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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나 Jun 10. 2018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문을 나서는 그 사람의 모습에 숨이 잠깐 멎을 때가 있다. 담배에 불을 붙인다든지 고개를 잠깐 돌리는 모습이나 눈을 감았다 뜨는, 왠만한 인간들이 하는 사소한 행동을 했을 뿐인데 속절 없이 사로잡힐 때가 있다. 주위의 공기까지 달라지는 어쩌면 너무나 괴이한 순간.  


그런 상대의 주위를 맴돌다가 어쩌다 손끝이라도 닿으면 목뒤가 뜨거워져서 몰래 심호흡을 했다. 방금 내가 한 말이 작은 신호라도 됐을까 적당한 호감의 표시 정도였을까 이제는 제발 네가 나서달라는 호소가 됐을까, 아닌 척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영화 '콜미바이유어네임'이 강렬한 이유는 내가 아름다웠던 시절의 아찔한 기억들을 잔인할 정도로 세밀하게 소환하기 때문이다. 뜨거운 햇살 아래 초록색 나무와 서늘한 그늘, 속눈썹까지 흔드는 시원한 바람, 젊은 몸뚱이가 휘젓는 물살까지 첫사랑의 열병이 그대로 느껴진다. 


어쩌면 내가 더이상 할 수 없는 사랑이라 더 시리고 아름답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 엘리오의 아버지 같은 처지-_-가 됐다. (도대체 왜때문인지 매력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올리버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봤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교훈은 엘리오 아비에게 찾아야 하는 이 엿같은 현실. 아름다운 시절 열대병 같은 사건을 격려해주(기만 해야 하)는 30대 후반 기혼녀, 애엄마, 워킹맘. 또 뭐있지.  


여튼 '사건의 종결'을 받아 들인 엘리오를 한참이나 비추는 화면을 나도 같이 진득하게 바라보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야 달콤한 꿈에서 깼다. 이런 영화를 보는 짓은 웬만하면 하지 말아야 겠다. 사이코패스가 여러모로 유리한 나의 세계에선 아주 부적절한 영화다. 역시 나는 우주로 가는 영화를 봐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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