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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gan Apr 29. 2018

4_엘렌과 세바스티앙_
침대없는 방

잃어버린 서울의 여름 (4)_프랑스워킹홀리데이

Rue des pommes, Toulouse 31000

집은 툴루즈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끝이 아래를 향한 손잡이의 묵직한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왼쪽 옆으로 우편함이 있었다. 또다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긴 복도가 보였다. 복도를 따라 걸으면 왼쪽으로 둥근 계단이 있었다. 그 뒤로는 활짝 열린 나무 문이 있는데 지나치면 프랑스식 아파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원이 나타났다. 내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그곳에서 건물 보수 작업을 하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백인이었다. 한 사람은 늘 싱글벙글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일을 싫어서였는지 어딘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후자가 나를 보는 눈빛은 그다지 유쾌하지가 않아, 한동안 인사 건네기를 망설였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안녕하세요(Bonjour)라고 인사했는데, 그것은 내 입장에서는 프랑스의 문화를 익히는  것이면서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행동이었다. 흔히 프랑스에서는 상점, 카페, 식당, 약국 등에 들어갈 때 손님이 먼저 '봉쥬흐'하고 인사한다. 물론 점원이나 사장도 함께 인사하거나 대답한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데, 그 이유를 언젠가 프랑스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질문에 답한 자는 이유에 대해서 '어떠한 곳에 들어가는 인물이 그곳에 먼저 있는 사람의 공간에 침범하고 정적을 깨는 일이기 때문에, 들어가면서 인사로서 존재를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척 당연하다고도 했다. 


나는 집안을 들어갈 때나 나갈 때나 그곳에서 항시 일하고 있는 그들의 공간을 지나쳐야 했기에, 먼저 인사를  건넸다. 처음 한 두번의 어색함을 견디자 매일 아침 집을 나설때 나는 가볍게 '봉쥬흐'를 외치곤 했다. 그 후로 약 한 달하고도 며칠동안 나는 그들과 아침마다 인사를 나누었다. 


아파트에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집은 3층(한국으로 치자면 4층)이 있고, 그곳에 도착하기 전 1층과 2층의 다른 집들을 지나쳐야 했다. 하얀색 현관 집에서는 젊은 남녀가 이야기하는 소리 밖에까지 들리곤 했고, 나무로 된 현관 집에는 도통 누가 사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엘렌의 집은 건물에서 가장 꼭대기 층이었다. 그래서 여름에는 무척이나 덥다고 했다. 거실은 꽤 컸는데 나무 바닥을 걸을 때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났다. 부엌은 '아메리칸 스타일'로 거실과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있었다. 전통적인 프랑스 집은 부엌과 거실이 벽이나 문으로 분리되어있는데 그렇지 않다면 아메리칸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거실에는 텔레비전과 빨간색 쇼파가 있었고 쇼파 맞은 편으로는 커다란 창과 밖으로 이어지는 테라스가 있었다. 엘렌은 그곳에 그녀의 작은 정원을 만들어 놓았다. 거실 식탁 위에는 식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가지 고지서, 통지서 등이 제멋대로 널부러져 있었다. 


거실 한 쪽벽에는 거울이 달린 문이 있고, 그것을 열면 방 2개와 화장실(les toilettes), 그리고 샤워실(la salle de bain)이 나왔다. 엘렌은 집을 소개하면서 당장 쓸 물품이 없으면 샤워실에 있는 샴푸나 비누 등을 써도 좋다고 말했다. 고마웠다. 그리고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몇 가지 그녀만의 지침을 말해주었던 것 같다. 그녀는 대체로 호의적이었고 다소 조심스러운 눈빛과 행동으로 나를 대했다. 


내가 머물 방은 집에서 가장 안쪽에 있었다. 침대는 없었다. 바닥에 얇은 매트리스만 있었다. 방은 컸지만 창이 작았다. 알고 보니 햇살이 많이 드는 방이었는데도 창이 너무 작아, 나는 지내는 내내 그것을 아쉬워했다.방에는 옷도 가득했다. 대부분 지금 입지 않는 옷들 같았다. 내가 지내게 될 방은 소위 드레스룸으로 쓰던 방이었던 것이다. 한켠에는 서랍장과 여름 옷, 겨울 옷이 뒤섞인 채로 쳐박힌 옷걸이가 있었고 나는 그 옆에서 자면 되는 것이었다. 


엘렌은 방을 보여주면서 급하게 정리했다고 말했다. 미안한 눈치였다. 나는 실제로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기에 이것도 충분하다고, 완벽하다(Parfait!)고 말했다. 다가올 계절이 여름이기에 침대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고, 이유가 어찌됫든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온, 사진 한번 봤을 뿐인 나를 받아준 그들에게 고마웠던 마음이 컸던 것이다. 나는 침대(?)와 옷걸이 사이에 빈 공간에 캐리어를 밀어넣었다. 


엘렌의 집(Chez Hélène)에서의 나의 방


엘렌은 하얀 얼굴에 금발의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금발(blonde)이라고 하기에는 갈색머리칼도 많았지만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이 마치 공주같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었고 날렵하고 흐린 눈썹은 오똑한 코와 얇게 자리잡은 입술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툴루즈에 있는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고 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툴루즈 외곽에 살고 있고 주말이나 명절에 놀러간다고 말했다. 그녀는 언니가 한 명있었다. 그녀는 우리나라로 치면 청년구직센터(Pôle Emploi)쯤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인턴(service civique/stage)을 하고 있다고 했다.


엘렌은 그곳에서 3년 가까이 남자친구와 살고 있었는데, 세바스티앙(Sébastian)은 짧게 자른 검은 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나와 나이가 같았다. 그는 대학에서 사진(photographie)을 공부했다. 텔레비전 옆에 놓인 몇 개의 카메라가 그의 것이구나 생각했다. 지금은 이틀 연속으로 일주일에 나흘 공사현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것을 듣고 내가 아버지를 떠올린 것은 무척 당연한 것이었다. 고된 노동의 시간을 보낼 생각에 다음 질문이 생각나지 않았다. 


엘렌은 그날 밤 집에서 작은 파티(la petite fête)를 할 것이라고 말하며 친구들을 모두 소개시켜줄 수 있어서 기쁘다고 했다. 나 역시 신이 났다.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들기 전에 우리는 함께 근처 마트로 갔다. 프랑스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브랜드화된 몇 종류의 마트가 존재하는데, 우리는 집에서 오분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모노프리(Monoprix)로 갔다. 


1층(rez-de-chaussée)에는 베이커리(boulangerie)가 하나 있었고, 옷이나 화장품, 욕실용품 등의 판매대가 늘어서 있었다. 2층(premier étage)에서 비로소 식료품, 과일, 야채 등을 살 수 있었다. 우리는 술과 안주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자, 지직거리는 벨소리가 반복해서 울리기 시작하고 친구들이 도착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잔느(Jeanne)와 남자친구였다. 잔느는 영어를 잘했고, 살짝 갈라진 그녀의 앞니 두 개는 매력적이었다. 그녀와 동행한 남자는 세바스티앙의 쌍둥이 형이었다. 엘렌과 세바스티앙은 그녀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고 잔느가 말했다. 


(왼쪽 아래부터) 엘렌, 잔느, 세바스티, 그의 쌍둥이 형, 그리고 로라, 카롤린


이어서 로라(Laura)와 카롤린(Caroline)도 도착했다. 그날 밤, 나는 그녀들과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부분이 여성인권과 동성애 결혼에 대한 이야기였다. 로라(Laura)는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유독 그런 이야기에 대해 열정적이었고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지 나의 생각은 어떤지를 물었다. 로라와 카롤린은 이 년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사이였다. 그리고 그녀들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두번째 아이는 카롤린을 닮은 구릿빛 피부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서 계획한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지난 2013년 동성결혼이 합법화됐다. 이로 인해 결혼의 정의가 두 남녀의 결합에서 '두 사람의 결합'으로 바뀌면서 동성커플의 입양 및 출산까지도 합법화되었다. 로라는 나에게 결혼식 사진도 보여주었는데 하얀 드레스를 입고 웃고있는 두 명의 여인이 무척 아름다워보였다. 프랑스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보수의 그림자에도 그녀들이 용기있는 결정을 한 것과 그녀들을 지지해주었을 가족과 친구들이 보여준 진정한 사랑의 방식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함께 무척 편안해보였다. 


그녀들과 대화하면서 내가 이곳에 오고 싶었던 서로 다른 이유를 되새겼다. 프랑스라는 나라와 사회,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사고하는 방식, 삶의 양식, 그런 것들을 부대끼면서 느끼고 그럼으로써 나의 나라, 사회, 사람들에 대해 공간의 거리가 허락하는 이익을 통해 성찰하고 싶었던 최초의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어떠한 환경이 내게 주는 상황에 대한 원망이, 타자에 대한 원망으로 커져 나의 미래의 가능성을 내던지기보다는 나를 실험하는 곳에서 조금 더 자아와 가까워지는 경험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새롭게 시도하는 지금 내 앞에 닥친 미래는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될 것이고, 사소한 일상의 문제들을 해결해가는 삶을 사느라 무료할 틈이 없게 될 것이다. 언어가 서툴고, 문화를 이해하기에 부족하고, 친구가 없는 이곳에서. 


이곳에서 이번 일년을 '낭비'한다면 나는 어디에서 무슨일을 해도 다 해낼 수 있을 것이고, 이번 일년을 '버텨낸다'면 나는 더욱 현명하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아내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잔느(Jeanne)와 엘렌(Hélène)


스테팡(Stephan), 에이티엔(Etienne), 이리스(Iris), 비비안(Viviane)...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들을 가진 

친구들이 가득 거실을 메우고 그만큼 노래소리가 커지는 분위기에 나도 응답하는 사이 밤은 더욱 깊어져 

갔다. 다음 날 눈을 떠도 서울이 아니라 프랑스 어디쯤에 놓여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로 잠이 들었다. 




2017년 4월 2일

[다음이야기: 불안의 조각_탐색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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