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절실한 전태일의 외침 - 전태일 열사 50주기에 부쳐
진보너머 조윤호 운영위원의 글입니다. 진보너머는 전태일 열사의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A Single Spark” 청년 전태일의 일생을 다룬 95년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영어 제목이다. 이 제목 그대로 전태일 열사는 대한민국을 진보하게 만든 불꽃이 됐다. 가슴에 근로기준법 법전을 품고 스러진 22세 청년의 죽음은 경제성장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삶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정치민주화 투쟁에 집중하던 한국의 진보 세력에게 경종을 울렸다.
전태일이라는 불씨는 서서히 대한민국을 바꿔놓았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끌려가 고문 당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주40시간’ 법정 노동시간이 생겨났고, 근로감독도 과거에 비해 엄격히 이루어진다. ‘노동존중’을 기치로 내세우는 정부가 집권해 (비록 누더기가 되었지만) 주52시간 근로제를 약속하고, ILO 협약을 비준하는 시대가 됐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새로운 ‘청년 전태일’도 생겨나고 있다. 특수고용, 하청, 비정규직까지, 이들은 자신의 노동을 노동으로 불러 달라며 싸운다. 많은 청년들에게는 ‘일하는 사람의 권리’를 넘어 ‘일할 권리’가 절실하다. 노조한다고 잡아가진 않지만 뿔뿔이 흩어져 일하는 노동환경으로 인해 노조를 만들 수 없는 노동자들이 태반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태일의 외침이 울림 있는 이유는 그의 질문 때문이다. 그는 1969년 12월 19일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묻는다. “오늘날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번영을 이룬 것이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상업기술의 결과라고 생각하시겠습니다만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대한민국 청년들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자동차부터 스마트폰까지 못 만드는 게 없는 나라에서, 4차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을 이야기하는 나라에서 왜 한해 2000명의 김용균들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까? 플랫폼 경제는 성장하는 데 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습니까? 이러고도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은 전태일의 외침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행복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청년 전태일의 질문이 해소되는 만큼 대한민국은 한 발 더 나아갈 것이다. 산업화를 자랑스러워하는 보수파들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국민의힘 윤희숙 의원은 “조금의 일거리라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절박했던 시절에 현실과 철저히 괴리된 법을 만듦으로써 아예 실효성이 배제”됐다며 전태일을 마치 비현실적인 근로기준법에 헛된 희망을 품고 아까운 목숨을 버린 사람처럼 묘사했다.
윤 의원 말대로 그렇게 절박했던 시절에도 왜 수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의 외침에 공감하고 분노했을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던 전태일의 외침이 가장 상식적이면서도 가장 급진적인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전태일은 다수 시민의 상식과 급진적인 주장이 만날 때 세상이 진보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낸 나라’라는 수식어는 전태일의 외침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전태일에게 배워야할 것은 명백하다. 그는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도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곤궁한 처지였음에도 재단사인 자신보다 안 좋은 처지에 있는 재단보조 여공들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함께 싸웠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바꿔낼 때 모두의 삶을 바꿀 수 있고, 다수의 연대를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더욱 전태일 정신이 절실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