 것에 비해 너무 큰 갈채를 받았다. 사실 그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 영광이고 감사하고 있는데 말이다.  


겸손이 지나치면 그것 또한 흉이 될 수 있지만, 이리 나의 낮음을 고백하는 까닭은 진정으로 이 합창교향곡 안에서 알토 솔리스트의 역할이 소위 '꿀보직'이기 때문이다. 합창 교향곡에서 베이스와 테너는 각자 멋진 솔로 파트를 가지고 있다. 베토벤 특유의 남성적인 음악이 두 남성 성악가의 솔로를 통해 멋지게 펼쳐진다. 그리고 소프라노 솔리스트는 마지막 느린 부분에서 정말 어려운 고음을 아름답게 내야 한다. 그런 반면 알토 솔리스트는 앙상블을 담당하긴 하지만 내세울만한 구석이 별로 없다. 나의 은사님이신 마인츠 음대의 데발트 교수님은 이 작품에서 알토 솔리스트 목소리가 들릴 경우는 그녀가 틀렸을 경우라고, 그러니 괜히 존재감 드러낸다고 밀거나 지르지 말라는 농담 같은 충고를 해주셨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합창 교향곡을 들을 기회가 생기면 알토 솔리스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길. 그러면 새로운 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큰 규모의 연주를 앞두고도 이토록 마음이 편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그렇다고 연주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무대 위에서도 나 나름대로는 혼신을 다했다. 하지만 분명 노동량에 비해 과한 환호와 갈채이긴 했다. 또 무대는 얼마나 근사했던지, 프랑크푸르트와 마인츠에서 가장 큰 무대였다. 사진도 멋지게 나오고 말이다.

프랑크푸르트 알테 오퍼(Alte Oper)
마인츠 라인골트할레(Rheingoldhalle)

다시 침대에 누워 육체의 고통 속에서 성찰의 순간으로 돌아간다. 그래 인풋보다 아웃풋이 많았으니 이렇게 삐걱대는구나. 그리고 다시 나를 내려놓는 훈련. 지독하게 아파 본 사람들은 건강이 최고라는 말이 얼마나 귀한지 안다. 세상 부귀영화 따위는 건강 앞에서는 전혀 의미 없음을 너무나 잘 안다. 반년 전에 그걸 뼈저리게 느꼈는데, 금세 이 순간이 다시 올 줄이야. 내려놓는다. 내 부질없는 욕심과 허영을.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물 들어온다고 다 노 젓다가는 요단강 건넌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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