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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완 Jul 09. 2023

다섯 번째 집

사람들 사람들 9

  나는 대학생일 때부터 베이비 시터 일을 해왔다. 일하는 시간은 보통 2~3시간 정도인데, 그 시간 동안 아이와 충실히 놀아주면 된다. 아이의 연령에 따라 하는 일도 달라지지만, 놀아주는 것 외에도 기저귀를 갈거나 간식을 챙겨주고 청소나 설거지 같은 간단한 집안일도 한다.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인데도 지금이 아닌, 그러니까 예전엔 마음이 종종 무거웠는데, 가장 무겁고 후회되고 슬펐던 일은 다섯 번째 집에서 일어났다.


 첫 번째 집 아이는 내 인중을 콱 깨물어 버렸고, 두 번째는 아이의 아침 등원을 돕기 위해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와야 해서 꽤 지쳐있던 터였다. 이후 잠깐씩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나중엔 아예 쉬었다. 벌어 두었던 돈도 점점 떨어져 가는데,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은 때를 모르고 자꾸 생겨 일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방학이라 바지런한 대학생들로 거의 다 찬 자리를 간신히 구했다. 면접을 보러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파트 단지 이름이 적힌 정류장에 내렸는데, 단지에 들어서니 이런저런 복합시설이 가득했고 조경이 보기 좋았다.

 우리 아파트랑 달라도 너무 다르네. 주눅 들었다. 몇 번을 헤맸지만 다행히 제시간에 도착했다. 벨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니 어머니가 문을 열며 맞이해 주셨고 아이가 후다닥 뛰어나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긴장된 채로 웃느라 얼굴 근육이 얼얼했다. 집안에선 은은한 향기가 났다. 거실에 들어서야 집안이 눈에 들어왔는데 내가 그동안 다녀본 집 중에 가장 새것이었고, 가장 비싸 보였다. “아이가 간식을 조금 먹어야 해서요.” 식탁 위엔 간식이 먹음직스럽게 담긴 식판이 올라왔다. 앉아서 어머니를 기다릴 때도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실례여서라기보단, 속된 말로 없어 보이는 게 싫었다. 그동안 만난 편한 옷을 입은 엄마들과는 달리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피부가 아이만큼 하얀 어머니의 눈을 피하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줬다. 몇몇 질문과 숙지사항들을 듣고 방방 뛰는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문을 탁 닫는 순간 후하고 긴 숨을 뱉었다.


 버스에서 내려 터덜터덜 걷다 보니 집에 도착했다. 우리 집이 너무 낡아 보였다. 노란 장판과 체리몰딩, 아침에 먹은 생선 비린내가 아직 빠지지 않은 우리 집. 나는 갖고 싶은 옷이 있어도, 먹고 싶은 음식은 있어도 집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욕심이 안 나서가 아니라 차마 엄두가 안 나서였다는 걸 깨달았다. 집은 차원이 달랐다. 음식이나 옷은 비교적 쉽게, 아니면 조금 무리하면 가질 수 있지만, 집은 그게 아니니까. 내가 아무리 매달려도 갖기 어려운 거니까. 그런 집을 가지려면 얼마나 벌어야 하는 걸까? 생각하니 아득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두 번째 방문까진 그 집에 가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 부러움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의 예민함 때문이었다. 놀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신경에 거슬리는 게 있으면 울음을 터뜨리며 사방에 놀잇감을 던지거나 사납게 덤볐다. 아이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는 내가 한심했다. 내가 이 조그만 아이한테 절절매다니.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아이의 예민함이 고마웠다. 이렇게 근사한 집에 살아도 이렇게 힘든 아이를 키워야 한다면, 차라리 내 사정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부러 당당하게 걸었다.


어느 날 출근 전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이가 아프다는 내용이었다. 아이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해서 얼마 전에 병원을 다녀왔다는 것, 부모가 생각한 것보다 결과가 더 좋지 않았고, 그 여파로 몸으로까지 아픔이 번지고 있다는 것. 걸음도 멈추고 그 문자를 한동안 들여다봤다. 그리고 나에게 상욕을 내뱉었다. 쓰레기. 이 쓰레기. 뭘 즐거워했던 거야. 뭘 안도했던 거야. 진저리를 치며 나를 부끄러워했다. 비릿한 쾌감, 그리고 안도감과 함께 그 집을 들락거렸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고민 끝에 결국 그 집을 떠났다. 더 이상 시터 일은 하지 않겠다 다짐했는데 어쩌다 보니 누군가의 부탁으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일이 나에게 지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예민함은 결국 아이가 아프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나는 아이의 배경만 보느라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 이후 집이 아니라, 부모가 아니라, 아이를 보려 노력한다. 버럭 짜증을 내거나 눈물을 흘리더라도 혹여 아이의 마음을 갉아먹는 불안이 있지 않은지 살펴본다. 괜히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아이는 없다는 걸 이젠 아니까.


 알아주는 어른이 있다는 걸 알고 내 옆에 착 붙어 오늘 이랬고 어린이집에 자기를 힘들게 하는 친구가 있어서 괴로웠다고, 엄마가 좀 더 자주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속마음을 제법 털어놓는 걸 보면 안심이 된다. 오늘도 시터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카페에 앉아 다섯 번째 집에서 느꼈던 슬픔까지만 적었다. 마음이 조금 무거운 채로 아이를 만나러 갔다.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가며 오늘 간식은 아이스크림이라고 말했다. 아이는 “선생님도 같이 먹어요” 라고 말하며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이야기해주었다. 나도 마음을 듣는, 차마 말 못하는 마음을 알아주는 어른이 될 수 있는 걸까, 감히 희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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