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시간을 '관리'하는 당신에게
세븐 투 나인 (7am-9pm)으로 일하고 있는 요즘, 가끔 미팅을 할 때마다 보스는 나에게 물어본다. 잘 버티고 있냐고... "Let's hang in there." 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일을 시킬 때도 "Are you available to do this? I just wanted to make sure you are not overwhelmed."라고 물어보는 보스. 소위 미국에서, 테크 회사에서 젤 잘 나가는 금발의 백인 (여자는 아닙니다만 ㅎㅎ)인데, 동양 사람 같은 면이 많다. 전생에 한국 사람이었는지 '겸손', '배려', '이심전심', '중도'의 가치가 뭔지 아는 사람이다. 예전 내가 만났던 보스들은 나의 업무량과 멘탈 상태에 관계없이 그냥 일을 마구 던졌는데 말이다.
지금 근무하고 회사가 소위 잘 나가는 빅테크 기업들 - FAANG (Facebook, Amazon, Apple, Netflix, Google) 또는 GAMA (Google, Amazon, Microsoft, Apple) -처럼 엄청난 연봉과 주식을 주는 건 아니지만 계속 다니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수평적인 회사 문화와 배려심 있는 팀 분위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가 꽤 깊은 미국계 글로벌 회사라 인종차별이나 다양성 등에 대한 의무적 트레이닝도 많고 관련 규칙도 매우 엄격하다. 워라밸도 그리 나쁘지 않다. 그런 이유로 한 번의 이직 후 주욱 이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업무도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제 일이 미친 듯이 좋아요! 일이 너무 좋아서 평생 붙어있고 싶어요~"라고까지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정성적인 리서치와 정량적인 리서치가 반반 치킨처럼 섞여있어, 지루함을 싫어하는 나의 적성에 맞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일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폭발하면서 머리에서 스팀이 나오고 있다. 보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요즘은 밤 10시에도 우리의 MS Teams는 '초록 등' 표시가 되어있다.
우리 팀에는 Competitive Intelligence 파트와 내가 담당하고 있는 Customer Insights 파트가 있는데, 후자에 대한 니즈가 요즘 폭증하고 있다. 하고 있는 일이 임팩트가 있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니 좋은 일인데, 나는 왜 툴툴대고 있는가... 이제 비자나 신분에 대한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솔직히 요즘 양이 너무 많다. 요즘은 아침, 점심도 책상머리에서 후루룩 '먹어치울' 때가 많다.
그래서 고민이 된다. 이렇게 빡세게 일할 거면 차라리 연봉도 높고 네임 밸류도 있는 큰 회사로 옮겨야 할까... 차라리 N잡이 필요 없는 상태를 만들어야 할까. N잡러의 시대라 회사 업무가 끝난 후에도 할 일이 (다 나 스스로 만든 일이긴 하다 ㅎ) 나래비로 널려있는데, 문제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금 몸담고 있는 회사에 계속 다닌다고 제대로 노후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원하는 타임라인 내에 경제적, 시간적 자유를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최소 20-30년간 끄덕하지 않을 빅테크로 옮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시간 짠순이가 되다
나는 점점 시간 짠순이가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이 갑자기 만나자고 하면 반갑기보다는 당황스럽다. 대부분 다시 시간 약속을 잡아야 해서 미안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주말에는 주중 못한 일들을 한꺼번에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주중에 시간이 있으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쪼개 하면 될 텐데, 요즘은 그걸 시간이 없다. 청소, 빨래, 장보기 같은 기본 생활 유지부터 시작해, 독서, 글쓰기, 인강 듣기, SNS 포스팅, 댓글 소통도 모두 주말, 그러니까 48시간 내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다 보니 주말에 누가 놀러 가자, 놀러 오라고 하면 그저 반갑기보다는 심적인 부담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사수하던 댄스 피트니스도 휴지기를 가진 지 꽤 오래되었다.
예전에는 주변에서 경제적, 시간적 자유를 얻어야지...라고 하면 그 말이 공감이 되면서도 백 퍼센트 와닿지는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시간이 고파보니 왜 경제적, 시간적 자유를 얻는 것이 그리 중요한지 알 것 같다. 나의 경우에는 시간 짠순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친구들이나 지인이 만나자고 할 때, 기꺼이 시간을 내줄 수 있는 그런 여유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가 고민 상담을 요청하면 커피 한잔 나누며 느긋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고 싶다. 지금처럼 모든 것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처리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여유를 가지고 우아하게 사는 삶을 영위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블로그, 브런치, 인스타 등 SNS 상에서 만난 많은 분들이 나처럼 직장인이거나, 이미 육아나 사업으로 바쁘신 분들이라 놀랐다. 그런데 글이나 포스팅도 정말 자주 올린다. 참 신기하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꾸준히 글을 쓰는 분들 중 멘토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일과 글 쓰는 시간의 균형을 맞추어나가는지, 그 외의 일들은 어떻게 해나가는 것인지. 어쩌면 내가 시간 짠순이가 되어가는 건, 업무 외 시간을 요령 있게 관리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관리'하기보다 '향유'하세요
하지만 '시간관리'라는 말은 조금 드라이하다. 마치 '시간의 노예'가 된 것 같은 슬픈 기분이 든다. 얼마 전 참가했던 《비로소 내 마음의 적정 온도를 찾다》 저자 강연회에서 정여울 작가님은 평소 시간관리를 어떻게 하냐는 한 독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해주셨다.
"시간을 '관리'한다기보다 '향유'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시간을 '관리'한다고 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쥐어짜는 것 같은 느낌이 있으니까, 그것을 '향유'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래, 나도 시간을 향유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봄날의 햇살 아래 앉아 쟈스민 나무 사이로 빠른 날갯짓을 하며 꿀을 빠는 귀여운 벌새에 한없이 경탄하고,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글 쓰는 이 시간을 만끽하고, 또 나의 공간을 그린그린하게 만들어주는 반려식물들에 고마워하고... 그런데 이 모든 것에는 현실적인 전제 조건이 있다. 경제적으로 쪼들리거나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마음이 여유롭기는 참 힘든 듯 하다. 어떤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 뭐 별거 있나? 그냥 즐기면 되지!”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쪼들리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삶의 여유를 한없이 즐길 만큼의 배포는 없어 보인다.
미국 이민 후 매달 내는 렌트와 생활비, 그리고 신분 문제를 걱정하던 시기는 지났다. 감사한 일이다. 나태해질 때마다, 자만심이 올라올 때마다, 이 시기를 떠올리며 초심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런데 그 산을 넘고 나니 또 다른 산이 나타났다. 바로 '시간'의 산이다. 또한 시간적 자유는 경제적 자유와 분리될 수 없다.
도비 탈출은 아무나 하나
팬데믹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것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퇴직을 선택했고 이에 'The Great Resignation (대퇴사의 시대)'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회사에 더 이상 내 운명을 맡길 수 없겠다 판단한 사람들이, 지금은 힘들어도 장기적으로 나만의 비즈니스를 키워야겠다고 결론 내린 결과이기도 하다.
솔직히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내 비즈니스를 키울 만큼의 자신감은 아직 없다. 소위 말하는 9 to 5 '도비 탈출'을 꿈꿔보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는 않은 것 같다. 또한 그러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회사 생활을 해왔다. 타지에서 혼삶을 사는 나에게 '직장생활'은 내게 중요한 '사회생활'의 일부이기도 하다. 가족이나 친척이 미국에 있다면 자연스럽게 '사회생활'이 이루어지겠지만 나는 직장생활을 통해 이 부분을 충족시키고 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래를 상상하며 나에게 질문한다. 3-4년 후에는 나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시간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일들에 조금 더 시간을 쓸 수 있는 상황이 되어있을까. 누군가 갑자기 만나자고 하면 기꺼이 시간을 내 커피 한 잔의 수다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 미래에는 시간의 노예가 아닌, 삶을 온전히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꿈꿔본다.
경제적, 시간적 자유라는 실용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열하게 사는 이유가, 결국은 삶을 온전히 향유하고 싶은 낭만적인 이유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가끔 삶이 팍팍하다고 느껴지는 분들께, 봄볕을 느끼며 잠시 쉬어 가고 싶으신 분들께 오늘 읽었던 책 중 좋았던 구절을 공유하며, 열다섯 번째 글을 마친다.
재빨리 무언가를 해치우고 싶을 때일수록,
세상을 느리고 꼼꼼히 바라보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
문명의 편리를 가성비 최고의 효율성으로 섭취하느라,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는 법, 따스한 차 한 모금을 천천히 향유하는 법,
우리 곁을 스쳐 가는 아름다움의 옷길을 잠시라도 잡아볼 권리를 잊지 않았는지.
...
우리 주변의 작은 존재들의 속삭임에 좀 더 세심하게 귀를 기울여 보자.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그저 스쳐 지나가지 않도록.
삶의 아름다운 정수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도록.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심리수업 365》, 14장. 더 깊이 모든 것을 사랑하라, 정여울 지음
※ 이미지 출처: Unsplash
※ 도비: 도비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집요정으로, 집이나 조직에서 잡무를 하는 사람이나 과로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도비는자유 #도비탈출 이라고 하면 소위 회사에 매여 일하는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뜻이다. 한때 '도비는 자유예요'라는 퇴사 짤이 유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