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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재 Nov 08. 2020

인포테인먼트 디자이너의
이직 1년 차 숨 고르기

모빌리티 UX, 이거 하면 할수록 어렵다 어려워

자동차 회사로 이직하고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디자인한지도 1년이 지났다. 스톡홀름에서 서울로, 에이전시에서 인하우스로, 가전제품에서 자동차로, 인터랙션 디자인에서 UX 디자인으로,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옮겨오면서 맡은 일의 스케일이 커졌고, 그와 함께 책임도 늘어났다. 빨라진 삶의 속도에 적응하고, 1인분을 해내기 위해 많은 걸 흡수하고, 끊임없이 변해야 했다. 집에 오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그대로 침대에 눕곤 했다. 치열한 1년이었다. 나는 무엇을 느끼고, 배웠을까. 짧지만 길었던 1년을 뒤돌아보았다.


나는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의 사양을 기획하고, 화면을 설계하고, 표준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유관 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부터 시작해서 전반적인 규칙과 구조를 잡고, 와이어프레임을 그리고, 문구를 쓰고, 때때로 프로토타입이나 그래픽도 직접 만들면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이 탑재된 자동차들에 새로운 기능이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도록 챙기는 일을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인터랙션 디자인과 UX/UI 디자인도 하고, 그래픽 시안을 잡기도 한다.


우리 팀은 30명 정도 되는데, 한 달에 한 대 꼴로 출시하는 자동차부터 1년에 3~4회 정도 진행하는 업데이트, 앞으로 출시할 자동차에 들어갈 차세대 시스템의 디자인까지 동시에 챙겨야 하다 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실수하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해야 프로세스가 일하게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서로 크로스 체크하면서 문제를 사전에 발견하고, 대응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일하고 있다.


이거 만든다고  고생한 거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네...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디자인하기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자동차에 들어가는 수많은 부품 중 하나다. 이전에는 오디오, 라디오, 혹은 내비게이션 정도를 제공하는, 있으면 좋지만, 굳이 없어도 되는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전기차의 부상과 자율주행 기술의 도입으로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자동차라는 하드웨어를 직접 제어하고, 설정할 수 있는 기능과 실시간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커넥티드 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그 필요성과 중요도가 급상승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 새로운 요구사항과 기능들이 물밀듯 쏟아지기 시작했고, 우리 팀은 운전자를 넘어 자동차에 타는 모든 사용자에게 더 좋은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매일매일 새로운 일과 마주하고, 역할을 키워나가고 있다. 스마트폰을 만들다가 오신 경력직 선배들이 말하길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과 무질서가 피쳐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가던 시기 같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을 수 있어서 힘들기는 해도, 디자이너로서 질서를 하나씩 만들어나가는 귀한 경험을 하고 있다.



에이전시와 인하우스의 차이


이전에 다녔던 회사와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내가 해결하고 있는 문제가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우리의 문제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에이전시는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정해져 있고, 그 과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좋은 클라이언트라면 에이전시가 과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회사 내부의 이해관계나 기존 이력은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게 가이드를 명확하게 주고, 컨셉을 제시한 후 이를 실제 제품에 적용하거나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는 것은 클라이언트의 몫이기 때문에 에이전시에 다닐 때에는 전후 관계에 대한 걱정 없이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정의하고, 회사 내부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기존 이력을 파악하고, 컨셉을 만들고, 실제 제품에 적용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는 것, 여기에 에이전시와 일을 한다면 과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정확한 가이드를 주는 것 모두 나의 일이기 때문에 같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특히 자동차에서 결과에 대한 책임은 조금 더 무거워서 법규도 확인하고, 특허를 침해하지 않는지도 찾아보고, 실제 기능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한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다른 사람을 불러서 다시 한번 더 두들겨보는 심정이다. 이건 시간이 지나도 계속 어려울 것 같다.


그나저나 GV70은 봐도 봐도 예쁘네

 


UX 디자인의 8할은 커뮤니케이션


자동차 한 대를 개발하기까지 보통 3~5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며 개발에서 제조까지 만 명 정도가 관여한다고 한다. 각자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많은 사람이 의사결정에 참여하기 때문에 더 좋은 UX를 만들기 위해 내줄 건 내주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도록 논리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게 필수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동차 자체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물론이고, 각 기술 혹은 기능이 어떤 과정으로 변해왔는지에 대한 이력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무언가가 결정되었을 때의 과정을 잘 기록해서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할 수 있도록 대비를 해두어야 한다.


A라는 새로운 기능을 처음으로 만들어서 B라는 자동차에 넣으려고 한다고 치자. 우선 이게 과연 사용자에게 충분히 유용한지, 사용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인지부터 이 기능을 만든 팀과 논의한다. 그 후에 사용자가 이 기능을 인포테인먼트 화면에서 제어하고 설정할 수 있게 하는 게 편할지, 물리 버튼을 만드는 게 편할지, 둘 다 제공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자동으로 동작하게 만들지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한다.


이어서 이 기능의 이름은 뭐라고 할지, 어떤 문구와 이미지로 기능을 표현할지 내부적으로 고민하고, 여기서 만든 시안을 가지고 유관 부문과 논의한다. 기능에 따라서 상품 기획팀이 참여할 때도 있고, 해외 연구소가 참여하는 경우도 있고, 내부 설문조사나 사용자 조사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결론적으로 체크 박스 혹은 팝업 하나가 추가되는 때도 많지만,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동차에 들어간 걸 볼 때면 뿌듯함을 감출 수 없다.



디자인 원칙의 중요성


조직이 크고, 관여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문구 하나를 정하거나, 메뉴 위치를 결정하거나, 버튼 하나를 구성하는 것 같은 작고 사소한 일에도 각자 다른 이해도와 요구사항을 가진 다양한 부서의 사람들이 참여한다. 그러다 보니 플랫폼을 만들고, 관리하는 디자이너로서 경험의 일관성을 확보하고, 이해관계자를 설득하기 위한 디자인 원칙을 세우고, 전파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원칙을 세우는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가뜩이나 자동차라는 제품 그 자체가 복잡한데, 모닝 같은 경차부터 GV80 같은 고급 SUV까지 차종도 다양하고, 국내는 물론 미국, 유럽, 중국 등 전 세계에 출시하고 있다 보니 모든 사용자의 패턴을 파악하고, 그 니즈를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에 국내와 해외의 법규나 특허도 고려해야 하고, 국가별로 다른 안전 기준도 충족시켜야 하다 보니 고려할 게 한가득이다.


실컷 거창하게 얘기했지만 원칙이라는 게 특별한 건 아니다. UX 디자인이나 프로덕트 분야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들. 사용자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찾기 쉬운지, 이해하기 쉬운지, 사용하기 쉬운지, 그래서 그들에게 정말로 유용한 지 정도의 질문을 던지면서 그들의 눈으로 제품을 바라보며, 사용자를 대변하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여기서 세운 원칙이 저기에는 안 맞는 경우도 많고, 모든 경우를 포괄하게 바꾸면 구체성과 구속력이 없어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처음부터 완벽한 원칙은 없다고 생각한다. 원칙은 말 그대로 원칙일 뿐이고, 안 맞는 걸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다. 한 번 만들면 수정할 수 없는 하드웨어와 달리 소프트웨어는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고칠 수 있기 때문에 일관성과 퀄리티 측면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고치면서 개선해나가면 된다. 제품의 퀄리티는 그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수준과 꼼꼼함에 달려 있다.


법규에 디자인까지 모두 챙기려면 머리 터진다


자동차와 모바일은 다르다?


이직하고 한 3개월 정도까지는 인포테인먼트와 모바일 UX가 왜 다른지 이해하지 못했다. 멀티 터치가 가능한 화면이 있고, 내비게이션이나 미디어처럼 모바일과 비슷한 앱을 제공하고, 애플은 카플레이, 구글은 안드로이드 오토로 모바일의 화면을 인포테인먼트에서 제공하는데 뭐 때문에 이렇게 다른 걸까. 이 질문들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고,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기본적으로 자동차 인포테인먼트와 모바일의 UX 패턴이 다르다. 모바일은 사용자의 모든 주의 집중을 요한다. 사용자는 한 손 혹은 양 손으로 들고 사용하며, 사용자의 눈과 귀는 모바일 화면을 향하고 있다. 인포테인먼트는 부가적인 화면이고, 사용자의 주의 집중 중 일부를 요한다. 사용자의 한 손 혹은 양 손은 핸들에 있어야 하고, 사용자의 눈은 전방의 차선을 향하고 있으며, 인포테인먼트에 표시되는 정보를 힐끗 보거나, 무언가를 조작하는 그 순간에만 한 손이 향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인포테인먼트의 UX는 사용자가 힐끗 보는 그 짧은 순간에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적은 동작으로 더 효율적으로 조작할 수 있도록 발전해왔다. 드래그나 스크롤 같은 인터랙션보다 탭이 많고, 텍스트보다 이미지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고, 소프트 버튼으로 모든 동작을 처리할 수 있음에도 노브 같은 물리 버튼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또 그렇게까지 다른 건 아니다. 큰 화면과 터치 인터페이스라는 기본적인 하드웨어의 속성이 같고, 자율 주행 기술의 도입으로 운전 상황에서의 UX 패턴이 바뀌고, 전자 결제 같은 커넥티드 서비스가 자동차 안으로 들어오면서 인포테인먼트의 UX도 모바일처럼 변화해가고 있다. 여기에 모바일에 익숙한 사용자가 주를 이루게 되면 변화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과도기에 모두의 니즈를 만족시키는 디자인을 하려니 어려울 뿐이다.


나는 차량 설정 앱의 UX를 담당하고 있...



툴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다


이전 회사에 다닐 때는 디자인 툴이 중요했다. 언제 어떤 과제가 주어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과제가 주어졌을 때 그 상황에 맞게 빠르게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 다양한 툴에 더 익숙해져야만 했다. 에이전시에서 툴을 잘 다룬다는 것은 어떤 과제가 주어져도 빠르게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시간이 날 때마다 프레이머, 피그마, 스케치, 플린토, 프로토파이 등 다양한 툴을 연습했고, 구현 관점에서 조금 더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 때때로 개발 공부도 했다.


지금 회사는 사내 보안과 개발 환경 때문에 피그마나 스케치 같은 툴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다. 불편할 때도 당연히 있지만, 일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 우리의 목적은 문제 해결이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수단은 크게 상관없다. 언제나 하는 이야기지만, 디자인 툴은 수단일 뿐이다. 그래도 피그마 정도는 쓰면 어떨까 싶다. 디자인 시스템 관리하기도 좋고, 컴포넌트를 일일이 수정할 필요도 없으니 시간도 절약하고 참 좋을 텐데, 아쉽다.




에필로그


회고록이 쓸데없이 거창했다. 이제 겨우 1년 다녔을 뿐인데. 일도 너무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아서 바쁘고, 정신없는 데다가 자동차에 대해서 아직 모르는 게 많고, 디자이너로서도 한참 부족해서 힘에 부치는 날이 많다. 그래도 자동차의 소프트웨어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시점에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의 UX 디자이너로서 플랫폼의 새로운 구조를 잡고, 질서를 세우는 데 참여할 수 있어서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즐기면서 일하고 있다. 팝업과 푸시 알림 규칙에 대한 꿈을 꾸기도 하고...


이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팀원도 계속 들어오고 있고, 전 세계의 다양한 채널에서 들어오는 사용자 의견을 빠르게 반영하기 위해 개발 및 디자인 프로세스도 개선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점점 좋아지지 않을까? 앞으로도 재밌게 달려봐야지.



인포테인먼트 UX가 궁금하다면?

운전 이상의 가치 있는 경험을 위해 연구하다, 차량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UX의 모든 것

내비가 아니라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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