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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보너머 Jan 05. 2021

자본가는 성웅이 아니다

공동체에 대한 희생이 영웅의 필수조건

편집자 주 : 평소 PC주의자들의 허위의식은 물론 시장경제 지상주의 대해 전방위적이고 통렬한 비판을 가해온 진보너머 필진 박세환의 칼럼입니다. 앞으로도 정기적인 칼럼으로 독자와 회원 여러분께 찾아뵙고자 합니다:)


종종 자유시장 예찬자들은 유능한, 유능해서 성공한 자본가들이 역사적 위인들처럼 존경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들이 사회에 기여한 측면에 대한 감사 가득한 존경을 말이다.


예를 들어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조너스 소크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소아마비 백신으로 지금껏 대체 몇 명이나 목숨을 건졌을까? 그건 아마 측정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많은 이들은 개발자의 '능력'에 존경을 표하는 듯하다만 조금 달리 생각해 볼 필요도 있을 듯하다.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조너스 소크 박사가 자신의 위대한 걸작품을 철저한 시장논리에 기반,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까? 자신의 발명을 통해 수명을 연장하려는 이들에게 그 연장될 수명만큼의 값을 청구하며 살았다면 사람들이 칭송하는 '그' 소크 박사일 수 있었을까?     


분명한 건 만약 박사가 '그랬다'면, 아마 현생인류의 개체수는 지금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란 점이다. 반면 부잣집 아이들에게 '목숨 값'을 톡톡히 받은 박사의 일가는 세계 최고급의 부자가 돼서 왕이나 황제처럼 군림하며 살았을 법하다. 어쩌면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됐을 수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크 박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신은 그저 평범한 재산을 가진 아저씨로 살다 떠났고, 그 대가로 어마 무시하게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건졌다. 이것이 바로 소크 박사가 존경받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한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것인가?" 특허권을 이용해 이윤을 챙기면 엄청난 부를 획득할 수 있었음에도 그리 하지 않았음을 의아해하는 이들이게 소크 박사가 남긴 명언 of 명언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시장의 윈윈'을 주장한다. 욕망에 불타는 이들이 시장 속에서 각자 그 욕망의 최대치를 추구하면 그 속에서 전체 사회도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관점 하에선 시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한 어떤 부자는 결과적으로 전체 사회의 발전에도 기여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윈윈'이 존재할지라도, 오늘날 그 정도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어 있다. 윈윈의 측면이 과대평가될 때, 반대로 시장이 가지는 제로섬적 측면은 과소평가된다. 


때문에 시장의 실패를 돌아보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그동안 과소평가된 "음의 외부효과"에도 마땅히 관심을 가져 봐야 할 것이다. 어느 한쪽이 너무나 많은 이익을 얻음으로 다른 쪽 이들이 더욱 고통받는 현상들 말이다.


이 관점까지 충분히 고려하건대, 시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한 어떤 부자는 기껏해야 그저 자기 능력으로 자기 배를 열심히 불렸을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빌 게이츠, 마크 주커버그, 이건희. 


그렇다. 다 뛰어난 인물들이다. 일부 극단적 좌파들과는 달리 나는 그들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그리고 각자 그만큼 세상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것까지 부정하진 않고자 한다. 분명 그들은 뛰어났고 세상에 기여했다.                

하지만 또한 그들은 시장주의적 마인드로 자신들이 기여한 만큼의 값을 세상에 청구했다. 청구해서 그 값을 받아 냈고 그 결과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대 갑부의 반열에 올랐다. 다시 말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기여한 만큼 대가를 받아냈다. 결코 '공짜 노동', '공짜 기여' 따위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을 존경해야 하는가? 얼마나? "우리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건 정육점과 양조장, 빵집 주인의 자비심이 아닌, 이기심 때문이다"라는 애덤 스미스의 말을 비틀어 보건대 그들이 정말 남들 이상의 특별한 존경을 받아야 할지 의구심이 든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법률 위반에 관한 이런저런 뒷 이야기들이 설령 모두 뜬소문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들이 많은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엔 쉬이 동의할 수 없다.


존경할 수 있는 건 그들이 그 값을 청구하지 않고 그 대부분을 사회에 기부해 그만큼 전체 사회에 이득을 가져다주었을 때 가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보고와 이순신 이야기를 하며 이번 글을 마치고자 한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세우고 해적들을 소탕함으로써 나라에 공을 세웠지만 그만큼의 대가를 정부로부터 받고 싶어 했다. 결국 그 값(자신의 여동생이 왕비가 되는 것)을 청구했고, 정부로부터 거절당하자 분개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결국 반란군 수장으로 죽었다.     


반면 이순신은 '그 값'을 정부에 청구하려 하지 않았다. 청구할 방법도 없었겠지만 평소 언행으로 보건대 딱히 청구할 의지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순신은 '성웅'이다.      


만약에 이순신이 용병대장이었고 자신이 세운 공로만큼 청구서를 내밀었다면 조선 입장에선 나라를 내다 판들 그 값을 다 치를 수 있었을지 심히 의문스럽다.


만약 이순신이 그렇게 악착같이 '그 값'을 받아내고야 말았다면 역사는 그를 어떻게 기록하게 되었을까? "그냥 능력이 뛰어났던 용병대장" 정도로만 남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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