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재 Jun 21. 2017

두 번째 자기소개서

취업과 이직을 고민하는 당신에게

자기소개서는 자기 자신, 살아온 이력, 살아갈 계획에 관한 정보의 요약이다.


유시민


2015년 말, 누가 봐도 재미있는 일을 누구보다 재미없게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재미있게 일할 수 있을까. 이직을 고민했다. 눈여겨보던 회사가 생각났고, 자기소개서를 쓰기 시작했다. 얼마 후 서류전형에 통과했다는 메일을 받았다. 문득 내가 도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를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가짐으로 면접에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 회사에서 조금 더 배우고 가겠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이 글은 그때 쓴 자기소개서다. 앞서 말했지만, 순수한 의도로 쓴 글은 아니다. 그래도 진심을 다해 나를 소개했다. 나는 이 글을 앞이 막막할 때 읽는다. 이 글에는 내가 그동안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이 쓰여있다. 그래서 이 글은 나에게 나침반 같다. 언젠가 회사를 그만두면 이 글을 공유하고 싶었다. 내 20대를 잘 요약했고,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잘 제시했으며, 자기소개서치고 나름 재밌다.


지난 5월, 회사를 그만두었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은 나에게 물었다. 왜 회사를 그만두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그때마다 여러 가지 답을 했지만 기분이 찝찝했다. 그렇다고 다시 만나서 처음부터 다시 답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러다 이 자기소개서가 생각났고, 이 글을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이라면 내 답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지 않을까.


겨우 자기소개서 보여주면서 서두가 길었다. 어색한 문장과 잘못된 맞춤법을 고치고, 회사와 프로젝트 이름은 최대한 가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색한 곳이 있을텐데, 내가 프로 작가가 아니기에 그 부분은 넘어가거나 댓글을 남겨주시길 부탁드린다.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가슴속 열정을 잃는 비극과 열정을 품는 비극.


조지 버나드


밴드 연습을 마치고 집에 가던 어느 날, 친구가 OO기획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처음 들어보는 회사였다. 친구는 OO기획이 하는 다양한 일에 대해서 설명해주었고, 이내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잡플래닛에서 OO기획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몇 가지 키워드가 눈에 들어왔다. 실험적 프로젝트, 새로운 도전, 특별한 경험, 그리고 좋은 사람들. OO기획은 구성원들의 이해와 능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디어를 직접 개발해가며 디지털 기술을 녹여낸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있었다. 일을 시작하고 한 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광고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때의 내가 떠올랐다.


2011년 3월, 데이비드 오길비의 ‘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는 내 세상을 움직였다. 그리고 나는 광고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시간은 항상 부족했고 시간을 만들어야만 했다. 빈지노의 'Always Awake’와 매드클라운의 ‘노력의 천재’를 들으며 잠과 새벽을 바꿨다. 부모님과 친구들은 걱정했다. 그들에게 잠도 없이 목표만 있는 나의 삶은 비극이었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교내 마케팅 학회에서 5학기를 보냈고, 그 사이 60여 개의 공모전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수상했으며, 기회가 닿아 TBWA와 제일기획에서 기획 인턴을 했다. 내 대학생활은 분명한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노력과 열정으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열정적인 ‘예비 광고인’이었다.


Bing의 'Decode Jay-Z' 캠페인은 항상 나의 나침반이 되어왔다. 데이비드 드로가는 Jay-Z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와 연관된 공간과 사물에 자서전의 내용을 담았고, Bing 지도에서 하나하나 찾아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는 전통 미디어들을 비틀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미디어였다. 미디어가 메시지이고 크리에이티브였다. 디지털 기술은 소비자와 브랜드의 간극을 좁혀주었고, 디지털 기술은 드로가가 보다 파괴적(disruptive)으로 미디어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기존 광고 비즈니스에 디지털을 더해 고정관념을 흔들고, 비틀고, 뒤집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2015년 1월, XX기획의 신입사원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디지털 기술과 관련된 신사업을 인큐베이팅하는 팀에서 일을 시작했다. 인큐베이팅은 빈 장소에 건물을 세우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다. 기술 리서치부터 시작하여 기획, 제작, 운영 전반에 이르는 과정 모두가 한 팀에서 진행된다. 올해는 VR을 중심으로 업무가 진행되었다. 나는 클라이언트 홍보를 위해 제작한 VR 컨텐츠 앱의 운영 및 컨텐츠 업데이트를 담당했다. 그리고 서울 모터쇼 및 다양한 해외 모터쇼를 위해 기존 VR 컨텐츠를 기반으로 오큘러스 리프트를 연동한 4D 시뮬레이터를 제작하여 운영했다. 추가로 사내 디지털 역량 강화를 위한 VR 스튜디오 사업계획을 담당했다. 기술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요구되었고, 많은 부족함을 느끼고 틈 날 때마다 코딩을 공부했다.


그리고 6월, 칸 국제 광고제에 갔다. 다른 사람들이 수상작을 보는 동안 나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AKQA는 매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Future Lions라는 대회를 진행한다. 주제는 간단하다. “3년 전에는 할 수 없던 방식으로 소비자를 연결하라.” 올해 최초로 한국 학생이 수상했고 나는 그녀의 통역을 담당했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스냅챗의 휘발성 메시지를 활용해 왕따 당하는 학생들이 심리상담가들과 부담 없이 상담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심플한 아이디어에 박수를 쳤다. 그리고 내 안에서 그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가 떠올랐다. 디지털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사고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기술은 결국 사람들과의 연결방식을 바꾸는 수단이었다.


돌아와서 짧은 공유회를 가졌다. 디지털 시대의 아이디어는 분위기에서 만들어진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이야기했다. 내 나름대로 디지털 기술을 이해하고자 사이버대학 컴퓨터학과에 등록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무언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디지털 기술의 신기함만을 보았다. 기술을 공부하지 않아도 문서를 만들 수 있었기에 우리의 보고서와 제안서들은 Tech-based 캠페인의 신선함만을 이야기했다. ‘why'와 ‘how'는 없고, 오로지 ‘what'만 있었다. 덕분에 ‘why'는 클라이언트의 입맛에 따라 바뀌었고, ‘how'는 제작사와의 실현 가능성의 싸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행착오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마다 반복되었다. 이해할 틈도 없이 팔기에 급급한 아이디어를 만드는 것이 이내 답답해졌다. 내 눈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OO기획을 보았다. 기사에서 ‘고민할 시간에 실제로 만들어 보자’는 회사 방침을 읽었다. 속이 시원했다. 개념에 빠삭한 기획들이 모여 답이 나지 않는 회의를 한다. 프로토타입을 생각해내도 인력과 장비의 문제로 인해 항상 실현 가능성의 벽 앞에서 좌절한다. 나의 매일이 그러했기에 더욱 인상적이었다. 덕분에 기획과 제작은 물론 개발 역량까지 갖추고 있는 OO기획이라면 디지털이라는 사고 과정을 바탕으로 기획한 아이디어를 내 손으로 개발하고 실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기라면 처음 내 다짐처럼 판을 흔들고 세상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친구들은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기존의 방식을 바꾸고 싶고, 관습과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생각을 움직이고 싶다. 벽을 만나면 즐겁다. 그만큼 공부하고, 넘어야 할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고민하고 씨름하는 과정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1년의 회사 생활은 좋은 경험이었다. 외부의 무언가가 아니라 내 안의 소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모든 과정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뜻밖의 여정이 주는 즐거움을 알기에, 또다시 새로운 길을 나서보려고 한다. 인생의 두 가지 비극이 있다면, 나는 가슴속 열정을 품는 비극을 고르고 싶다. 그리고 OO기획에서 태도로 그 열정을 증명하고 싶다.


하루 24시간 중에 가장 중요한 8시간을 온전히 바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설레는 일이라면, 다른 자극은 절대 필요하지 않다. 그 일이 한없이 깊고 새로운 것을 계속 발견하게 하며 오르지 못한 높은 산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음을 깨우쳐 준다면, 손대지 않은 광맥이 무한히 펼쳐져 있는 것 같은 흥분을 준다면 기분 전환이나 속풀이 등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마루야마 겐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