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너머 칼럼 기고
*편집자 주 : 진보너머 운영위원 박세환의 칼럼입니다. ‘대표적인 약자’를 설정하고 이에 대한 금기를 설정하는 좌파의 태도가 오히려 ‘약자들의 연대’라는 진보정치의 오랜 숙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바이든의 압승으로 예상됐던 미대선이 신승을 거두는 것으로 끝났다. 보수적 상식인에 가까운 리버럴에서부터 급진좌파들까지 잡다한 세력이 반트럼프의 기치 아래 똘똘 뭉쳐도 겨우 승리를 거둘 만큼 트럼프 지지층의 저변은 예상 외로 광범위하고 강고했다.
‘기성좌파로서의 진보’는 오늘날 왜 예전만큼 (적어도 오바마 당선 시절만큼) 기를 못 피고 있는가? 혹자는 진보의 정체성정치로 인해 좌파에 힘을 실어주었어야 했을 피지배계층 사람들이 사분오열을 일으켰고, 오늘날의 진보약화는 그 결과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진보의 몰락은 오히려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명분하에 “내부비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작되었고, 그 “내부비판을 금기시 하는 풍조”는 바로 그 ‘약자들의 대연정’을 향한 집착으로부터 나왔다고 말이다.
약자의 대연정. 이를 위해선 진보는 진보가 중시하는 어떤 가치들에 대해 내부적으로 비판해선 안 된다. 이를테면, 근래 메갈리아부터 시작된 래디컬 페미니즘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 등 고삐 풀린 언어에 대해 진보들이 속 시원하게 비판할 수 없었던 것엔 그러한 비판행위가 진보의 내부분열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한몫을 했다고 본다. 우리는 항상 힘을 모아 보수우파만을 공격해야 하기 때문에 ‘진보 내부요소’에는 설령 결함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모두 힘을 합쳐 이를 옹호 해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 편은 아무리 잘못했어도 비판해선 안 된다.”는 생각은, 비록 일시적으로는 진보진영에 도움이 되는 듯 여겨질지 몰라도 궁극적으론 반드시 진영 전체에 손실을 입히게 된다. 분명 잘못을 했는데 ‘같은 진보’라는 이유로 서로 쉴드를 치는 모습은 다수 대중에게 상당한 실망감을 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때 당장은 좀 아프다 해도 서로 잘못된 부분에 대해 깔끔하게 내부비판을 가하고 다시 재정비를 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 왔었다면 궁극적으론 더 많은 대중을 진보로 끌어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레디컬 페미니즘의 준동, 더 나아가 범세계적 PC주의(*정치적 올바름 - 편집주)의 범람 역시 같은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만 했다.
https://philomenabin.tistory.com/m/39
근래 들어 편협한 PC주의 규범에 대한 반감이 비단 보수우파뿐만 아니라 대중 사이에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경향이 관찰되고 있다. 트럼프에 대한 호불호와 별개로 이러한 경향은 바이든 이후의 세계에서도 지속될 것이다. 진보진영은 지지자들을 떠나게 만들 정도라고 예상되는 문제가 있으면 내부적으로 비판하여 이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충분한 비판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부작용은 트럼프 신드롬에서 브렉시트까지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중이다. 요컨대 내부단합에 대한 너무 강한 욕망이 집단의 정상적인 자정기능을 무너뜨린 것이다.
단순한 전략적 측면을 떠나서라도 이러한 ‘대연정’ 논리는 문제점을 가지는데 대연정이라는 명분 하에 종종 내부갈등에 의한 상처를 너무 쉽게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영화 <조커>에 나오는, 가난한 백인 남성 주인공과 흑인 여성 사회복지상담사 간의 대사를 상기해 보자.
“세상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관심 없어요.”
“알아요. 근데 당신도 나한테 관심 없었잖아요.”
진보좌파가 자신들의 관점에 의해 인위적으로 설정해 놓은 “약자연합”내에서도 상호갈등이란 것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약자연합’을 중시하는 이들은 가장 중요하다고, 그리고 가장 원망스럽다 생각되는 표적 하나를 제외하곤, 다른 모든 갈등들에 대해선 서로 함구할 것을 종용한다. 사실 이건 굉장히 오만한 이야기 이기도 하다. A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갈등이 무엇인지지, 누가 가장 원망스러웠는지에 대해 왜 A가 아닌 B가 결정하려 드는가!
PC주의/정체성 정치가 조성하는 위화감은 가장 대표적인 피해자/희생자/약자에 대한 '절대적 금기'를 설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PC주의/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을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약자설정 그 자체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단지 ‘약자집단을 다양한 정체성으로 분열시키려 했던 것이 잘못’이라는 식으로만 얼버무리는 관점은 무척 아이러니하게도 오래 묵은 PC주의자들의 병폐를 고스란히 답습한다. 그들도 “누구에게 더 많이 분노해야 하는지”, “누구에겐 참아야 하는지”에 대해 은연중에 설정하고 지시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연대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연대의 필요성을 알기 때문에 “몇몇 사람이 구도를 너무 인위적으로 설정해서 다른 구성원들에게 강요하려 들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구성원들 간의 더 강한 연대를 위해서라도, 내부이견 및 불만 표출은 어느 정도 용인 되어야만 한다. 충분히 털어놓고 논할 수 있어야만 한다. 거기서 나오는 불만과 갈등은 ‘억압’이 아니라 ‘해소’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진정한 약자들의 연합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이들 각자의 다양한 사연에 동등한 가치를 두고 존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더 ‘중요한 싸움’을 위해 내부의 갈등을 접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 정당성은 집단 내 다수로부터 정당한 방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만 한다.
PC주의자들을 포함에서, 걸핏하면 ‘더 중요한 싸움’을 언급해온 진보진영이 오늘날 힘을 잃어가는 것은, 그 ‘중요한 싸움’의 설정을 매번 소수 지도그룹 엘리트들이 마음대로 해왔기 때문이다.
야스차 뭉크는 <위험한 민주주의>에서 정치 엘리트들이 제도의 힘을 앞세워 유권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리고 대중이 정치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축소시키며, ‘비민주적 자유주의’를 자행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저자는 이것이 극단적 포퓰리즘만큼이나 위험하다고 진단하는데 독단적 의제설정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기초부터 갉아먹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이 마음대로 설정한 그 적대구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거부를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 개인의 흥망과 별개로 장담컨대 ‘그 거부’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늘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