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 북적한 서점 계산대에 줄을 섰다.
내 순서가 다음 차례라 계산원 뒤로
정리되어있는 많은 책들 중 내가 원하는 책을 눈으로 빠르게 찾았다.
고르게 진열되어있지만 제법 많은 책들이 쌓여져있었고 각양각색의 제목들도, 덧입혀져있는 색깔들도 다들 제각각이라 쉽진 않았지만 유독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던 건 그 책을 빨리 갖고 싶은 마음 때문이리라.
앞 사람이 결제를 마치고 옆으로 빠진 뒤
계산원과 눈이 마주쳤다.
' 황홀한 태양을 향한 푸념 주세요-'
'태양이 황홀해지는 푸..뭐요??'
'황홀한 태양을 향한 푸념이요-'
얼토당토 않게 책 이름을 바꿔버린 계산원이 조금 미워져 계산원 바로 뒤에 꽂혀있는 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계산원은 책을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않고, 오히려 자신의 귀는 이상이 없고, 이상한 발음으로 틀린 제목을 알려준 니가 이상해-라는 듯 한번 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내리 깔았다.
짜증 섞인 눈빛으로 나와 소통이 어렵다는 듯,
뒤에 줄 선 많은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꺼지라는 건가?
순간 기분이 상했지만 참았다.
옆에 일하고 있던 남자 직원에게 찾아보라
지시를 내리고는 다음 순서의 손님을 불렀다.
순간 옆으로 비켜난 내 입장은 손님이라기 보다는
불청객이 되어버렸고, 화가 끓어올랐지만 싸우는 건 소질이 없었기에 꼬리를 내렸다.
이내 초짜느낌을 한 훤칠하고 잘생긴 젊은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가까이 다가와 되물었다.
'달콤한 태양처럼 사는 프리마인가요?'
- 아니 이건 또 뭐야...
어찌도 저리 비슷한듯 아닌듯 잘도 지어낸담?
아유 답답해.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침뱉을 수도 없고...
내가 찾는 책과는 전혀 다른 이름의 제목들이 튀어나오는 걸 보고 흠칫 놀랐다.
어쩜 저렇게 창의적인 발상으로 이름을
바꿀 수 있는 능력들이 있는가 하며.
'저기 뒤에 하늘 색 표지로 되어있는 책이요.
보이시죠? 황홀한 태양을 향한 푸념- 이요~~!!'
앞서 여직원에게 당한걸 앙갚음이라도 하듯
나도 모르는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와 툭 내던졌다.
그러자 그 남자 직원은 눈치가 빠른건지
성격이 싹싹한건지 친절한 웃음으로 보이며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 직원 덕분에 살짝 상했던 기분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 느꼈다.
가르킨 방향으로 책을 요리조리 둘러보더니 마침내 정확히 내가 원하는 책을 골라 빼주고는
처음 나를 맞이했던 불친절한 여자 직원 옆에 계산을 맡아달라고 올려두고는 하던 일을 하며 시야에서 멀어졌다.
책 제목으로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고, 그 때문에 계산이 늦어지기도 해서 남자직원이 책을 찾는동안 나는 이미 줄에서 벗어난 채 옆 라인으로 밀려나 있었지만- 아까처럼 불청객의 이상한 느낌은 더이상 받지 않았다.
나의 순서를 기다리며 멀뚱 멀뚱 그저 서서 아무 생각없이 다른 책들의 제목을 구경하다 갑자기 생각난 듯 지갑을 꺼내들었다.
그 여자 직원은 줄 지은 다른 손님의 계산을 도와주고 있었기에 기다림이 무료하기도 했지만,
나의 순서를 결정해주는 건 순전히 그 여자 직원의 몫인것만 같아 선택받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그 여자 직원의 눈과 마주치기를 고대했다.
내가 기억하는 책의 값은 ₩19500이었다.
늘 그렇듯 지갑을 열어 먼저 만원짜리를 찾기 위해 색깔을 구분하며 뒤적거렸다.
'어라...??
만원짜리가 없네.
천원짜리와 오천원짜리가 좀 많았던거 같아...'
그때부터 이상한 기운이 돌기 시작하며 식은땀이 나는 것을 감지하고는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다시 한번 더 지갑 안을 가까이서 확인했다.
돈도 없이 너무 당연하게 책을 사기 위해
줄을 서진 않았을테고..
게다가 이상할 정도로 그 책은 하필이면
또 길고도 흔치 않은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여자 직원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까지 펼치지 않았던가...
한쪽으로 비켜서 계산을 기다리고 있는 불편한 상황에서 지불할 돈이 없다는건...?
머리 속 드는 민망함 보다 얼굴이 먼저 달아올랐다.
생각과 동시에 나의 손은 점점 더 빨라져만 갔다.
천원짜리 오천원짜리 동전까지 뒤적거리며
온 힘을 다해 지갑이 뚱뚱해질정도로 깊이 손을 뻗어 지갑 안 구석 구석을 후벼팠다.
그럴수록 내 마음도 후벼파지는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탈탈 털어 수중의 돈을 계산해보니
겨우 오천원짜리 2장과 천원짜리 몇개..만원권이 있다고 착각했나.
'아니, 무슨 책값이 저리 비싸-'
민망함에 괜시리 책값 탓도 은근히 해본다.
'그나저나 어쩐담...
가지고 있는 돈이 이것밖에 없는데,
책을 어떻게 사지?'
순간적으로 생각난 머리 속 나의 목적은
책 값을 지불하고 이 서점을 당당히 나가는것. 탈출이라하는 것이 더 맞겠지만- 그것밖에 딱히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돈이 없어 못산다고 뒤돌아 서는 수치심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 더 맞다.
돈이 없는 게 죽을 죄는 아니지만, 괜시리 민폐만 끼쳤다는 생각이 들자 죽을 죄처럼 느껴졌다.
돈도 없는 주제에 첵 제목을 알아듣지 못한 계산원에게 인상을 찌푸린 것에도
이상한 죄책감이 들었다.
'어휴.. 내가 이런 실수를 할리가 없는데
어쩌자고 지갑에 돈도 없으면서 당당히 책을
사러 왔지..'
사실 내 성격을 보면 가끔 그럴 때도 있다.
꼼꼼한 성격보다는 덜렁대고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평소 내 성격을 굳이 따져보자면 꼭 없는 상황도 아닌데, 누가 묻지도 않았건만 이래 저래 핑계에 핑계를 둘러 대며 나 자신이 꼭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가식적으로 합리화를 시키고 있었다.
뭐 그리 대단한 죄를 지은것이 아닌게 맞는데
죽을 죄를 지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 역시
따지고 보면 민폐를 끼치기 싫어한다 말하고 있지만 은근 남의 시선과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닐까.
오늘따라 원하는 그 책을 사지 못하고 뒤돌아 선다면 나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꼭 그럴것만 같았다.
웬지 모를 민폐라는 두 글자와 함께 말이다.
빳빳한 오천원짜리 한 장, 지저분한 오천원을 포개어 꼬깃꼬깃 천원짜리 4장을 손에 쥐고 난감해하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동안 여자 계산원은 나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각보다 빨리 나의 순서를 허락해주었고, 그때만큼은 그다지 고맙지 않았다.
게다가 빨리 돈 않내고 뭐하냐는 듯 쏘아보는 시선은 혼자만의 생각일지 모르겠으나
그 어떤 가시보다도 더 따갑게만 느껴졌다.
모두들 반팔 차림인데, 갑자기 그 서점 안 난방 온도를 최고로 올린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뜨거운 기운과 답답함이 전해져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해댔다.
그깟 책값에 이리도 작아질 수 있는건가 싶어 숨고만 싶어졌고, 순간적으로 한심한 모습의 내가 보였다.
'이럴 때 천원짜리는 왜 이렇게 꼬깃꼬깃하냐고..'
너덜너덜 지저분한 천원짜리를 바라보니 더욱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별일 아니라 생각하고 가뿐하게 그냥 오늘은
살 수 없다고 쿨하게 뒤돌아 나가면 그만일것을..
누가 뭐라 할것인가.
돌하루방처럼 굳어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내 두 발이 원망스러워 미칠 노릇이었다.
그저 쏘아대는 눈빛은 잠시만 뒤통수가
감당하면 될 것을 말이다.
간단한 것을 간단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안달복달하는 내가 더 작게만 느껴졌다.
그 상황은 실제로 단 몇 분이었지만,
체감했던 시간으로 따지면 글쎄.. 너무 길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카드 있쟈나'
참으로 웃긴 발상이었다.
요즘 누가 현금으로 계산하니.
당연한거 아냐?
재빨리 카드를 뒤적거려보았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티를 역력히 뽐내며 계산원에게 카드를 들이밀었다.
나 돈있어 까불지마!!라는듯.
갑자기 전세역전이 된 듯 기뻤다.
계산원은 카드를 받아들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카드를 단말기에 긁었다.
한번.
두번.
'어라?? 이번엔 또 모지?
한도가 초과했나?
아니 그럴리가 없는데.. 체크카드인데.
혹 통장에 잔고가 없는거야?'
긁고 기다리는 단 몇 십초, 짧은 시간 동안
또 혼자만의 패배감에 젖어 나의 덜렁거림과 찌질함을 번갈아가며 자책하며 초조한 눈빛으로 카드 단말기만 애타게 바라보며
'아니..침착해... 그럴리가 없어.
간혹가다 바쁜 오후 시간엔 전송이 좀 오래걸리는 경우도 있잖아. 침착하자....'
이마에 땀이 송글 송글 맺히고, 손이 부르르 떨렸다.
목덜미 뒤로 땀이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언제인지 모르게 흘러내린 단정치 못한 앞 머리를 뒤로 넘기며 애써 침착한 척 태연한 척 굴었다.
답답함이 더해져 달아오른 온몸은 창피함 때문이었겠지만..
형용할 수 없는 이 당황스러움을 아무렇지 않은척 하기엔 몸의 반응을 먼저 상대에게 너무 적나라하게 들킨 것만 같은 수치심으로 밀려왔다. 순간 뱅킹 확인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아무도 모르게 폰화면을 껏다 켰다를 반복하는 손짓만 늘어갔다.
<다음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