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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나 Feb 06. 2020

빌어먹을 민주주의

작금의 한국을 한탄하다 내 경험으로 실증하는 '민주주의의 약점'이랄까

'빌어먹을 민주주의'라고 제목을 달자마자 스스로 반동이 아닌가 반성한다(며 변명을 해본다).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이, 내가 속한 조직과 현재 한국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는 그 제도의 한계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욕망의 분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과 이들의 요구에 영합해야 할 필요에 발목 잡힌 자들이 함께 사는 세상, 워우워.

여기에 '민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결단코 아니라는 것은 나의 경험을 통해 실증할 수 있다. 보도국에서 다이내믹 코리아를 감당하느라 쳐내기 바빴던 일만 10년 넘게 하다가, 노동조합 사무국장으로 역할하며 가지게 된 첫 번째 의문도 여기 있다. 내가 사측과 싸우면서 '조합원들의 의견'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게 과연 존재하는가. 


개념상 노조 집행부는 사측을 상대로 한 협상 등에서 조합원들의 권한을 위임받아 대표한다. 집행부는 따라서 대부분 조합원의 이해가 일치되는 방향으로, 그 것을 공공의 이익과 부합시키면서 명분을 챙겨가며 움직이고자 한다. 말은 쉽다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조합원들의 이해는 처참하게 분절돼 있다. 모든 구성원의 이해가 일치되는 부분은 단 하나, 임금 이슈뿐이다. 임금협상은 현대 노조에서 정당성의 화신이며 자원의 보고이자 모든 행동의 명분이 된다. 올리러 가즈아!


보도와 편성의 독립, 이런 거창한 이슈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포연이 자욱한 전선이 분명했고, 피아 구분도 어렵지 않았으며 싸우는 방법도 단순했다. 전선 저 쪽에 계신 분들, 싹 다 담그면 되는긔야. 하지만 국장 추천투표제까지 갖춘 우리 회사에선, 적당히 앞뒤가 맞는 주장은 웬만해선 묵살당하지 않는다. 어쩌면 좋은 세상이지만, 천개로 쪼개진 개별 이슈가 튀어 나오기엔 아주 적절한 환경이다.


그렇다. 내가 주로 골치가 아픈 이슈는 당연히 언론인이 할 거라 기대되는(?) 요구보다 직장인으로서 더 나은 대우를 받고자 하는 개별, 개개별, 개개개개개개개별 요구들이다. 이런 조건의 요구들은 주로 다른 부원, 세대, 직급과 이해를 달리하는 경우가 잦고 요구한 자들의 필요를 충족시켰을 때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내가 주로 동원하는 논리도 노동조건의 개선을 명분으로 걸고 "내 말 어디에서 허점을 찾을텐가!"하며 협상장 탁자를 탕탕 치며 사측의 무릎을 꿇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단코 아니다. 반대로 "시혜를 베풀어 주시죠, 그게 얼마 한다고 짜실하게 이러십니까"하는 식의 약간 창피한 것들인 경우가 있다. 어떤 요구들은 정말 아니다, 싶어서 내 선에서 싹둑 자르고 싶은 경우도 있다. 어느 정도 의견을 밀어붙여 보고 통하지 않으면 할 수 없이 노조의 핵심인 위원장의 의견에 따라 울며 겨자를 먹는다. 너무나 매운 것.

 

무엇보다 이 판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는 최근 '참여'를 덕목으로 내세우면서, 실상은 권력은 물론 권위를 모두 해체하고 개개인의 의견을 수렴할 공공의 공간을 절멸시켜 버렸다. 이른바 '모아진 의견' 따윈 없다. 멀찍이 떨어진 욕구들과 세밀하게 다른 결들이 3차원에 걸쳐 있다. 그 결과 어떤 지침을 정하고 행동하기에 앞서 해당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모든 조합원'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어째, 전자투표라도 돌리랴? 폭력적인 나야 물론, 이런 과정이 불합리하고 의미가 없으니 무시하자는 쪽인데, 그럴 때마다 나는 파쇼인가 또 반성을 하게 된다.

 

주위 다른 언론사를 훑어 봐도, 노조나 협회 차원의 입장이나 성명에 반대한다며 우르르 탈퇴를 하는 경우가 최근 심심치 않다. 알고보면 구성원 개인의 힘은 약하디 약해서 뭉쳐야 하는데, 욕구가 화산처럼 분출하는 상황에선 개인의 존재만이 너무나 또렷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내가 민원창고에 불과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그래서 상당히 처참하다. 민주주의는 우리 조건의 잦은 격변, 현 상황에 불만을 터뜨리고 이따금 야유를 표출하는 일에 열려 있다. 이런 식의 열린 공간을 이용하는 분들이 하마터면 근태에 문제가 있고, 대우는 상대적으로 좋게 받는 구성원이라는 생각까지 이르게 될 때, 나는 이 자리에 적절치 않은 년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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