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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눈을 가진 무기력한 신

영화 기생충 감상, 왠지 봉감독에 대한 이상한 논평

by 윤지나

봉준호의 영화 설국열차를 굉장히 늦게 본 편이다. 메시지와 플롯을 구성하는 주요 키워드가 '계급'이라는 얘기에 처음부터 볼 생각을 안 했다. 나에게 영화란, 땅 위의 벌레 같은 삶을 벗어나게 해주는 수단이지 결코 내 현실을 가만히 응시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도구가 아니다. 내가 자꾸 싫다는 친구들을 데리고 SF 영화를 보러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린랜턴과 스카이라인을 함께 본 친구들에게는 평생에 걸쳐 미안할 따름이다.)


그러다 케이블채널에서 해주길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잘 만든 영화는 장르와 상관 없이 재밌는 법이니까, 하며 설국영화를 봤다. 재밌었다. 무엇보다 충격이었다. 기대 이상의 급진성, 혹은 무기력에 놀란 것이다. 그간 나는 봉준호 감독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완전히 오판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설국열차에서 전하는(정확히는 내가 이해하는) 계급 타파는, 각성한 프롤레타리아가 멋진 주체로 활약해 얻어지는 게 아니다. 아예 계급이 작동하는 세계 자체를 절멸시키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심지어 이 절멸자는 세계를 파괴하겠다는 의지도 계획도 없던 자다. 어린 여성 주인공이 열차의 '옆'에서 나와 크게 희망적이지 않은 설국을 걸어가는 결말에선,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라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보수 얼뜨기들의 공격을 받는 그지만, 봉준호는 좌파의 성스런 단어인 '혁명'과는 맞지 않는 자다. 그렇다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우파는 결코 아니다. 그는 세상의 부조리를 좌파의 방식대로 뚜렷하게 인식하고는 있지만, 그 해결 방식과 관련해선 좌파적 세계관을 한심하게 여기는 것 같다. 한마디로 좌파의 눈을 가진, 나른한 신이랄까. 아수라가 활개치는 전쟁 한복판을 팔짱낀 채 보고만 있으니까.


그래도 설국열차가 세계의 절멸을 그렸다는 점에서, 영화 기생충은 과거보다 덜 급진적일지 모른다. 이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런 상황이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부자가 돼 아버지를 구하겠다"며 눈물짓는 최우식의 얼굴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도 그 때문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최우식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듯한 감독은, 마당 있는 집을 동경하며 그 세계로 진입하겠다는 그의 인식을 매우 담담하게 전한다. 넌 이 반지하를 벗어날 수 없어, 라고 대신 말해주는 건 관객 몫이다. 여기서 재차 확인할 수 있는 건, 좌우파가 마련한 좌석 어디에도 앉지 않은 채 세련된 자세만 취하고 있는 그의 태도다.


굳이 '세련된 자세'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적어도 그가 "그래, 계급 어쩔 수 없어. 적어도 너무 천박해지진 말고, 지킬 건 지키자"고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영화는 상영 내내 하나의 예를 보여 주는 것 같다. 부르주아가 맡기 싫어도 맡을 수밖에 없는 하층계급의 냄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이다. 현존하는 그 냄새를 어쩔 것이냐.


+ 조여정이 연기하는 마당있는 집 사모님 역만 해도, 그가 하층계급 출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디테일이 있다. 또 그런 아내를 둔 부르주아 성골 출신이자 가정의 경제력을 쥔 남편, 정확히는 그의 권력에 대한 묘사도 마치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스르륵 지나간다. 하층계급 끼리의 분투에서, 그래도 화해의 방식을 취하는 게 여성들이라는 것도 의도됐을 부분이라 생각한다. 영화 내내 마치 벽돌로 쌓은 성을 보는 듯 깨알 디테일이 너무나 많아서,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든 자는 얼마나 예민한 것인가 내 골치가 다 아팠다. 봉 감독님, 일상생활 가능?


+ 이 영화를 보고, 감독이 굉장히 보수적일 것이라 보는 친구가 있었다. 영화가 송강호네 가족을 그린 방식, '기생력'에 크게 방점을 두고 봤기 때문이 아닐까 싶긴 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송강호네 가족은 현실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혹은 감독의 호의?가 담겨 그려졌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은 저렇게 긍정적이지도, 계획적이지도, 결정적으로는 가족의 화목도 면에서 영화와 매우 다르다. 나는 하층계급에 대한 공포 대신 적당한 위선과 무식으로 점철된 상류층 가족에 대한 감독의 시선에 크게 찔려하며 영화를 봤다. 가만, 내가 왜 상류층에 감정이입을? (허위의식이란 이런 것이다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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