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해가 쨍할 것 같은 캘리포니아의 겨울은 생각보다 춥다. 살을 에는 추위는 아니지만, 새벽녘 이불 밖엔 상시 냉기가 돌아, 침대에서 꿈쩍하고 싶지 않은 그런 추위 말이다. 캘리포니아 하면 떠오르는 것을 잠시 읊어볼까. 캘리포니아의 햇살, 햇살을 품은 썬키스트 오렌지, 밝은 햇살이 반짝거리는 바다, 바다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 키가 큰 야자수가 펼쳐진 산책로 등... 대부분 따스한 느낌의 것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캘리포니아는 겨울에도 따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도 그랬으니까.
5년 전 11월 이맘때의 일이다. 나는 미국 첫 직장에서 한 번 보직을 바꾸어 전략/리서치 팀에서 일하고 있었다. 때마침 땡스기빙(추수감사절)에 맞추어 한국에 출장 기회가 생겼다. 감사히도 출장 일주일에 휴가 일주일을 붙여 한국에 다녀올 수 있었다. 연말을 미국에서 보내는 건 별로였지만, 땡스기빙 때 한국에 다녀왔는데, 연말이라고 또 한국에 가기가 좀 그랬다. 뼛속까지 미국인이었다면, ‘뭐 어때, 내 휴가 내가 쓰는데...’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휴가를 썼을 텐데, 내 안의 코리안 걸이 ‘그건 아니지...’라고 속삭였다. 결국 여러 정황을 고려해, 미국에서 연말을 보내기로 했다.
미국은 11월 중순만 되어도, 땡스기빙 및 크리스마스 준비와 함께 축제 분위기로 바뀐다. 축제 시즌이면 바글바글, 시끌벅적해야 할 것 같은데, 반대로 매우 조용해진다. 프로젝트도 그렇지만, 파트너사와의 이메일도 급격히 slowing down. 다들 이만하면 올해 일은 다 했다며, 랩탑은 닫아 버리고, 고향이나 휴양지로 떠나는 그런 분위기다. 실리콘밸리도 마찬가지. 연말이면 더 바빠지는 백화점이라 리테일, 요식업계를 제외하면, 아무리 바쁜 회사도 11월 중순을 기점으로 slowing down 되는 것을 매년 체감한다.
미국 회사들이 대체로 그런 분위기라, 나도 12월 말 주에는 집에서 따땃하게 히터를 틀어놓고 조용히 재택근무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당시 일하던 팀의 팀장은 다른 보직과 겸직을 하고 있어, 직접 만나 얘기하기도 힘든 사람이었다. 대부분이 출장 중이었고, 사무실에서 그 팀장을 보는 건 한 달에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팀원들은 구글 캘린더를 적극 활용해 휴가 및 재택 여부를 표시했다. 12월 초가 되자, 팀원들이 휴가 계획을 무섭게 입력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질세라 재택 및 남은 휴가 계획을 캘린더에 표시했다.
젊꼰의 반격
며칠 후, 팀장은 갑자기 연말 계획을 그룹 톡 방에 공유하라고 했다. 팀원들은 구글 캘린더에 표시한 재택 및 휴가 계획을 부지런히 톡 방에 공유했다.
5분 뒤, 팀장은 나에게 따로 메시지를 보내, 왜 휴가 계획을 미리 공유하지 않았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당시 팀의 원칙대로 구글 캘린더에 실시간 업데이트했고, 연말 계획을 공유하라고 해서 공유한 건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다른 팀원들과 똑같이 했는데, 내가 뭘 그리 잘못했을까 당황스러웠다. 속을 잘 드러내는 사람도 아니었고, 나도 마음의 연금술사는 아니라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나의 추측은 이러했다. 팀장인 본인과 미리 상의하고 승인이 떨어진 후, 캘린더에 표시하기를 원했는데, 내가 캘린더에만 표시하고 본인에게 귀띔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던 것 같았다.
내가 미국에서 만난 상사들은 대체로 휴가에 빡빡한 사람이 없었다. (왜냐, 본인도 휴가를 써야 하니까 :) 게다가 연말은 다들 여행 가고 사무실에 나오지 않는 분위기라, 그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일 거로 생각하진 못했다. 하지만, 나의 불찰이었다. 그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걸 간과했으며, 팀원 중 내가 유일한 한국인이었으니, 나에게는 어느 정도의 '상명하복'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영국계 팀원들에게는 한마디도 안 하면서, 유독 나에게만 뭐라 하는 것이 뭔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팀장은 팀장이니 어쩌랴. 미안하다고, 이미 캘린더에 표시해 놓아서 문제없을 거로 생각했다고, 솔직히 말했다.
일하다 다크서클이 내려올 때 들어보세요 :)
하지만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여느 팀원보다도 나이가 어린 팀장이었는데, 팀원들이 그런 자신을 무시할까 봐 더 그랬던 건지, 젊꼰 기질까지 나오는 것 같았다. 휴가가 아닌 날은 재택근무를 할 수 없으며, 회사에 사람이 나오든 말든 '반드시 출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까지 화를 돋웠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반항했다간 완전히 찍히겠구나 싶어, 알겠다며 출근했다.
연말, 사무실 출근을 요구한 상사를 둔 서너 명의 직원이 사무실에 출근했다. 전체 100명이 넘는 직원들 가운데 말이다. 다들 아시아계 상사를 둔 직원들이었다.평소 100여 명이 일하는 사무실에 서너 명만 덩그러니 일하고 있으니 사무실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직원이 적게 나온다고 히터를 더 빵빵하게 틀어주지는 않았다. 뼈가 시린 느낌이 이런 거였나. 결국 아마존에서 저렴이 버전 히터를 주문했다. 점심때는 그 서너 명이 옹기종기 카페테리아로 몰려가 텅 빈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서로를 측은지심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 말도 없이 씩 웃었다. 속으로는 ‘당신은 어쩌다 출근하게 되었나요...?’ 물어보는 것 같았다.
혼자놀기의 진수를 보여주마
12월의 썰렁한 겨울, 쓸쓸한 냉기가 돌던 사무실을 아직도 기억한다. 미국에서 보냈던 그해 연말은 춥디 추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후 나는 연초만 되면, 한국행 비행기 표를 미리 끊어 놓는다. 나중에 취소하더라도, 무조건 티켓은 확보한다는 마음으로. 연말은 절대 미국에서 보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미국에 살면서 겨울마다 한국에 간다고 하면, 다양한 반응이 돌아온다.
1) 왜 좋은 계절 다 두고, 하필 추운 겨울에 한국에 가냐? 등의질문
2) 연말이니까 가족이 보고 싶겠지. 좋은 시간 보내고 와라 등의 덕담
3) 시간이나 돈이 많은가 보다, 어떻게 매년 한국에 가냐, 약간의 질투가 섞인 농담
'다른 소비는 줄이고, 대신 한국행 티켓 삽니다. 연중 휴가 박박 모아서, 겨울에 몰아 씁니다.' 등 할 말이 많지만, 그냥 빙그레 웃는다. 해외에 사는 일인가구 여성 동지라 그런지, ‘외로움’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는 편이다.
“혼자 있으면 외롭진 않아요?”
“혼자 있으면 안 무서워요?”
“애완견을 키우는 건 어때요? 진돗개는 주인 안전에도 좋다던데…”
처음에는 불편했던 질문에, 이제는 너스레를 떨며 대답하는 레벨이 되었다. ‘지는 혼자 놀기의 천재예유~’ 솔직히 말하면, 나는 평소 외로움을 많이 타지 않는 편이다. 20대부터 해외 생활을 종종 하며, 외로움을 삭이는 방법과 혼자 놀기의 진수를 비교적 어린 나이에 터득했다. 일 끝나고 나서는 운동하러 가고, 다녀오면 책도 읽어야 하고, 가끔 이렇게 브런치에 글도 써야 하고, 드라마도 봐야 하고, 주말엔 친구도 만나야 하고, 혼자 살아도 몸이 여러 개가 필요한 인간이다. 공허한 시간을 채울 만한 취미 활동이 나래비로 줄을 서 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12월에는 외로움이 찾아온다.
12월을 위해 사는 여자
미국의 연말은 조용하다. 여기가 산호세 시골 동네라서 더 그럴 수도 있다. 번화한 뉴욕은 다르겠지. 한국에 가면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이곳저곳 펼쳐지는 연말 이벤트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거리 구경을 하게 되는데, 미국은 다들 어디로 숨었는지 거리가 정말 조용~하다. 미국 친구에게 왜 이렇게 썰렁하냐고 물어보니, 집에서 가족, 친구들과 함께 홈 파티를 해서 그런 거라고 한다.
그래서 나에겐 5월 대신 12월이 가정의 달이다. 나의 1년 스케줄은 12월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8개의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듯, 나도 12월을 중심으로 나의 열두 달을 열심히 굴린다. 1월부터 10월은 열심히 생활인 모드로 달리고, 11월은 마무리 스트레칭과 함께 선물 준비에 열을 올린다. 11월은 블프(블랙 프라이데이) 폭탄 세일이 있어 쇼핑하기 딱 좋은 달이기도 하다. 귀요미 조카 선물이 짐 가방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엄마, 아빠, 오빠, 언니, 친지들, 친구들 선물이다.
12월을 잘 보낸 해는 그다음 해가 비교적 수월했고, 12월을 잘 보내지 못하면 그다음 해가 덜 매끄러웠다는 나만의 데이터도 쌓이게 되었다. (이걸 징크스라고 하지...) 비혼의 삶을 1년 내내 열정적으로 굴러가게 만드는 동력이 ‘가족’이라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쯤 되니, 나도 비혼 타이틀을 떼어버리고, 가족을 만들어야 하는 건지, 그럼 그 가족의 형태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할지 고민이다. 요즘엔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처럼 비혼인 두 사람이 만들어 가정을 꾸리거나, 가족 구성원을 입양하거나, 반려견과 함께하는 경우도 늘어나는 추세인데, 그럼 나도 대세를 따라야 할까. 아니면 비혼인 상태를 깨고, 많은 이들이 선택하고 소위 ‘정상적’이라 불리는, 남녀로 구성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데이트라도 해야 할까. 20대에 했으면 좋았을 고민을 지금에야 하고 있다. 위기의 연속이었던 이민 과정을 마치고, 이제야 조금이나마 마음의 여유가 생겨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싶다.
올해는 조금 서둘러 12월 비행기 표를 5월에 끊었다. 코로나로 티켓값이 천정부지처럼 치솟아, 예전에는 연말 막바지에 끊어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하는 값을 주고 한국에 간다. 그런 만큼 더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 와야 할 것 같은 압박감마저 느껴진다. 12월을 위해 사는 여자는 벌써 한국 갈 채비에 손이 바쁘다. 회사 일도 마무리해야 하고, 땡스기빙에는 모자란 선물도 마련해야 하고, 자잘한 집안일도 다 끝내 놓아야 하니까.
몸은 바빠도, 떠나기 전의 설렘을 은근히 즐겨본다. 올겨울은‘체감’은 겨울이어도 ‘심감’은 봄이었으면좋겠다. 여기저기서 내년은 경제적으로 더 힘들어질 거라고 하는데, 변화의 파도를 탈 심력을 다지는 겨울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