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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나 May 09. 2017

대선일 보도국 공기  

브런치 작가 됐다길래 괜히 전해 보는 (아무도 관심 없는) 보도국 상황

보통 보도국 공기는 회색이다. 회의에서 선후배가 나누는 말이든 동료와의 수다든 자신의 편견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들은 하지만, 나름의 색이 결국 드러난 결과다. 그러다 보니 재미는 없되 무색은 아닌 회색으로 공기의 색깔이 수렴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선거 날이다. 무려 대통령 선거, 아니 대통령/보궐/선거다. 오후 5시 이 곳은 붉은색이다. 다들 자유인으로서 들뜨고 보도국 일원으로 바쁘고 하다 보니 나오는 말들이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모양이다. 거칠다. 좌파/군소/라디오 방송쯤으로 분류될 우리 회사 식구들 상당수는 이른바 온건 중도 후보와 좌파 후보에 대부분 표를 던진 모양이다. 건전한 보수가 설 수 있는 땅을 기대하며 온건보수 쪽에 힘을 보탰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나름 가족들의 표를 여러 목적에 맞게 포트폴리오 했다는 자랑스러운 후기도 있다.  


아마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는 오후 8시 이후에는 이 공기가 피 색깔이 될 것이다. 크게 흥분하고 너무 바쁘고, 거기에 더해 예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일이 벌어지면 피 '색깔'이라는 단어도 부족해진다. 그냥 '피칠갑'이다. 벌써부터 얼마나 진한 색깔로 이 공간이 채워질지 궁금하다. 두근. '피바다'까지는 가지 말아주세요.

 

내 역할은 주파수 98.1에 개표 상황을 담은 내 목소리를 실어 나르는 것이다. 또 노컷뉴스에 그 상황을 정리해 반영하는 일도 해야 한다. 그걸 또 우리 뉴미디어팀이 가공해 SNS에 올리겠지. 하, 올드미디어부터 뉴미디어까지 압도적 미디어가 없는 이 빌어먹을 과도기가 피곤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여하튼 나는 지금 사건팀 소속인데, 지난 대선 때 정치부에 있었다는 이유로 차출됐다. 최종 승자의 윤곽이 나오는 밤 11시가 넘어가면 내 퇴근 시간 윤곽도 거기에 맞춰 그려지기 시작할 게다. 긴 밤이 될 것 같다. 아니지, 내일 아침까지 이 상태일지도. 부디 정권교체라는 당연한 시대적 열망이 관철되고(문?), 극단적 중도파가 현상유지에만 애쓰는 구조도 탈피하며(심?), 돼지발정제 같은 한심한 얘기 대신 똘똘한 보수의 견제를 받는 (유?) '상대적' 진보 정치체가 마련되길.

- 상대적, 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문재인 승리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충격적인 표현을 발명했던 노무현 정권과 정책방향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 사실상 진보세력은 아니다. 다만 한국 상황에선 진보로 분류되기 때문에 '상대적 진보'라고 썼다.


아, 회사에 나오기 전 투표를 했는데 투표소에서 나오는 길에 CNN과 인터뷰를 했다. 사람들이 다들 안 한다고 손을 절레절레 흔들길래 그 심정을 압니다, 하며 응해줬다. 어차피 뭐 한국에는 안 나올 테니까. 애색기까지 안고 있었으니 그림은 됐을 것 같은데 주저리주저리 말을 너무 길게 했다. 그러다가, 아 이렇게 말하면 쓰시기 어렵겠네요, 하고 수정은 했는데 잘 모르겠다. "새로운 대한민국 만들어 주세요!"류의 멘트를 기대했을 텐데, 도저히 내 비관적 성정상 할 수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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