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를 갈라놓는 낡은 정치와 결별하며
진보정치는 청년을 버렸고, 청년은 진보정치를 손절했습니다. “청년이 중심이 된 진보정당”은 이제 옛말입니다. 현재 정의당의 청년 지지율은 60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주저앉았고 20대 지지율에서는 바른미래당에 밀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진보정치가 청년들에게 ‘무능한 정치세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보정치 스스로 ‘모두를 위한 정의’를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맹목적인 정치적 올바름에 사로잡혀 ‘다수의 약자가 단결해서 정치권력을 획득한다’는 건강한 권력의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청년과 대중에게 뿌리 깊은 세습사회와 불평등에 맞서 싸울 전망을 공유하기는커녕 시민들을 분열된 정체성으로 찢어 놓는데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빈곤층과 사회적 약자의 보편적 연대를 외쳤던 진보정치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빈곤청년과 성소수자에게 무서운 욕설과 혐오를 난사하는 세력을 ‘미러링’이라는 만능 요술봉으로 비호했기 때문입니다.
다수 청년이 겪는 고통을 경청하기에도 부족할 시간에 이들을 가르치려 들기나 하는 무지하고 오만한 정치. ‘누가 더 불쌍한 약자인지’를 경쟁하는 정치문화에 잠식당한 후 자신의 올바름을 자랑하는데 바빠 자기 일을 방기하는 게으른 정치. 청년들에게 조금도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정의당 의견그룹 ’진보너머’는 2016년 여름, 정의당, 나아가 진보정치의 지긋지긋한 악폐습과 결별 하고자 출범했습니다. 시민 사이의 혐오와 분열을 조장하며 엘리트 기득권층의 이익에 복무하는 ‘분리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정체성 정치’와 선을 긋지 않는 한 정의당은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하며 누구의 삶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출발했습니다. 또한 정의당 내 의견그룹으로서 대중을 갈라놓는 관념적 과격성에 단호히 반대하고 불평등과 세습에 맞서는 정치를 촉구해왔습니다.
이제 ‘진보너머’는 다른 누군가에게 대안적 정치를 요구하는 의견그룹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를 통해 대중 정치조직으로서 우리 스스로가 지향하는 정치의 주인이 될 것을 선언합니다.
대중을 갈라놓는 정치는 더 이상 진보정당 안에서만 벌어지는 찻잔 속 태풍이 아닙니다. 집권여당의 586 엘리트들은 대중 사이의 혐오와 분열을 조장하는 언행을 쏟아 냈고, 여성과 남성의 시민적 연대를 해치는 수십여 법안을 내놓는 데 앞장섰습니다. 2016년 여름의 ‘메갈리아 사태’가 한국사회 전체로 퍼져 나가는 양상입니다.
그러나 청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586 엘리트 정치인들이 동년배 여성들에게 갖고 있는 부채감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보다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 힘없는 청년들을 공격하고 분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청년들의 지지를 하나로 모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촛불민심이 요구했던 사회경제적 개혁에 앞장서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집권여당의 586 엘리트들은 우리 사회의 불공정을 근본부터 뿌리 뽑기를 바라는 대중의 기대에 역행하고 있 습니다. ‘박근혜가 물러난다고 내 삶이 바뀌냐’는 청년들의 질문에 여전히 동문서답으로 응답하고 있습니다. 각종 인사 논란을 통해 청년들은 확인했습니다. 그들이 교육과 부동산을 사회적 지위 세습의 수단으로 삼으며 현 체제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말입니다. 나아가 최근 집권여당의 상속세 완화 입법 추진은 불공정에 분노했던 대중의 열망을 다시 한 번 외면하는 기득권 정치의 정수입니다.
청년들의 실망과 분노는 집권여당에 대한 지지율 하락으로 나타났습니다. 당황한 586 엘리트들은 한가하게도 청년들이 ‘보수화’됐다고 불평합니다. 청년을 향한 터무니없는 공격과 훈계가 난무합니다. “잘못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며 청년들 탓하기 바쁘고, 20대 남성을 실험실의 기이한 연구대상처럼 취급합니다. 자신들은 얼마나 훌륭한 교육을 받았기에 저런 오만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청년들이 촛불집회에 앞장설 때는 ‘혁명의 주역’이고, 집권여당을 지지하지 않으면 ‘보수화’된 것입니까?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었습니다. 청년들이 보수화된 것이 아니라, 구세대의 ‘자칭’ 진보가 청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능해서 ‘손절’한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 영미권 청년들이 버니 샌더스와 오카시오 코르테스, 제레미 코빈과 같은 진보 정치인의 든든한 우군이 되었듯, 청년은 여전히 불평등 일변도의 참담한 세습사회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청년들은 ‘노동소득의 위축’과 ‘자본세습의 확대’로 대표되는 세습자본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입니다. 성실하게 땀 흘려 벌어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 앞에서 좌절감을 느낍니다. 사회진출 직후 수입의 대부분을 노동소득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의 불안정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당장의 고통스러움에 더해 스스로의 힘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기회마저 앗아갑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무색하게도, 부모보다 더 가난한 청년세대가 등장한 지 오래입니다. 세습과 불공정 일변도의 사회는 청년들에게 깊은 좌절과 분노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한 걸음씩 정치경제적 과두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청년은 물론 다수 대중의 삶이 불안정해지고 있지만 정작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결정에서는 소외되고 있습니다. 대중의 바람과 열망은 소수 언론, 기술관료, 자칭 전문가 엘리트 에의해 멋대로 재단되고 있으며, 이들의 의견 창구가 되어야 할 정당과 사회단체마 저 소수 인맥에 좌우되며 대중의 참여를 봉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진보정치는 대중이 불만을 느끼는 기성사회의 잘못된 모습을 내부에서 재생하고 있습니다. 불안정‧미조직 노동을 위한 사회경제적 대안은 물론 정치 참여의 기회조차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한 줌의 조직과 엘리트주의 성 향의 소수 논객 그리고 몇몇 명망 정치인의 인지도에 겨우 의지하는 정치세력으로 위축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진보정치는 청년을 마치 호주머니 속의 거스름돈처럼 취급하며 이들을 심각 하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청년이 원하는 진보정치는 청년을 약자·소수자 프레임 안에 가두는 정치가 아니라, 청년 다수의 힘으로 시민 전체의 삶을 바꾸는 정치입니다. 자신을 약자로 ‘배려’하는 정치가 아니라 현실 사회 속에서 ‘주권자’가 될 수 있는 정치 입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할당제’ 같은 동정 어린 조치에 고마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위선적’이라고 비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 놓인 청년 자신이 누구보다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정치와 이념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낡은 진보정치는 이러한 정치를 병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다수를 위한 행복을 금기시하는 뒤틀린 엄숙주의’, ‘대중을 향한 무례함이 급진적이라는 오만한 착각’, ‘자신도 일상에서 지키지 못하는 억압적 도덕주의를 시민들에게 강요하는 표리부동함’, 이제는 결별해야 할 진보정치의 오랜 후진성입니다.
‘진보의 위기’라는 진단이 등장한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과거 ‘반공주의 우파’처럼 다수 대중에 호소하는 보편적 정치 기획을 스스로 불온시해서는 안 됩니다. 청년 자신이 그러한 정치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진보 너머는 이를 위해 청년, 더 나아가 대중과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진보정치의 주요 원칙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정치적 올바름의 규범을 기계적으로 답습한 구세대 진보가 자의적 방식으로 설정한 ‘선량한 소수자·약자’ 대 ‘억압적 다수’의 대립구도 속에서 대중은 소수 엘리트의 계도를 기다리는 미성숙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정작 청년은 이런 허구적인 구도에 동의 하지 않습니다. 소수자와 약자를 배려한다고 자랑하는 이들 ‘현대판 바리새인’이야말로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례한 정치적 욕설과 비난을 입에 다는 위선자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불안정한 미래를 마주한 청년은 약자·소수자의 정의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어느 책상물림 엘리트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진보정치는 자신이 일상에서 지킬 수 없는 도덕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행태를 당장 멈춰야 합니다. 대신 우리는 모두가 일상에서 상호적으로 지킬 수 있는 진보적 도덕 과 시민적 규범을 제시하고자 하며 여기에 당장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손쉽게 비난 하기보다 설득할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사회적 안전망이 결여된 자본주의 시스템 안 에서는 누구라도 약자가 될 수 있으며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결국 다수의 권리를 구제하는 지름길이라는 대중의 암묵적 현실인식에 호소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대중을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을 신뢰하는 만큼 대중을 신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대중을 비판하는 만큼 우리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보너머’가 말하는 ‘좋은 정치’입니다. 이러한 좋은 정치를 추구할 때 한국의 진보는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사회 를 대중과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확대시킴은 물론, 경제적 자산뿐만 아니라 교육과 주거마저 대물림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대중은 사회적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위장전입을 일삼고, 고액과외와 도피성 유학에 돈을 아끼지 않으며, 자신이 평생 소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자산 축적에 열을 올리는 586 엘리트를 전혀 신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진보적 대안은 이들 엘리트만큼 영악하지 않아도 자녀에게 안심하고 물려줄 수 있는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입니다. 우리는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그 이상으로 교육, 의료, 주거 등의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진보너머’는 상속과 세습이 미래세대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불공정한 시스템에 단호히 반대합니다. 모든 청년이 자신의 출신배경과 무관하게 동등한 출발 선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으며, 지금의 처지보다 나은 미래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욕구를 긍정합니다.
다만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이 역으로 공정한 경쟁과 건전한 능력주의의 기초를 훼손 한다는 진실을 더욱 명확하게 알리고자 합니다. 또한 과도한 경쟁의 질서를 거부하는 사람들, 높은 지위보다 생활의 균형을 원하는 사람들도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사회적 보장책을 제안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념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고 비난받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보정치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대중의 무관심과 냉소입니다.
불평등과 세습이 당연시되는 질서를 무너뜨리고 진정한 자유·평등의 질서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대중의 참여와 아이디어 그리고 역량이 필수적입니다. 진보정치의 시급한 과제는 불평등과 세습에 대한 모든 형태의 불만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내어주는데 있습니다.
민주주의자인 우리는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획득 하는 유일하고 정당한 길임을 천명합니다.
지금까지의 진보정치는 이러한 민주적 게임의 룰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꾸로 정치적 ‘아싸’가 되는 데 힘을 허비했습니다. 스스로 고립과 분열을 자초하는 것이 마치 정의인 것처럼 착각했던 구세대 진보정치는 최근까지도 청년 내 젠더갈등을 부추기는 실책을 저질렀으며 결국 젊은 남녀 모두에게 외면 받고 있습니다.
보수는 보수대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진보정치가 방치한 분열을 더 벌려 놓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세습재벌, 부패 정치인, 엘리트 관료집단은 쏙 빼놓은 채 여가부, 민주노총, 민주화 운동 세대만을 청년의 ‘주적’으로 지목하는 자칭 ‘대안 우파’가 대표적입니다. 이처럼 보수는 청년이 마주한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청년의 여론을 양극화시키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회주의적 보수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단호히 맞서는 길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성소수자와 비성소수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지지할 수 있는 진보적 대안을 추구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경력단절을 고민하는 여성과 장시간 위험노동에 노출된 남성 모두가 지지할 수 있는 정의로운 대안 그리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다 수의 지지를 추구할 것입니다.
과거 민주화 운동세력과 진보정치는 군사독재와 싸우며 시민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테러방지법과 같이 시민의 자유를 제약하려는 일들은 어떠한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반대하여 시민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586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비판했던 보수세력처럼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시민적 자유를 제약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잡은 그들은 시민들의 안전을 위한다던 테러방지법처럼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인터넷 세계에 대한 국가개입의 범위를 늘리고 있습니다. 또한 형벌권의 무분별한 확장과 남용을 가 져올 법안들을 발의하고 있습니다. 진보정치 또한 이러한 일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할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당기위를 의견이 다른 이들을 제소하고 배제하는 일에 악용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권력의 칼날이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남용하는 특권층으로 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민들을 향한 감시와 검열을 거두고 이들에 대한 형벌권의 행사는 최소한에 그쳐야 하며 반대로 특권층과 세습부자를 향한 국가권력의 감시는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정치 역량을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에 집중시킬 것입니다. 청년이 기대하는 진보란 권력과 부의 불공정한 독점을 해소하고 다수 대중이 필요로 하는 주거, 의료, 교육, 일자리, 소득, 참여의 기회를 확대하는 것이지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강요하고, 대중의 표현을 검열하며, 자리 나누기에만 몰두하는 정치가 아닙니다.
오늘날 어떤 청년도 진보정치에게 세상의 모든 갈등에 개입하는 대법관 역할을 기대 하지 않습니다. 청년이 원하는 진보정치는 대중이 바라는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대중의 불만을 실질적 권력과 영향력으로 전환시켜 가장 중요한 문제에 집중시킬 줄 아는 유능한 정치입니다.청년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불평등한 세습사회와 정면으로 싸울 수 있는 정치세력이라는 신뢰를 줘야 합니다. 그러지 못할 경우 우리는 집권세력이 실수하기를 기다리면서 남는 시간에 남의 창작물을 검열하며 사과문이나 첨삭하는 볼품없는 세력으로 영원히 머물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새로운 진보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진보너머’와 함께 할 것을 제안합니 다. 우리는 진보의 낡은 문화적 관행과 결별하면서도 다수 대중이 원하는 사회경제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그 누구와도 연대할 것입니다. 지역과 캠퍼스의 고립된 세력으로 머물고 싶지 않은 사람들, 진보의 검열관 노릇에 이골이 난 사람들, 폐쇄적이고 자족 적인 정치문화에 염증이 난 사람들, 그럼에도 새 진보 정치를 꿈꾸며 진보정치에 대한 대중 참여의 문턱을 낮추고 싶은 모든 분들과 주저 없이 함께할 것입니다.
사회 변화의 열쇠는 목마르고 절실한 이들에게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이들입니다. 우리가 연대하고자 하는 이들 또한 변화에 목마른 이들입니다. 진보너머는 조직, 구성, 명칭 등 모든 것을 열어놓고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치의 플랫폼이 되 고자 합니다. 우리는 직접 진보정치의 낡은 관행을 바꾸고 한국사회의 불공정과 세습 과 싸우는 새로운 진보정치를 만들 것입니다. 우리가 잃을 것은 진보의 낡은 관습과 협소한 인맥뿐이며 얻을 것은 대중 전체와 ‘진보집권’의 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