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1%의 특권이야 이 바보야!
<공정하지 않다>의 공동저자 박가분(박원익) 진보너머 운영위원의 글입니다.
최근 <세습 중산층 사회>(조귀동 저), <불평등의 세대>(이철승 저), <20 VS 80의 사회>(리처드 리브스) 등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제기한 유명 저서들을 경유하여 상위 10%~50%까지 포괄하는 꽤 넓은 인구집단 혹은 세대집단을 (최근 부각된) 세습과 불공정의 원흉으로 지목하는 담론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다수의 인구집단을 싸잡아 낙인 찍는 것은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 중 한명으로서 <공정하지 않다>(박원익, 조윤호 저)에 이미 서술한 바이지만, 나는 세습구조의 문제를 다수 인구집단의 도덕성 내지는 문화적 관행 문제로 귀속시키는 이러한 탈정치적 경향에 대해서는 분명한 이의를 밝혀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왜 탈정치적 담론인지는 이하에 후술하겠다)
우선 지적되어야 할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러한 '세습 중산층 담론'이 1%와 99%의 불평등이 가진 분절적 양상을 희석시킨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발전해온 불평등 담론을 오히려 후퇴시킨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득 및 자산 불평등은 상위계층으로 갈수록 격차가 더욱 커지는 양상을 보인다. 다시 말해 상위 10%까지는 예측 가능한 수준의 격차가 관찰된다면 대략 상위 1% 전후부터는 격차가 격차를 낳으며 불평등이 가속화되는 영역에 진입한다(이른바 멱함수의 법칙).
2016년 국세청의 1000분위 근로소득 자료를 보자. 상위 50%의 1인당 연소득은 2400만원인 반면 상위 10%의 연소득은 7200만원이다. 꽤 크다고 할 수 있는 격차이다. 오늘날 유행하는 중산층(586 세대) 세습론 혹은 노동시장 내의 불평등에 주목하는 이들은 바로 이 격차에 주목한다. 하지만 노동계층의 상위 10%와 50% 사이에는 상당히 많은 인구집단이 완충지대로 존재한다. 반면 상위 10% 바로 위인 상위 1%로 가면 연소득은 1억 4천으로 불어나고 상위 0.1%로 가면 무려 12억으로 폭증한다. 즉 파레토 법칙이 시사하듯이 최상위 계층으로 가면 불평등의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다.
’슈퍼스타 경제학’은 최상위 계층으로 갈수록 불평등이 가속화되는 현상을 재능(talent)의 희소성 문제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연예계와 스포츠계 등 일부 영역에서만 일면 타당할 뿐 경영실패에도 고액보수를 받는 CEO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불평등 연구자들은 ‘권력의 집중’ 그 자체가 배후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것이 1%와 나머지 99%가 사는 곳을 서로 다른 '세계'로 만든다. 최상위 1%는 더 많은 소득과 자원을 가져갈뿐만 아니라 게임의 룰을 정하는 힘을 가진 계층이며 바로 그 점이 불평등을 가속화 시킨다. 반면 그 이하의 계층은 그들이 정한 게임의 룰 안에서 계층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해 경쟁할 따름이다.
이처럼 불평등 중에서도 최상위계층과 그 나머지 계층의 불평등은 차원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1%의 특권을 해소하지 않는 한 나머지 계층 간의 불평등 문제 해결도 요원하다는 것이 지금까지 제기된 진보적 주장의 핵심이었다. 예컨대 기업과 자본가의 일정한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자가 양보해야 한다는 분배논리의 틀 안에서 노동시장 상위 10%의 조직된 노동자와 그 이하의 미조직 노동자 간의 대립이 격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진보담론은 이런 '큰 그림'을 놓쳐서는 안 된다.
중산층 상당수를 싸잡아 세습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임금피크제 도입과 정년단축 등으로 전체적인 노동소득의 비중을 줄이고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보수적 기획에 악용될 위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연 7200만원을 버는 노동자의 임금을 깍고 정년을 단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연 2400 혹은 그 이하를 버는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고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1%가 일방적으로 정하는 분배와 게임의 룰에 저항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이것은 중산층 세습을 강조하는 논자들이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실천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이 '중산층 세습론'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중산층 내부의 도덕적 엄숙주의를 자극하는 자기만족적 논의에 그칠수 밖에 없다. 중산층 내부에서 세습구조의 지속 문제를 찾는 담론은 지금까지 유행했던 ‘내 안에 있는 (선량한) 차별주의자 찾기’, ‘내 안의 일베 찾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등 도덕적 부흥운동의 재탕에 불과하다. 물론 이러한 도덕적 자기검열에도 유익이 있다면 긍정할 수 있으나 나는 그러한 요점을 찾아보기 어렵다. 여기에 불평등에 맞서 싸우기 위한 실질적인 강령과 다수파 만들기 기획을 찾아볼 수 있는가?
이런 논의 구도 속에서 가능한 실천은 광범위한 다수파의 연대가 아니라 기껏해야 중산층이 자녀의 입시에 덜 관심을 가지거나 스스로 노동시장에서 일찍 은퇴하는 등의 소극적 대안 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만으로 불평등 구조가 해소될까? 애초에 그것이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실천 강령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기후변화의 책임을 대기업과 부자에게 묻는 대신 다수 대중에게 에코백과 텀블러 들고 다니기 운동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일부 환경주의자들의 논리와 유사하다. 물론 중산층 내부에서도 권한과 자원의 독점 등 내부의 불공정한 관행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평등주의적 분배의 룰이 미래세대를 위해 더 나은 길이라는 것을 설득하고 정치사회적 연대에 동참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왜 자꾸 중산층, 중장년층 등 다수 인구집단에 책임을 전가하는 담론이 유행하는가? 의문을 제기하기 이전에 이러한 유행의 진앙지가 다름 아닌 진보진영과 언론매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진보가 직면한 이념적 혼란양상을 볼 수 있다.
우선 진보 자신이 분배 문제를 급진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자신감과 전망을 상실한 것이 크다. 이것은 상위 1%의 특권을 억제하고 이들의 힘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겠다는 강령 대신 내부의 정치적 올바름(PC)을 단속하고 정체성 간의 대립을 부추기는 왜곡된 조류를 낳는다. 그리고 진보진영 내에서 최근 발언력을 높이는 미국 유학파 사회학자들이 (시카고 대학의 학풍 등으로 대변되는) 보수적 주류경제학의 방법론에 무비판적으로 투항해버린 탓도 크다. 즉 정치경제학적 관점의 결여가 진보의 탈정치화와 도덕적 교조주의를 부추기는 것이다.
진보 내에서 관찰되는 이런 잘못된 경향에 우리는 비판적인 시각을 놓치 말아야 한다. 다가오는 총선 시즌을 맞아 과거의 유명한 선거구호를 빌리며 이렇게 단언할 때가 됐다.
문제는 1%의 특권이야 이 바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