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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Mar 04. 2022

갑자기 불어공부가 하고 싶어진 이유

외국어, 세 가지 마음

나에게는 세 개의 마음이 있다. 


첫 번째는 나의 모국어, 한국어로 생각하는 마음이다. 미국 이민 전 30여 년을 함께 했던 한국땅에서 터득한 모국어이기에 가장 큰 파티션을 차지하고 있다. 주로 인지상정이 필요할 때, 빨리빨리 정신, 원리원칙, 윤리의식이 필요할 때, 때로 마음이 급할 때 (마음이 급하면 모국어가 먼저 튀어나오지 않는가?), 혹은 걸쭉한 욕을 날리고 싶을 때 쓰는 마음이다. 


두 번째는 나의 30대 중후반을 보낸 미국, 이곳에서 노력으로 다져진 영어로 사고하는 마음이다. 낮에 일을 하며 실용적, 논리적, 체계적인 사고가 필요할 때, 정리가 필요할 때, 단순함과 지름길을 선호할 때, 혹은 친구들과 농담을 따먹는 가벼운 마음일 때 주로 꺼낸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은 바로 불어로 사색하는 마음이다, 창의적이고 파격적인, 때로는 미친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문학적인 감성을 꺼내고 싶을 때, 현실에서 벗어나 삐딱선을 타고 싶을 때 주로 꺼내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미국에 와서는 거의 외면하고 살았다. 대학원 미디어 세미나로 파리에 한번 간 적이 있는데, 그때를 제외하고는 꺼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요즘 이 불어로 생각하는 마음이 자꾸 삐져나온다. 갑자기 불어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에서 팬데믹의 여파로 아직은 살벌한 직업 현장에서 생업을 이어나가야 하는 나는, 이 파티션이 튀어나올 때마다 매우 당황스럽다. 조금만 나중에 나와줄래... 하며 '벙개 파워'(조카가 악당을 물리칠 때 하는 말)를 날리고 싶다.


왜 하필 지금일까? 우선 표면적인 이유가 있긴 하다.


지금은 중고서점에서만 팔고 있는 세기문화사 <기초 프랑스어 사전>.  © 지나쥬르

첫 번째, 회사에서 전문가 인터뷰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보스가 불어로 인터뷰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이번에는 미국뿐 아니라 아시아, 유럽지역도 리서치 대상에 포함해야 하니, 한국 회사나 프랑스계 회사와 인터뷰하게 되면 네가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어본 것이다. 학부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고 첫 직장이 프랑스계 회사였지만, 그 회사를 퇴사한 이후로는 실생활에서 불어를 많이 써본 적은 없다. 번역 감수할 일이 있을 때 몇 번 본 정도... 불어에 대한 로망이 있으신 듯한 미국 보스는 기회가 될 때마다 나의 불어 실력을 테스트하려고 하신다. 사실 보스가 물어봤을 때 조금 뜨끔했다. 읽기, 듣기는 다시 공부하면 어떻게 되겠지만, 쓰기는 다시 맹렬한 연습이 필요하고 말하기는 정말 입에 거미줄 친지 너무 오래되었다.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집에 있는 몇 가지 불어 교재를 주섬주섬 꺼내고 유튜브 채널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번째, 때마침 인친님(인스타 친구의 줄임말) 피드에서 <Emily in Paris, 에밀리, 파리에 가다>가 재밌다는 포스팅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곧 론칭할 시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재미있어서 시즌 1, 2를 모두 정주행 했다 등... 원래 관심을 가지면 눈에 띄는 법. 아니 알고리즘이 나를 트래킹하고 있는 것인지도. 넷플릭스를 오랜만에 열었더니 어서 날 보란 듯이, 첫 화면에도 <에밀리, 파리에 가다>가 떴다. 유튜브에서도 불어 채널들이 날 좀 보소 하며 추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 두 가지 표면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로 불어공부가 갑자기 하고 싶어졌다. 10여 년 동안 잊고 살았던 이 마음이 고개를 든다. 하지만 그게 진짜 이유일까?




불어공부를 해야 하니 우선 사전부터 꺼냈다. 다행히도 이번 겨울 한국에 갔다가 고등학교 때 즐겨보던 <기초 프랑스어 사전>을 가져왔다. 미국으로 모셔오고 싶은 불어 교재가 정말 많았지만, 현실적으로 짐 초과가 걱정되었다. 당장 쓸 일은 없겠지 내년에 갖고 와야겠군... 하며 넣었던 책들을 다 빼서 박스에 넣었다. 짐을 풀고 불어 사전이 꺼내니, 이거 하나만은 정말 잘 가져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표지와 사전 사이가 너덜너덜해진 이 구석기시대?! 물품은 나의 고등학교 시절 사춘기 시절을 대표하는 물건이다. 표지를 여니 놀랍게도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 지나쥬르

1. 똑똑함은 의지이다.
2. 삶은 경쟁이 아니다.
3. 맑은 영혼을 지니며, 자신을 끊임없이 계발시키는 것


내가 고등학교 때 이런 생각을 했다고...? 나이를 먹을수록 가끔 어릴 적 나에게 놀랄 때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여기저기 남긴 나의 흔적 - 일기, 노트, 책에 끄적끄적한 흔적들 - 을 발견할 때 그러하다. 글씨체가 가늘고 불안정한 것이 그 당시 나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갑자기 고등학교 시절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학창 시절을 대부분 무난하게 보낸 나였지만, 고등학교 시절만큼은 달랐다. 원하던 외국어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내가 꿈꾸던 '외국어' 고등학교가 아니라 그야말로 ‘입시’ 학원이었다. 같은 반 대부분의 친구들은 강남에서 비싼 개인과외로 한 학기 내지는 1년 치 공부를 이미 마친 상태라, 수업시간에 아예 엎드려 자는 경우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입시와 1도 관계없는 불어 수업시간은 잠자기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한 번은 소르본느 대학에서 음성학을 전공한, 나름 특별 초빙된 교수님께서 유명한 샹송 <고엽, La feuille morte> 가사로 음성학 수업을 한 적이 있는데, 우리 반 90% 이상이 넘는 학생들이 엎드려 잤다. 나를 비롯해 수업을 듣던 다른 두세 명의 친구들도 정말 무안할 정도였다. 차분한 신사의 느낌이 나는 할아버지 교수님이었는데, 그렇게 30분이 지난 후 아주 조용히 화를 내며 수업을 중단하셨다. 그때 그 교수님의 노여움과 슬픔이 아직까지 느껴질 정도다.


이것이 나의 고등학교 시절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 중 하나이다. 치열했던 입시과목 수업들 (국영수과)은 사실 잘 생각이 안 난다. 입시학교 분위기가 싫었던 나에게 가장 위안이 되는 두 가지는 불어 수업시간과 미술반 활동이었다.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그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는 '아름다움'에서 위안을 많이 얻었던 것 같다. 얼마 전 참가한 켈리최 회장님 (켈리델리 대표, '웰싱킹' 저자)의 '핵심가치 찾기'라는 워크숍에서 5가지 핵심가치를 선택해야 했는데, 나는 아름다움과 창의성, 탁월함 사이에서 매우 고민했었다. 그때는 탁월함을 선택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아름다움'은 나에게 중요한 가치인 것 같다. 지금 다시 고르라고 한다면, 고민 없이 '아름다움'을 선택할 것이다.




불어공부를 왜 하고 싶어 졌는지에 대해 쓰다가 왜 고등학교 얘기를 꺼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내가 꿈꾸었던 것과는 달랐던 입시학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던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진 않았다 ㅎ 소심한 반항으로 선택한 것은, 입시에 쓸데없는 불어공부와 그림 그리기로 나름 삐딱선을 타는 것이었다. 반항심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에서 위안을 받았다. 치열한 입시 현장에서 고득점이라는 실리를 찾아야 할 때, 나는 불어공부와 그림 그리기이라는 비실용적인 활동에 몰입했다. 고등학교 때 성적은 부진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의 영혼(esprit) 이 가장 맑고 빛났던 때였다고 믿고 있다. 


불어는 국제기구에서도 사용되고, 과학, 화학, 비즈니스에도 활발하게 사용되는 꽤 실용적인 언어이지만, 고등학교 이후 불어는 내 마음속에서 '비실용성과 삐딱선'의 대표 명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요즘 이 대표 명사가 수시로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아직은 경제적, 시간적 자유를 달성하고 있는 과정에 남아있기에, 그 고지까지는 한참 멀었기에 조금만 기다려줬으면 하는데 말이다.


나에게 퇴직 후 경제적 시간적 자유를 달성했을 때 뭘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불어를 가르치고, 글을 쓰고, 멋진 홈씨어터를 만들어 소규모 씨네클럽을 운영하고, 그림을 그리겠노라고... 그리고 체력이 허락한다면 몇 년 전 그만두었던 성인 발레도 배울 것이라고. 실리를 쫓는 활동을 뒤로하고, 그저 마음이 즐거운 일에 몰입해 아름다움을 쫓으며 살고 싶다고.




팬데믹 이후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공부할 것이 참 많다. 읽을 책도 많고, 배워야 하는 기술도 많고...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 바야흐로 자기 계발 열풍이 불고 있다. 내 주변에는 바른생활 루틴이 (구조화된 라이프스타일을 실천하면서 나의 삶을 통제하고 설계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나만 해도 바른생활 루틴이의 언저리에 가보려고 여러 커뮤니티 활동을 하고 있기에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은 나에게 본보기가 될만한 사람들을 계속 물어다 준다. 


미라클모닝(새벽에 일어나 독서, 글쓰기, 운동, 외국어 공부 등 자기 계발을 하는 것), 514 챌린지(14일 동안 새벽 5시에 일어나고 인증하는 챌린지)를 하며 갓생(신God과 인생의 합성어, 불확실한 미래가 아닌 명확한 현실 생활에 집중해 성실하게 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용량 초과에 허덕일 때도 많다 (나는 밤이 낮보다 찬란한 올빼미다). 회사 업무를 하다가도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지 고민이 될 때가 많다. 그들은 어떻게 회사일, 육아, SNS 활동들을 천재적으로 해내는 걸까? 내가 지지리도 느린 게 아닐까 자책을 할 때도 있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온라인 건물을 쌓고 팬덤도 부지런히 쌓아야 한다고 한다. 본업은 당연하고 부업도 준비해야만 100세 시대 노후를 살아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공부를 하고 있다지만, 나는 여기서 조금 도피하고 싶은 것 같다. 자기 계발, 인블유(인스타그램, 블로그, 유튜브의 줄임말), 온라인 건물주 이런 것 말고, 그냥 내가 순수하게 좋아하는 에 그냥 푹 빠져보고 싶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샛길로 빠져나가곤 했던, 삐딱선을 타고 싶은 불어의 마음이 발동해버렸다. 


작년에는 인스타그램에서 피드를 올리고 팔로워가 늘어나는 게 재밌었는데, 요즘 갓생을 사는 이들 가운데서 자극을 받으면서도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는 듯하다. 알고리즘의 파도가 조금은 덜한, 조용한 마음으로 글에 집중할 수 있는 브런치로 이사한 이유 중에 하나이다. 지금은 그냥 뭐라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때라서... 그다지 실용적인 생각은 아니지만, 이렇게 덕질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보물을 발견할지 또 모르는 일이다. 20여 년 전 현실 도피용으로 몰입했던 불어가 나에게 큰 위안을 안겨주었듯이, 그냥 지금 마음이 끌리는 것을 하다 보면 무언가를 우연히 발견 (serendipity) 할 수 있겠지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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