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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재 May 27. 2019

이직을 결심하는 순간

뉴스레터에 싣지 못한 이야기 #1

불같은 2주였습니다. 회사에서 많은 일이 있었고, 길고 긴 고민 끝에 마음을 정했습니다. 네, 이직이죠. 그렇다고 바로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아직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포트폴리오를 완성한 것도 아니거든요. 월세도 내고, 먹고살 돈도 벌어야 하고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해볼게요.


배경은 이렇습니다. 제가 다니는 디자인 에이전시는 원래 산업 디자인으로 알려진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디지털 디자인 능력을 요구하는 클라이언트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저희도 디지털 팀을 키우기로 결정합니다. 저도 그 무렵 합류했습니다. 초반에는 산업 디자인 프로젝트가 주를 이뤘지만, 디지털과 피지컬 경계에 있는 프로젝트도 조금씩 생기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로 산업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인터랙션 디자인과 하드웨어 UX 프로토타이핑을 도와주며 제대로 된 디지털 프로젝트가 들어오길 기다렸습니다. 물론 즐거웠습니다. 산업 디자이너, 비주얼 디자이너,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과 함께 일하며 다른 곳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걸 많이 배웠거든요. 그렇게 반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저를 뽑았던 디지털 팀 매니저가 퇴사했습니다.



상황은 급격히 변했습니다. 조금이나마 들어오던 디지털 프로젝트는 맥이 아예 끊겼고, 디지털 팀 사람들도 하나둘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매니저는 이런 상황에서 디지털 팀 사람들을 클라이언트 회사로 파견 보냈고, 그렇게 이름만 남은 디지털 팀에는 저와 다른 시니어 UX 디자이너만 남게 되었습니다. 매니저는 약속했습니다. 파견이 끝나고 돌아오면 꼭 디지털 팀 디렉터를 충원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도 따오겠다고.


3개월이 지나서 오피스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하셨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할 일이 없었던 저희는 뭐라도 만들어보려고, 디지털 팀 디렉터 채용 공고를 올리고, 새로운 클라이언트를 따기 위한 경쟁 입찰 프로젝트에 뛰어들었습니다.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결국에는 디지털 디렉터도 뽑았고, 경쟁 입찰에서 프로젝트도 땄습니다. 정말 많이 기다렸습니다. 이제 제대로 뛰어보나 싶었습니다.


그 사이 저는 이 프로젝트, 저 프로젝트에 불려 다니며 별의별 일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프로젝트에 따라 6시간, 8시간, 20시간, 3일 반, 혹은 2주 동안 사진 촬영, 영상 촬영, 편집, 애펙, 납땜까지 하고... 오죽하면 매니저가 저를 맥가이버칼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까요. 할 일이 없을 때는 괜찮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퀄리티를 뽑아내는 능력을 인정받은 거기도 하고, 다른 직무 사람들과 일하면서 전혀 다른 걸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이런 프로토타입도 만들고 말이죠


물론, 저는 이 먼 북유럽 땅까지 이런 일만 하려고 온 건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게 빨리 시작되기를 그 누구보다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5월 첫째 주, 새로운 디지털 디렉터가 출근했고, 새로운 프로젝트도 킥오프 했습니다. 프로젝트 매니저는 아직 클라이언트에게 프로젝트 전체를 승인받지는 못했고, 8주 동안 리서치와 아이데이션을 진행한 후 경과를 보기로 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3주 동안 진행되는 디자인 스프린트만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뭐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렇게 2주 동안 열심히 리서치, 아이데이션, 프로토타입, 사용자 테스트를 하면서 결과물을 하나씩 만들어나갔습니다. 그리고 2주 차 금요일이 되었습니다. 느낌이 싸해서 프로젝트 매니징 툴을 확인해보니 제가 기존 프로젝트에서 빠져있고, 전혀 다른 프로젝트에 들어가 있더군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말이죠.


물론, 프로젝트가 아직 리서치 단계에 있었고, 저는 프로토타이핑에 강점이 있는데, 이 단계에서는 제가 할 일이 많지 않고, 예산도 빡빡해서 일단 빼는 게 낫겠다는 프로젝트 매니저의 입장과 판단은 존중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왜 다른 인터랙션 디자이너가 들어가 있을까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왜 아무런 상의 없이 진행했을까요? 여기에 전혀 다른 프로젝트는 분명 제가 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라 거절했는데, 왜 들어와 있을까요?



저는 상황 파악을 위해 곧바로 프로젝트를 할당한 디렉터를 찾아가 따졌습니다. 그는 당황하며 제 일정이 비어있어서 저를 그 프로젝트에 투입했고, 이제 막 설명하던 참이라고 급히 둘러댔습니다. 저는 제가 가져온 프로젝트에 왜 참여할 수 없으며, 거절 의사를 분명하게 표한 단기 프로젝트에 왜 또 투입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고, 앞으로는 가능하면 세 달 이상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디렉터는 제가 가져온 프로젝트에 제가 얼마나 애정을 가졌는지 이해하며 다음 단계에서 메인 디자이너로 참여할 수 있고, 앞으로 들어올 많은 프로젝트에 제가 핵심 인력으로 포함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가 디렉터를 쏘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프로젝트 매니저는 저에게 미리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자기 잘못이라며 사과를 하더군요. 그 순간에는 바쁘고 정신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하나씩 곱씹어보는데, 저를 맥가이버칼이라고 부른 예전 매니저의 말이 문득 떠오르면서 아차 싶더라고요. 맞아요. 저는 모든 프로젝트 초반에 투입되고,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제외되는 그런 존재였던 겁니다. 디렉터는 작년 9월에도, 올해 1월에도 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잔잔하게 식어가던 마음속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고, 깊이 묻어두었던 불안은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떠날 때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회사를 믿고 기다릴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어쨌든 시간은 가고 있으니까요. 저는 이 불타는 에너지를 포트폴리오 만드는데 쏟기로 했습니다. 사이드 프로젝트도 열심히 하고요. 에이전시에서 4년 동안 있으면서 다양한 일을 해봤으니, 이제는 자체 제품이나 서비스가 있는 회사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드네요.


주어진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빈자리를 열심히 치고 들어오고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겪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매니저, 디렉터들과도 꾸준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할 일은 하고, 할 말은 해야죠. 행운을 빌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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