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울면 뒤진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기 위해 상영관에 들어서면서 남의편에게 했던 말이다. 우리가 아름다웠던 시절을 함께 했던 영화를 보면서, 호르몬 장애가 생긴 40대 남성들이 그렇게나 쳐운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남의편은 울지 않았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화와 영화의 다른 점, 더 잘된 점과 아쉬운 점, 그 시절 우리의 얘기(정확히는 내가 너보다 더 잘나갔다는 한심한 소리)를 나누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1) 소연이를 돌려줘
슬램덩크를 만화책으로 보던 시절, 나는 예쁜 소연이에게 쓸데 없는 감정이입을 하면서 "나라면 정대만을 좋아했을 텐데"라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그런데 극장판에서는 "그 소연이가 이 소연이 맞는가" 절규하게 만들 정도로, 소연이가 못생기게 나온다. 그러고보니 소연이는 만화에서도 '예쁜데 고릴라 동생이라니, 깜짝이야!'가 그의 전부였던 거 같다. 반면 하나는 기억보다 힙 앤 핫하게 나온다.
2) 송태섭의 발견
극장판을 보기 전에 슬램덩크 티비판을 정주행했다는 남의편(이색갸. 너 그럴 시간이 있었어?)과는 달리, 나는 아무런 정보 없이 그저 라떼의 심정으로 영화관을 찾았다. 송태섭 중심으로 그려진 가족사를 보면서, 내가 전혀 기억을 못하는 건가 했는데 극장판에서 새롭게 구성한 플롯이라고 한다. 나를 비롯해서 "나는 천재니까"하며 떠들고 다니던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송태섭은 일순위로 꼽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열 손가락을 깨물어도 안 아픈 손가락이 없을 작가에게, 송태섭 중심의 서사는 아마 그래서였지 않을까 싶다. 인기는 역시 캐릭터빨이라고, 극장판에서 송태섭에게 제대로 반해버렸다! 역시 만화에는 없었던 미국 진출 경기에서 송태섭이 존나 허세 가득하게 등장하는 씬도, 170센치가 안되는 송태섭에 비해 미국 애들이 좀 작네? 하는 느낌을 압살할 만큼 존멋이었다.
3) 그럼에도 놓치지 않은 개별 캐릭터
원작을 물고 빨고 했던 팬들 입장에서는, 주어진 시간이 짧음에도 각 캐릭터들의 성격과 팀내 역할에 대한 노출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대표적으로 강백호. 나는 이제 현실감각 쩌는 주름살을 가진 40대가 됐지만 강백호는 여전히 천방지축인 농구천재로 남아있었다. 긴 아래 속눈썹을 자랑하는 무표정한 서태웅이 경기 후반 무려! 강백호에게 패스를 하고 그 유명한 하이파이브 장면을 연출할 때는 남의편에게 으름장 놓은 것이 무색하게 내가 울컥하기도 했다.
4) '잘 되지 않는 것'을 '뚫어'야 하는 것에 대하여
키가 작은 송태섭은 빠른 속도로 상대를 돌파하는 걸 주 무기로 삼는 포인트가드다. 송태섭 중심 서사의 이 영화에서는 "뚫어!"라고 외치는 장면이 많이 나오고, 과거 만화책이나 티비판 애니와는 달리 이들 신이 굉장히 감각적이고 역동적으로 연출됐다. 초보지만 운동천재인 강백호와는 달리 우리의 송태섭은 노력하고 곱씹고 의지를 다지는 인물이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탈렌트를 타고났던, 그렇지만 먼저 갔던 형을 극복하는 가족사적 과제도 있었다. 아, 또 쓰면서 울컥하네. 이 영화를 음미하는 나 같은 40대에게, 나의 한계를 알고 극복을 위해 발버둥치는 것, '잘 되지 않는 것'을 뚫어야 하는 것의 의미는 남다르다. 전국최강 산왕공고와의 경기에서 북산이 이기는 걸로 영화는 끝나지만, 나는 송태섭과 아이들이 결국 전국제패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영화 밖의 내용 역시 이렇게 슬램덩크 더 퍼스트를 완성시킨다. 결국 이뤄지지 않는 것들은 꽤 많이 있다. 늙지 않은 채 17살에 머물러 있다 다시 만난 송태섭에게 내가 감정이입을 하는 이유다.
5) 더빙 괜찮습니다
사전 정보를 지나치게 많이 학습한 남의편은 더빙판이냐 자막판이냐를 놓고 쉽사리 결정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더빙판을 선택했다고 한다. 혹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알려주고 싶다. 더빙판은 당신을 그 시절 속행열차로 인도할 것이라고. 다시 찾아볼 정도로 영화에 쓰인 OST가 상당히 훌륭한데, 박상민이 불렀던 '너에게로 가는 길'까지 엔딩 크레딧에 나오면 크뤠이지포유우!!하는 아재들의 눈물로 상영관을 가득 채울 수 있다는 데 손목을 건다.
늦은 시간 보니까 문 닫아서 굿즈 살 시간이 없음. 지금이 그때보다 좋은 건 돈이 많아진 것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