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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Jul 21. 2022

6-1. 유학 준비보다 더 중요한 이것

#6-1. 출국 전, 핵 뿅망치에 얻어맞다


출국 약 5주 전, 치아 검진 차 광화문에 있는 한 치과를 찾았다. 의자에 누웠다. 충치 치료, 스케일링 등 기본적인 치아 점검을 마치고, 의사 선생님은 내게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물어보셨다.


“근데 입천장에서 목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뭐가 있네요. 알고 있었어요?”


“아니요... 뭐가 있는데요?”


나는 난데없는 소리에 움츠러들었다. 선생님은 거울을 들이밀며 “여기 보이세요?” 하고 물었다. 약 2.5-3센티미터 정도의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동그란 혹이 보였다.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커질 때까지 몰랐냐며 의아해하셨다.


“아무래도 큰 병원에 가서 검사받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황당했다. 미국 출국을 한 달 앞두고 검사라니. 남은 5주의 일정을 이미 촘촘하게 짜 놓은 상태였다. 건강보다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될까 걱정이 앞섰다. 이미 티켓팅 한 비행기 표, 방 예약금, 등록금은 다 어쩌지. 학교에 사정을 얘기하면 내년으로 입학을 연기해 주기나 할까. 분에 넘치는 학교에 합격해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고통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들 하는데, 출국 전 감당해야 할 일이 또 남아있는 걸까.


“다 망상이야. 별거 아니겠지…”


출국 5주 전 - 대학병원 투어


처음에 갔던 Y대 병원은 예약도 거의 구걸하다시피 잡은 데다, 대기석에서 진료까지 3시간을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는데, 한 레지던트 선생님이 오더니 환부를 들여다보고는, CT 촬영을 해봐야겠다고 했다. 선생님께 가장 먼저 물어본 것은 8월 말에 출국해야 하는데, 그때까지 해결이 될지였다. 그는 황당한 눈빛으로, 수술하고 회복하려면 3개월은 넘게 걸릴 거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떠났다. CT 촬영 예약을 밟으라고 하는 간호사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집에 와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그 병원 때려치워라 하신다. 어머니와 함께, 나와 비슷한 사례에 대한 폭풍 인터넷 검색을 하고, 그다음 날 S대 병원에 연락해 예약을 잡았다.


S대 병원에 갔다. 어머니는 딸이 Y대 병원에서처럼 푸대접받을까 걱정되셨는지 동행해주셨다. 이번에 만난 의사 선생님은 구강악안면외과 주치의로, 머리가 희끗희끗 조금 연륜이 있어 보이는 분이었다. 출국까지 어떤 변수도 만들지 않는 것이 목표였기에, 악성이 아니라면 그냥 출국해도 되지 않겠냐고 억지를 부려본다. 의사 선생님은 양성, 악성 여부는 조직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고, 양성 종양도 언제든 악성으로 진화할 수 있다며 수술을 권하셨다. 날짜를 물어보니 아무리 빨라도 8월 말이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조심스레 물어보셨다.


“선생님, 얘가 9월에 학기가 시작해서 8월 말에는 출국해야 하는데, 어떻게 조금 빨리 안될까요…?”


어머니의 간곡한 눈빛과 말투를 느끼셨는지, 선생님은 잠시 침묵하고는 입을 떼셨다. 일정을 조정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알려주겠다 하셨다. 감사하게도, 바로 다음 날, 8월 초로 일정을 당겨줄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같은 병증에 대해, 두 병원이 어쩜 이토록 다른 답을 내놓을 수 있는지 놀랍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 작가 나봄 블로그


출국 4주 전 - 불어나는 변수


치과 의자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시술이라 믿었다. 그런데 종양 부위가 머리뼈와 기도가 연결된 부분이라 전신마취가 필요하다 했다. 변수를 거부할수록,  불어나는 느낌이었다. 회사에 사정을 말씀드리고 입원 수속을 밟았다. 간호사 언니는 수술 전날 감기에 걸리면 또다시 날짜를 잡아야 한다고,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수술이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건지 처음 알았다. 주걱턱, 구순구개열 교정/성형 등을 위해 턱이나 얼굴뼈를 깎는 무시무시한 수술을 하는 곳이 ‘구강악안면외과’라는 것도 난생처음 알게 되었다. 입원실에 있던 분들은 모두 핏줄을 달고 누워 아무 말도 못 하는 중증 환자들이었다. 하루빨리 그곳을 탈출하고 싶었다. 나는 그 방의 유일한 나이롱 환자였다.


수술 후 무통 주사 효과가 떨어지면서 어깨와 등, 머리가 점점 불편해졌다. 목이 젖혀진 상태로 수술대에 누워있던 자세 때문인 것 같았다. 옆에서 어머니가 어깨를 주물러주시는데, 그 다정함에 난데없이 눈물이 났다. 퇴근 후 헐레벌떡 달려와 돌봐주시는 어머니를 향한 미안함, 곧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막연한 두려움, 등신처럼 뭐가 난 것도 모르고 지난 6개월을 허송세월 했다는 후회가 뒤섞여,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다. 나이가 몇 개인데 이러나 싶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머니는 얼른 커튼을 쳐 주셨다.


퇴원을 하고, 다시 출근했다. 이미 1년 전 GRE 시험 때문에 2달 휴직을 한터라 또 그러고 싶진 않았다. 깔끔한 이미지로 남았으면 했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 미음만 먹어야 하니 힘이 없었다. 괜찮은 척 일을 하고, 퇴근하자마자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3주 후 출국하면 이민 가방도 옮기고 돌아다닐 일도 많을 텐데 다 해낼 수 있을까...?"


일주일이 지나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있었고, 그와 함께 체력도 빠르게 회복되었다. 사람의 몸이란 게 참 신기하다 싶었다.



핵 뿅망치에 얻어맞다


옛다, 이놈아...                      헉!

이 '치과' 사건은 건강에 대한 자신감을 넘어 자만감까지 있었던 나를 정신 번쩍 차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미국 가서는 제발 그러지 마시게...’ 하며 경종을 울리는 신의 목소리였을 수도. 그래도 나를 긍휼히 여기셨는지 망치 대신 뿅망치를, 장마 대신 소나기를 내려주셨다.


내가 봤던 대부분의 한국인 유학생들은. ‘끈기의 한국인’ 답게,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한다. 학생비자, 취업비자, 그리고 영주권 신청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 결국 목표를 이루는 친구들을 많이 보았다. 간혹 취업 비자나 영주권의 운이 닿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들도 보았지만, 결국 좋은 회사에 취직해 잘살고 있다. 영주권을 받아 신분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도 한국에 돌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내가 봤던 대부분의 케이스는 ‘건강’ 문제 때문이었다. 몸이 약해 1년에 한 번은 응급차에 실려 간다든가, 너무 외로움을 많이 타, 그로 인한 우울증이 생기거나, 육체적, 정신적 건강 문제로 역이민을 한다. 물론 배우자를 찾기 위해 돌아가거나, 요즘 한국이 워낙 살기 좋아 역이민하는 경우도 보았다.


미국 유학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GRE 점수도, TOEFL 점수도, 에세이, 추천서도 아닌 ‘건강’이었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더라도 건강상의 이유로 출국하지 못하면, 힘겹게 준비한 유학의 꿈은 종료된다. 나 또한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뻔한 사건을 겪으며, 영원히 함께 할 거라 착각했던 건강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렇게 ‘뿅망치'를 맞은 덕분에, 유학 기간 한 번도 심하게 아팠던 적은 없었다.


출국 2주 전 - 작별 인사


제대로 밥을 먹게 되면서 움직이는 데 지장 없는 체력이 생겼다. 회사에서는 분주하게 인수인계했고, 남은 시간에는 출국 서류를 마무리하고, 이민 가방을 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말을 끼워 가족과 국내 여행도 잠시 다녀올  있었다. 정갈한 한국의 산과, 계곡 풍경을 눈에 담고, 그간 가족들과 나누지 못한 대화를 나누며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아버지께서 직접 만드시고 이름까지 붙인 오두막, '성화시실(별이 보이는 )'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다. 어릴 적 나를 키워주셨던 할머니와 친지분들을 찾아뵙고, 할아버지 산소에 가 공부 잘하고 오겠다고 작별 인사를 드렸다.


함께 유학의 동고동락을 나눴던 동기들, 첫 직장 시절부터 취미로 뭉쳤던 씨네 클럽 사람들, 그간 자주 보지 못한 친구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가족 기념일마다 교외의 멋진 식당을 예약해 축복해 주시는 이모 가족들과도 출국 전 마지막 식사를 하며 추억의 밤을 보냈다.



출국 1주 전 - 일의 기쁨과 슬픔


출국 바로 전 주, 팀 회식이 있었다. 특별히 맛있는 저녁을 먹고, 팀장님과 팀원들은 준비한 선물을 내게 주었다. 사진 모음, 액세서리, 미니 계산기 등,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따스한 마음을 받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팀 워크숍, 회사 이벤트, 야근 때 찍었던 사진을 모아 액자처럼 코팅한 사진 모음이었다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캐나다에서 이민 생활을 하다 온 한 후배는, 해외에 나가면 K-POP이 그리울 거라며, 좋은 가요만 모아 직접 구운 CD를 선물해 주었다. 정성스러운 손글씨가 담긴 카드는 눈물의 쓰나미가 몰려올까, 나중에 열어보겠다 했다.


박봉이었지만 나름 편하게 일할 수 있었던 외국계 항공사를 때려치우고, 우여곡절을 거쳐 입사하게 된 세 번째 직장이었다. 어렵게 들어간 만큼 20대 후반, 30대 초반을 불태웠던, 성취감도 컸지만 일의 기쁨과 슬픔, 애증이 교차했던 곳이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와 후배들은 대부분 외교관, 주재원, 의사, 사업가의 자제들이었다. 똑똑하고 항상 열심이고, 구김살 없이 싹싹한 친구들이 많았다. 이런 친구들과 함께 일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그들과 나를 쓸데없이 비교하며 열등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적도 많았다. 해맑은 표정으로 공부 열심히 하고 오란 얘기에, 그간 유치찬란했던 내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예상치 못했던 변수로 안절부절못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소중한 사람들의 격한 배웅을 받으며 떠날 수 있다는 것이 기적적으로 느껴졌던 나날들이었다. '역시 미국 유학은 나에겐 과분한 행운이었나' 생각했던 찌질하고 부정적인 마음은 내려놓았다. 목표가 뚜렷한 것은 좋지만, 집착이 커질수록 근시안(myopic)이 되어 정작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급할수록 여유를 가지고 큰 그림을 봐야 한다는 것, 또한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만 같은 가족과 건강은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언제라도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분주하면서도 가슴 뛰는 날들이 지나고, 출국일이 되었다.

내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다음 이야기는 7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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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이미지 출처: 작가 나봄 블로그, 농담곰, Unsplash,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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