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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보너머 Dec 31. 2020

부덕한 정치의 도덕적 이상주의

왜소화된 자아에 기댄 도덕적 결벽은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않다

편집자 주: 진보너머 회원 류호성의 기고글입니다.


1. 겉보기보다 왜소한 자아를 가진 세대


2020년 오늘날 기성세대는 청년세대를 매우 강한 자아를 가진 개인주의자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그들이 그려내는 청년세대에 대한 인상, 특히나 긍정적인 인상은 바로 이러할 것이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국제경험이 많아 세계화에 앞장서며, 온라인 활동에 유능하여 다양한 이슈에 참여하고, 자기 스스로에 대해 강한 확신과 자신감을 가진 개인주의 세대.’


이런 판단이 어느 정도는 기성세대에게 청년들과 달리 본인들은 세계화와 온라인화에 뒤처졌다는 패배감과 무력감을 안기는 듯 보인다. 본인들과 달리 젊은 세대가 한편으로는 개인주의에 젖어 제멋대로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본인들이 다가가지 못하는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유능한 신세대로 여겨지는 것이다.


반면 진보층 일각에서는 바로 이러한 강점을 청년세대가 추구할 새로운 진보, 그리고 진보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하나의 토대로 부각하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리하여 갈수록 노동 의제와 빈곤 의제가 화제성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에, 진보는 새로운 세대에게 ‘코스모폴리턴한 정체성을 갖고 다양성·교차성 이슈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온라인 투사’로서의 자아상을 갖길 주문하고 독려한다. 더 나아가 무엇보다도 진보·좌파의 핵심인 자본주의 비판은 놓치지 않기 위해, 이러한 다양성·교차성 이슈를 우회로로 삼아 시장자유주의를 공격하고, 자본주의의 체질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서 분명 이것은 이상적이고 참신한 자아상을 담고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에서 순전히 원하는 대로만 작동할 수 있을까. 만일 현실에서 잘 작동하지 않는 이상이라면, 유감스럽게도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기성세대의 선입견과는 사실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청년세대의 다른 면모에 대해 성찰해보고자 한다. 아마 그것은 많은 부분에서 기성세대의 가치관, 기성세대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함께 공명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코스모폴리턴한 정체성을 가진 진보’와는 조금 결이 다른 진보를 제안하고자 한다. 


청년세대, 특히나 냉전 종식 이후 성장한 세대는 탈정치화되고 탈이념화된 사회환경에 익숙하다. 이것은 어떠한 가치나 이념에도 매여 있지 않은 개인주의적 자아가 성장하기 좋은 환경인 듯 보인다. 이념의 공백 상태가 청년들의 강한 자아를 보장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개인주의적 자아는 사실 생각보다 강하지 않으며, 왜소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무엇이 이러한 왜소한 자아상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여기서는 대체로 수긍할 수 있을 법한 세 가지 요인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이전 세대보다 유례없이 진전된 세계화와 더욱 세밀해진 행정 시스템이 있다. 세계화의 진전은 개인주의적 자아가 자기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무대가 더욱 넓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대해진 세계화는 항상 더욱 거대해지고 추상적으로 변해가는 권력 구조와 함께하곤 한다. 대단히 거대해지고, 개개인의 의식과 활동만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행정 시스템과 경제 체제가 그 중심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공적 영역에 참여하여 자신의 삶과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효능감은 줄어만 갈 수밖에 없다. 확장된 세계와 대비되는 무력한 자아가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모든 청년세대가 세계화의 흐름을 탈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일반화일 뿐이다. 세계화의 흐름에 탈 수 있는 청년과 그렇지 못하고 남겨진 청년으로 또다시 갈라질 수밖에 없으며, 청년세대를 세계화 세대로 등치 시키려는 선입견은 후자의 청년들에게 극심한 소외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선택의 자유를 가진 독립적 자아로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이해력과 통제력에 좌절을 안겨주는 비인간적 권력 구조들이 지배하는 세계와 마주하고 있다. (중략) 우리는 자력으로 이 세계와 대결하려는 순간 우리 자신이 압도적 열세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민주주의의 불만』, 2012.


왜소한 자아를 만드는 두 번째 요인으로 청년세대는 생애 초기부터 이전보다 더욱 격해진 경쟁과 마주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더욱 줄어든 일자리와 안정적 삶을 위한 기회로 인해 청년세대는 더욱더 피폐해진 자아상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치열한 경쟁 속에 고립되고 상처받은 개인주의의 부정적인 모습이 부각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경쟁 앞에 다른 가치들이 취약해진다는 점이다. 즉, 치열한 환경 속에서 내면화된 경쟁의식은 다른 가치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진보적 가치는 언제나 효율성 앞에 도전을 받지만, 끝끝내 효율성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게 되는 가치들이 도처에 있다. 청년세대의 많은 이들이 판단하기에, 개인의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경쟁에 의문을 표하기보다, 경쟁에 과감히 뛰어드는 편이 낫다. 가능한 한 더 빨리. 이런 과정을 통해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고 계발할 영역은 협소해지게 된다. 많은 사람은 이 모든 현상을 ‘신자유주의’라고 불렀다. 


물론 이것은 흔히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일견 긍정적인 면모도 있다. 경쟁이라는 가치의 일원화는 여타 가치들이 담고 있던 낡은 요인들, 청산하지 못한 요인들이 허물어지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한다. 즉, 출신·소속·성별·인종·나이 등 정체성 요인을 불문에 부치고, 효율적인 흐름에 방해가 된다면 모두 허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멈춰서 이것을 진보적 가치의 승리로 자축하기만 한다면, 결국 더욱더 탄탄해진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의 승리를 방관할 위험이 있다. 샌델은 이렇게 설명한다.


 “의회에 고학력자가 많기는 했지만 1960년대만 해도 상원의원 사분의 일과 하원의원 사분의 일이 비대졸자였다. 그리고 지난 50년 동안 의회는 인종, 민족, 성별에 있어서는 더 다원화되었다. 그러나 학력과 출신계층에서는 훨씬 일원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의 한 가지 결과는 ‘노동계급에서는 아주 극소수만 선출직에 몸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정하다는 착각』, 2020.

 


미국보다 대학진학률이 높은 우리나라에서도 본질적 측면은 다르지 않다. 청년들은 사람을 다른 어떤 정체성 측면으로 판단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경계 받지만, 이와 반비례하여 학벌과 직업, 지능과 경쟁력으로 판단하는 경향은 강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높은 대학진학률 속에서 ‘지잡대’는 비껴갈 수 없는 비하 표현이 되었다. 또 정체성 정치 속 대립에서 반대자들을 꺾어 누를 수 있는 유일하고도 요긴한 수단으로 경쟁력과 능력주의를 활용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슬프게도 인종, 민족, 성별의 장벽을 극복하자고 외치는 정체성 정치는 모든 이들에게 장벽을 통과할 허가증을 내주지는 않는다. 오로지 경쟁에서의 효율성에 주안점을 두고, 이를 확보할 수 있는 이에게만 허가증을 내주는 것이다. 남겨진 사람들의 박탈감은 정체성 정치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 되는 듯 보인다.


비대해지는 세계화와 경쟁의 심화. 이처럼 왜소한 자아를 만드는 이 두 가지 요인은 진보적 운동의 시각에서 볼 때 ‘무자비한 자본주의의 횡포’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때문에,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투쟁을 대상으로서도 퍽 적합해 보인다.


나는 왜소한 자아를 만드는 마지막 요인으로 온라인·SNS 시대의 갈등을 제시하고 싶다. 한때 트위터와 같은 SNS는 새로운 시대에 민주화와 같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소중한 무기로 언론과 정계에서 주목받은 바 있다. 그러나 이제 청년세대에게 SNS와 온라인 공간은 새로운 정치적·도덕적 투쟁의 장이 아니라, 정치적·도덕적 이상의 상실을 확인하는 장이 되고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도입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이지만, 우리는 끊임없는 비방과 모욕, 정치 선동과 저속한 표현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경직된 사회와 대비되게 갑자기 폭이 넓어진 온라인 커뮤니티는 자유와 민주주의보다도 인간 내면의 추한 본성, 극복할 수 없는 욕망, 타인에 대한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직시하도록 한다. 이 가혹한 현실은 청년세대가 ‘이상적인 인간관’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도록 만들고 만다.


기성세대는 청년세대가 보수화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청년들은 여전히 진보적인 사고에 익숙하다. 그러나 이런 익숙함은 그 이전의 이념적 확신에 찬 민주화 세대나 자유롭고 자신감 넘치는 90학번 세대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청년세대는 이전 세대들과 달리 전혀 적극적이지도 못하고, 전혀 당당하지도 못하다. 우리는 ‘우리가 정의이며, 그래서 우리는 당당할 자격이 있다’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온라인과 SNS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점차 익명 속에서 솔직해지고, 서로를 통해 본인들 스스로를, 그리고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를 잘 이해하게 되었다. 누구나 순결하고 결백한 체하려 하곤 했지만, 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망으로 가득 차 있고, 다른 사람들을 내심 깔보고 업신여기며, 때로는 정체성 갈등 속에서 극단적인 가치관에 흡족함을 느끼기도 한다.


다들 그런 못난 모습과 못난 생각을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체면이라는 가면이 아니라 익명이라는 가면으로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온라인을 통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솔직해질 수 있다. 내가 아무리 누군가를 어마어마하게 혐오한다고 말한들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알 수도 없고, 사실 내가 누구여야 하는지도 크게 관심이 없을 테니까.


사람들의 솔직하고도 추한 내면이 속속들이 온라인에 퍼져나가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불완전하고 못났다는 것을 어떤 핑계나 위선으로도 감출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수하게 도덕적인 삶은 불가능한 것이다. 도덕적 인간이라는 이념은 사정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이 지점이 기성세대와 청년세대가 가장 크게 달라지는 지점인 것 같다. 민주화를 이룩한 한국의 진보가 청년세대를 대하면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아마 이런 것이 될 것 같다. 아무리 사회가 진보하더라도, 기성의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의 모습에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으며, 사실 그렇게 되도록 강제로 등을 떠미는 사회가 어느 정도는 병적인 사회인지도 모른다는 것 말이다.


이러한 감정은 청년세대 여성에게선 기성 유교 윤리와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도덕에 대한 거부로 나타나게 되었고, 청년세대 남성에게선 그러한 윤리에 대한 저항감과 더불어 지나치게 언어교정의 도덕을 요구하는 정치적 올바름 또한 거부하는 방향으로 표출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실 이들 모두 표현은 강력할지언정 도덕적 인간에 대한 더 나은 비전은 갖고 있지 않다. 그 빈자리는 오로지 교화된 엘리트주의의 인간관이 메우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그 도덕이 요구하는 것처럼 완벽한 정서로 고양될 수도 없고, 진정으로 그것을 체현할 수도 없는 굴욕적인 자아상이 자리 잡고 있다. 



2. 탈도덕화된 신자유주의의 미봉책 

 

진보의 본래 목표는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교정’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의 실현에 방점을 두는 것이었다. 즉, 시스템의 개선이었다. 본래 진보는 종교나 애국심과 같은 거대한 도덕체계에 맞서 양심에 대한 자유를 요구했고, 그다음에는 자본주의의 인간소외와 착취에 맞서 인간성의 회복을 요구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양심을 주입하려는 거대권력의 시도와 반대편에 있었다. “권리의 평등화가 아니라 마음을 평등하게 하려는 전체론적 통제는 진보의 종말을 의미한다.”(칼 포퍼, 『역사법칙주의의 빈곤』)

 

점차 대학가 진보주의자들이 그리는 더 나은 사회란 모든 이들이 탐욕을 부리지 않는 사회, 모두가 차별의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사회, 민주적으로 의식화되어 있으며, 관용이 넘쳐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회 정도로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성을 왜곡하는 잘못된 사회 구조 때문이라는 분석이 필연적으로 뒤를 이었다.

 

처음에 그 잘못된 사회 구조란 정확히 자본주의와 미국 중심의 세계화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논리가 빈약하다. 자본주의의 극복이 곧장 도덕적으로 더 완전한 인간을 약속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제는 자본주의가 가부장제, 인종주의, 제국주의, 종교차별, 호모포비아 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 중 하나의 고리를 끊어내면 나머지도 연달아 허물어져 더 나은 사회가 실현된다는 방향으로 논의를 확장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먼저 청산하자는 목소리보다는 다양성·교차성의 요구를 먼저 충족시키자는 쪽으로 균형점이 이동하는 것 같다.

 

(사실 개인적으로 다양성과 얽힌 이런 모든 문제가 다시 자본주의로 연결되고, 자본주의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방향은 여러모로 무리가 많다고 생각한다. 논리적 연쇄에 따라 교차성에서 반대항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본주의적 폭력의 공모자로 몰아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를 잘못된 사회 구조 탓으로 돌려버리게 되면, 사람들이 가진 못난 모습들도 왜곡된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 왜곡된 삶의 모습들로 쉽게 그려질 수 있다. 그리고 사회가 올바르게 돌아간다면, 사람들 마음속에 내재한 부도덕한 가치관도 사라지리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는 주로 사람들의 본성이 이타적이고 선할 것이라는 전제를 따른다. 사회 구조가 바르게 잡히면 이런 이타심이 사회 속에서 잘 발현되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점차 사람들을 옥죄게 된다. 결국, 진보주의자들은 바람직한 이상사회를 꿈꾼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이상적인 인간이 되길 은연중에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쉽게 인간성에 대한 교정과 계몽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인간관에 비교해보면 우리는 모두 한없이 추하고 못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청년세대는 자조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사실 이기주의자이고, 때로는 상대방을 차별하면 우리 쪽이 더 유리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열성적인 진보라도 마음속에 깃든 본성을 억누르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 나는 사실 그들 나름의 도덕적인 결단을 통해 아직 교화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모종의 우월감을 누리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사실 진보 진영에서 전매특허처럼 활용해왔던 공감이라는 무기 역시 도덕적 폭력이 될 수 있다. “공감은 마일리지 같은 것이어서 누군가에게 쓰면 다른 이들에게는 줄 수 없다. 내집단(in-group)에 강하게 공감했다면 그만큼 외집단(out-group)에 공감할 여유가 소멸된다. 심지어 내집단에 대한 공감이 외집단에 대한 처벌로 이어진다는 심리 연구도 있다(장대익, 「공감은 언제 폭력이 되는가」, 2020).” 가슴 아프게도 이런 현상을 진보 진영의 세계를 뒤덮은 모든 정체성 정치의 담론에서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 속에서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2012150300065#c2b


나는 이것이 단순히 어떤 시스템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인류의 전 역사를 통틀어 사람 마음의 은밀한 구석에 숨겨진 욕망이나 본성이 전혀 변함없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모든 걸 자본주의 탓으로 돌릴 순 없다. 진보주의자들의 높은 수준의 도덕심과 완전한 인간상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나 수구적 사회 구조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현상 자체가 문제일지 모른다. 


청년세대의 과열된 경쟁과 거기서 비롯된 많은 문제가 물론 청년들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겠지만, 그러한 문제가 해결된다고 전적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순 없을 것이다. 문제라면 차라리 너무 높게 설정된 도덕 수준, 너무 완벽한 인간상이 문제일지 모른다. 우리는 못나고 추한 본성을 인정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진보를 믿고 싶을 뿐이다. 


이와 달리 진보가 그동안 대립해왔던 자본주의는 탈도덕성의 욕망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새삼스럽게 어떤 도덕심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신자유주의라 부르는 그것은 노골적으로 인간 본성을 불신하고 이기심과 탐욕을 긍정하는데, 그에 반대되는 어떠한 도덕관도 결국 인간 본성에 반하는 지나치게 이상적이기만 한 몽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이타심을 정력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을 비웃는다. 또 적극적으로 이기적인 본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게 분명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거라고, 사실 모든 사람이 이타적으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려면 너무 지나치게 본성의 억압이 요구되기 때문에, 더 나쁜 사회가 되고 말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 속에는 이기심과 이타심이 모두 인간 본성에 혼재되어 있겠지만, 그중 본질적인 것은 이기심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논의에 따라 청년세대는 각박한 사회가 필연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요구받는다. 신자유주의의 강점은 ‘어쩔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인간 본성을 고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태생적인 이기심을 하나하나 포착해서 제거하기란 힘든 노릇이고, 그렇게 하면 사회 전반적으로 검열하는 분위기가 우세해질 뿐이니까.


한편 신자유주의는 어떠한 도덕관념 앞에서도 사람들은 평등하게 서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다른 모든 속성을 부차적인 것으로서 불문에 부치게 된다면, 모두가 동등한 입장의 인적 자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저 인적 자원으로서 경쟁력을 추구하는 한, 종래의 전통적 정체성 역할에 기대어 사람들의 행동을 재단하려는 태도는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 세계화 사회의 엘리트들은 인종·성별·종교·출신·외모·장애 등을 갖고 사람을 구분 지으려는 태도를 거부하게 된다. 전통적인 문화와 관습, 그리고 그것을 담지하고 있는 도덕체계는 힘을 잃는다.


이러한 방면에서 신자유주의는 상당한 미덕을 가진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개인주의의 관점은 상업주의가 발전하여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게 됨에 따라서 인간 개개인이 오히려 자신의 취향에 따라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아울러 갖게 되었으며 또한 지식과 교육의 기회도 크게 확대되는 기회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중략) 즉 신자유주의에 의할 경우, 개인의 자유는 정치적 자유보다는 오히려 취향에 따른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개인의 능력을 존중하는 개인주의를 지지하는 경제적 자유에 의해서 확보된다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박광기,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의미와 대안 모색」


오늘날 미국 보수세력은 레이건 시대의 불문주의라는 경험을 살려 소수자 정체성을 상당수 포섭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저 도덕은 내려놓고 개인의 경제적 자유와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누리자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한국의 보수 역시 이것이 정치공학적으로 꽤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탄생시킨 것도 보수정당이고, 최초의 이주민 국회의원을 탄생시킨 것도 보수정당이었다. 최초의 탈북자 국회의원도 같은 정당에서 나왔다. 전혀 문제 될 것 없다.


반면 유감스럽게도 진보가 더욱더 도덕적 인간성을 요구하는 집단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기 시작하고, 그 도덕적 인간성이 언어교정을 내면화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찬미하는 코스모폴리턴 정도로 국한되기 시작하면서 더 난처한 국면에 처할 위험이 있다.


안타깝게도 차별과 혐오야말로 정확하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인상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 주는 집단이 바로 진보 진영인 것 같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진보가 거꾸로 자신의 사회적 우월감을 내비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충분히 정치적 올바름을 내면화하지 못한 사람들을 경멸하고 혐오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발언을 내뱉어 당사자들에게 굴욕감과 수치심을 안긴다. 그런데 어느 방향이든 차별과 혐오가 소수자에 대한 차별 철폐를 위해 굳이 노력하지도 않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정책에 의해 차차 옅어져 간다 어떨까. 그것이야말로 정치적 올바름에 기댄 진보 진영에겐 당혹스러운 노릇이 될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자신의 대선 전략을 평가 반성하면서 자신의 패배에 기여했던 능력주의적 오만을 드러내보였다. (중략) 그녀는 세계화 승자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트럼프는 '루저들'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한때 특권층에 맞서 농민과 노동자의 편에 선 바 있다. 그러나 바야흐로 능력주의의 시대에,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섰다가 패배한 사람이 ‘그래도 나는 미국의 부자와 고학력자들의 지지를 얻었다’라며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2020.


신자유주의는 공정한 능력주의와 불문주의를 지향하는 한편, 문화적 세련됨을 선용하기도 한다. 이를 바탕으로 문화적 세련됨을 향유할 능력을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사회적 멸시가 주어지게 된다. 오늘날 문화적 세련됨이란 곧 다양한 정체성 배경을 가진 유능하고 유쾌한 사람들의 결합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방향성을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는 정체성 정치가 무기력하게 따라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계화와 경쟁 사회에 뒤처진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문화적 세련됨을 위해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비용이 필요하다. 이는 결국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들에 대한 문턱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고, 아비투스(habitus) 형태로 고착화될 위험이 있다. 



3. 코스모폴리턴 엘리트 유형을 향한 획일화 


196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은 공공장소에서 흑인들을 백인들과 구분하는 짐 크로법을 폐지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또 1969년 스톤월 항쟁은 미국에서 더 경찰들이 성소수자들을 단속하고 겁박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점차 관용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이것은 의미 있는 역사의 변화를 일구었다.


2017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는 1,500명가량의 시위대가 건물 한 동을 점거하여 트럼프지지자의 연설을 방해한 일이 있었다. 그가 인종차별주의자이며, 그가 캠퍼스 내에서 발언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는 심대한 폭력이라는 이유였다. 시꺼먼 옷을 껴입고 얼굴에 복면을 덮어쓴 이들 시위대는 감정이 격앙되어 한 여성과 그녀 남편을 철제 난간에 붙들어 매고는 깃대로 두들겨 패기도 했다. 결국 이들의 시위는 성공하여 발언자는 연설을 포기하고 떠나야만 했다(조너선 하이트, 그레그 루키아노프, 『나쁜 교육』, 2019). 


이런 움직임에 재빠르게 자극을 받은 한국의 대학가 역시 비슷한 일을 치렀다. 2019년 고려대학교에서는 학생회에서 한 남학생이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게 일반적 인식”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호모포비아로 몰려 학내외의 전방위적 비난을 받고 결국 사과문을 게재해야만 했다. 같은 해 서강대학교에서는 동기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너 정도면 예뻐”라고 말한 학생이 여성혐오자로 몰려 학생회 차원의 징계를 받고 추방당했다. 


이런 것은 의미 있는 역사의 변화를 만들지 못한다.


정치적 올바름에 기초한 진보의 정체성 정치는 오늘날 황혼 무렵에 와있다. 갈수록 효능감이 떨어져 가는 정치적 올바름은 이제 과거의 진보와는 달리 더욱더 작은 영역에서 더욱더 미세한 작용들을 교정하면서 스스로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그러한 교정의 효과를 가시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공격받는 상대방을 더욱더 악의에 가득 찬 패배자로 묘사하는 데 치중하게 된다. 그리고 자꾸만 꼬투리 잡기와 행실 지적, 언어교정에 덧붙여 말속에 독을 심어 되돌려주는 효과에만 집착하다 상대의 진심을 이해하는 방법을 잊어만 간다. 



갈수록 도덕적 인간성에 대한 시야가 좁아지고, 미세한 영역에서 개인의 의사와 성격을 교정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인 귀결로서 대단히 폭이 좁은 성격 유형을 사회적으로 강요하게 된다. 다양성을 지향하는 정체성 정치가 되려 어떤 특정한 단일 성격으로 청년세대를 이끌며 진정한 다양성을 희석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나타나는 사회는 피부색과 성별은 다를지언정 성격 유형은 서로 다를 것 없이 비슷한, 새로운 형태의 획일화 사회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성격이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고 완벽한 성격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내심 누구도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상을 더는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하여 권장되는 인간상을 ‘코스모폴리턴 엘리트 유형’의 인간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코스모폴리턴 엘리트는 사실상 도덕적으로 올곧고 선한 인간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환경에 발빠르게 적응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자신의 문화적 세련됨을 음미하는 유형의 인간이다. 그는 후일 골칫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항상 철저하게 입단속을 할 정도의 여유가 있다. 그는 그저 덜 친절한 표현을 입속에 가두고 검열하는 약삭빠르고 처세에 능수능란한 유형의 사람이 될 것이다. 자신의 발언권은 항상 교차성 축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게 된다. 그것이 배경이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코스모폴리턴의 미덕이다. 어쩌면 너무나 슬프게도, 진보주의자들이 찬미하는 이러한 유형의 성격은 정확하게 신자유주의적 인간상을 향하는 것일지 모른다. 


내가 접해본 그런 유형의 진보주의자들, 정치적 올바름에 기초한 정체성 정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두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진 채 자신의 좁은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가 외치는 이상적 인간상, 코스모폴리턴이면서 도덕적으로 배려심이 넘치기까지 한 유형의 인간상에 비교하면 자신이 너무나 볼품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그런 인간상에 근본적으로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한 본성, 차별의식에 젖은 본성에 굴욕감을 느끼며 때로는 죄책감과 우울감에 빠지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내가 해주고 싶은 충고는 사람이란 누구나 자신의 현실적 삶에 처해 있으므로, 모든 차별과 혐오를 뛰어넘어 완벽한 인간상이 되려는 시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구체적인 인간으로서 함께 연대하면 좋겠다. 


세상에는 말실수가 잦은 사람이 있고, 눈치가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견문을 넓힐 기회가 없는 사람들도 있고, 자기 나름의 상처에 젖어 멀리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코스모폴리턴 엘리트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한 사람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걸까. 새로운 시대의 능력주의는 갈수록 어수룩한 유형의 사람들에게 잔인하고 힘겨워지는 것 같다. 이런 분위기 일변도의 정치는 결국 이러한 엘리트의 성격을 내면화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경제 지위상의 박탈감과 동시에 도덕적 수치심마저 안길 수 있다. 


정체성 정치는 우리 삶의 모든 국면을 말해줄 수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것이 우리의 모든 것을 재단해줄 수 있다는 환상을 갖는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에서,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경험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정치적 올바름에 기초한 정체성 정치는 구체적인 상처를 몇 개 축의 교차성으로 침묵시켜 버리고, 정체성에 대한 장벽 철폐를 통해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그것이 정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능력주의 시대의 엘리트들에겐 너무 편리한 도식이 된다. 


모두가 구체적인 이유로 상처를 입었는데, 구체적인 해법으로 풀어나갈 상상력은 점차 상실된다. 모두를 총합해서 ‘기득권에 의한 억압’이라고 말한다. 아마 코스모폴리턴 엘리트의 성격을 내면화한 사람들은 좀 더 깊이 있는 인간적 아픔을 진실성 있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체성 정치는 이제 교차성의 16개 축 상에서 억압받는 피해자 그룹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난관은 끝났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아직 소진되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나 코스모폴리턴이 되지 못하고 자신이 처한 토착성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슬픔은 구체적이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는 구체적이라기엔 너무나 건조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그 끝에서 신자유주의의 능력중심사회와 손을 맞잡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서 전반적인 사회가 슬픔의 구체적 얼굴을 바라보는 방법을 상실해가는 것이다. 


이런 방향은 청년세대가 지향해야 할 진보의 길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제는 인간해방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더 괜찮은 사회를 위한 진보적 비전도 담고 있지 않고,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등 의식을 느끼게 하지도 못한다. 


나는 사람들이 누구나 때로는 실수도 하고, 여러 가지로 얼룩이 져 있음을 인정하는 진보,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딛고 있는 공동체의 맥락 속에서 살아가며, 그 속에는 언제나 갈등도 원망도 있을 것을 인정하는 진보를 제안하고 싶다. 즉, ‘덜 완벽한 인간상’을 받아들이는 진보를 주장하고 싶다. 코스모폴리턴 엘리트처럼 기민한 유형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의 본래 성격과 감정, 진실성, 그리고 악의 없는 말실수들을 보다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생각하자. 그리고 그 모든 구체적인 맥락들에 대해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자. 어쩌면 이런 이들이야말로 여전히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기에, 구체적인 상처와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약자들에게 더 진솔하게 다가가는 법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요약하자면, 오늘날 청년세대는 일견 ‘세계화되었고, 온라인 활동에 유능하여 다양한 이슈에 참여하는, 자신감을 가진 개인주의 세대’로 보일 수 있으나, 사실상 이들은 왜소한 자아를 갖고 있다. 오늘날 청년세대가 보수화되었다는 진단은 비약적인 진단이다.


새로운 세대의 왜소한 자아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성에 도달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함을 목도하게 된 현실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진보 일각에서 다시 정치적 올바름에 기반을 둔 정체성 정치를 바탕으로 도덕적 무결함을 요구함으로써, 이들은 더욱더 가혹한 압박감을 느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반면에 신자유주의·능력주의적 가치에 기반을 둔 엘리트들은 오히려 이런 도덕적 요구에 대해 능수능란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진보적 가치가 보호해야 할 소외받은 사람들에게 더욱더 모멸감을 안기는 귀결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지점 위에서 진보를 다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상보다는 (코스모폴리턴의 시각에서) 다소 결함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자신의 구체적 삶에 진실한 사람들을 위한 진보. 그것이 나는 그것이 청년세대가 고민해야 할 진보의 방향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갈수록 비대해지는 세계화와 각박해지는 경쟁 사회에 대한 대안적 담론과 궤를 같이해야 더욱 완성도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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