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보너머 Jul 18. 2022

불편부당 창간호 독서후기(2)

한국의 페미니즘은 어째서 외면받았는가?

* 진보너머 필진 다수가 합류한 <불편부당> 창간호에 대한 독후감 공모전을 최근 진행했습니다. 그 중 2위로 당선된 "조자영(필명)"님의 독서후기를 공유합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2022년 6월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가톨릭대학교 초빙교수 윤지선과 유투버간의 민사재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윤지선이 저술한 「관음충의 발생학」이 보겸에 대한 허위사실 적시로 명예를 훼손했기에 5천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윤지선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여론-학계-정치-사법계에 불어닥친 반여성주의 물결"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페미니즘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공연히 미움받는 존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한국의 페미니즘은 이렇게까지 추락해버리고 말았는가? 이에 대하여 생각하던 도중 문득 몇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필자가 오프라인에서 페미니즘을 정치적으로 처음 목격한 것은 2020년 4월 15일 21대 총선을 위한 유세기간 도중이었다. 여성의 당 당원이 대기업 경영인의 실명을 거론하며 한국 여성의 미래를 위해 1억원만 돌려달라는 내용의 팸플릿을 들고 유세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돌려달라'는 문구였다. 자신의 배당금을 요구하는 듯한 자신감은 지나가는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힘은 투표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해 여성의 당은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다만 그 구절의 당당함만이 기억에 남는다. (해당 문구가 기부의 상한선을 2천만 원으로 제한한 정치자금법 11조 위반이라는 사실은 넘어가도록 하자.)


본래 정당의 목적은 한 국가 혹은 지역의 정치적 활동을 위한 조직이다. 그리고 정치란 한정된 자원의 배분 과정을 논의하거나 그 결정을 집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유권자가 보기에 여성의 당 당원들은 정치, 즉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진지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을 명목으로 무언가를 구걸하는 부랑자로 보였다. 상식적으로 대기업의 정치인들이 무엇이 아쉬워서 1억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무명의 존재에게 준단 말인가. 그리고 한국 여성의 정치가 기업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자진해서 재벌들과 결탁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을 대중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고려한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던 것일까.



서프레저트 운동 이래 페미니즘의 목적은 여성이 태생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지님을 주장하고 이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페미니즘을 한국어로 남녀동권주의, 여권확장론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특성을 불필요한 방향으로 부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페미니즘이라는 핑계로 벌어지는 여러 현상은 내가 이해해왔던 페미니즘과는 사뭇 달랐다. 그곳에는 자신들이 수천 년 동안 억압받아온 수천만 명의 여성을 대변한다는 믿음을 빌미로 일부 미성숙한 주장을 펼치는 여성에게마저 무조건적인 원조를 강변하는 사람들만이 있었다. 인터넷이나 뉴스를 통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여성은 자신의 힘으로는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는 가련한 존재로 보였다.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이 억압받아온 여성들을 대변한다는 명제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바쿠닌은 말했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대표하는 자리에 올라가면 그 사람은 이미 노동자가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사회의 질서를 결정하는 과정에 합류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부조리한) 주류사회 질서의 일원으로서 활동해야 한다. 만약 그것을 부정하고 자신을 정의하는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사회 질서 속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정작 그 특권을 맛본 이들은 자신을 옭아맨다고 주장한 주류사회의 사슬을 내려놓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그것을 급진적(Radical)이라 말하지만 사실 그들이 말하는 급진이란 자신들을 옭아매는 사슬을 깨부수는 것 대신 원을 그리며 더 빠르게 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그들은 이중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여성들은 항상 피해만을 보는 수동적 약자라는 관념을 가지면서 그 피해를 보상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을 괴롭히는 근원이었던 '약자'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여성의 당 당원이기도 한 윤지선 교수가 소위 보겸 사태에서 보여준 태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윤지선 교수는 도의적, 학문적으로 책임을 지라고 할 때에는 '학문의 자유'를 명분으로 연구자의 권리를 내세웠지만 자신의 지지자들에게는 '여성' 연구자가 차별을 받는다면서 동정을 호소했다. 물론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이 공존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윤지선 교수에게 허용되는 이중의 정체성이 다른 이에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약자인 여성은 필요할 때마다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져도 되지만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지 않은 존재들에게는 이마저도 허용되지 않고 오직 여성에게 피해를 주는 가해자의 성격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그간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이런 논리적 비약을 해결하기 위해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백래시(Backlash)라는 편리한 개념을 빌려 온다. 백래쉬의 주체는 변화무쌍하다. 때로는 여론이 되고 학계나 정계가 되고 때로는 사법부까지 가세하게 된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지 않은 존재들은 잠재적으로 모두 여성의 적이라고 규정된다. 그러나 여성들이 여성 외의 존재와 연대하지 못한다면 그 결말은 어떻게 되겠는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보자. 페미니즘의 목적은 양성평등이었다. 즉 남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여성도 할 수 있기에 양성 간에는 동등한 기회와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정말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와 권리가 주어진다면 상황이 나아진다고 생각하는가? 그러기는커녕 여성의 약자성을 무한정 강조하는 행동만이 더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약자인 여성은 (대부분의 서민들이 일상에 마주치는) 사회에 만연한 혐오(증오)를 이겨낼 수 없으니 특별히 더 보호받아야 한다는 식이다. 이렇게 말하면 정작 여성은 무언가를 이루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는 보호와 관심을 갈망하는 존재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다시 윤지선 교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보겸과의 1심 소송에서 패소한 윤지선 교수는 여성들에게 연대를 부탁한다. 대학 교수인 자신이 여성들의 대의를 대변하기 때문에 유투버에게 무리한 여성혐오 딱지를 씌우다가 패소한 자신을 위해서 다른 평범한 여성이 연대해줘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펼친다.


결국 이들에게 있어 '행동'이란 엘리트 여성이 필요로 할 때에만 보통의 여성들을 선동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전체주의 정권에서 자신들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해 대규모 군중동원을 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극히 일부의 여성들은 이에 순응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윤지선 같은 인물이 자신들의 처지를 일깨워준 대변인이자 자신들의 마지막 상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 역시 자칭 페미니즘의 대변인들이 채워준 목줄이 자신들을 보호해준다고 믿으며 아무런 실질적 진전이나 결실을 이루지 못한 채 원을 그으며 돌고 있다. 그리고 그 속도가 빠르지 못해서 사회적 차별이 지속되는 것이라고 믿을수록 더 빠르게 돌고자 한다. 그럴수록 목줄은 자신의 목을 더 강하게 조르겠지만 말이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유명한 선전이 있다.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오늘날 페미니즘이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명제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들은 피해자 의식이라는 사슬을 집어 던지고 인간으로서 세상 속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를 일삼는 기득권층에게 은총을 갈구하는 행위를 그만두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사회 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피해에 대한 보상이라는 소극적 대책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불평등 타파를 위해서는 여성만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을 상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에 특정한 정체성이 그 보편적 존재보다 우선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백래시를 막기에 더 좋은 방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그러한 지혜가 엿보이지를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위협받는 처지라고 강변하면서 받아낸 약간의 특혜로 스스로 온갖 문화적 검열을 일삼는 '헌병보조원'이 되기를 자처한다. 그리고 길거리에 나가 페미니즘을 전파한다. 이제는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지만 상관없다. 원래 신흥 종교가 길거리 포교를 하는 목적은 기성 사회질서를 '전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거부 받아 마음의 상처를 받은 신도들을 치유한다는 명목으로 '길들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류 페미니스트들에게 평번한 여성이란 좋은 장사수단이지, 연대의 대상은 아니다. 정작 엘리트 페미니스트 자신들은 여성이기 이전에 학자이자 정치인이니까 말이다.


영국의 시인 조지 바이런이 했던 말로 글을 마치겠다. "부를 경멸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절대 믿지 마라. 부를 얻는 것에 절망한 인간이 부를 경멸한다. 이런 인간이 부를 얻었을 때, 제일 결말이 좋지 않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